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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다른 도시에서

승리의 나무와 해피 콤마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 (문학동네, 최세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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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에 나오는 인간들은 모두 어느 시점 중년의 문 앞에서 비슷한 생각을 한다. (2018.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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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당종려나무의 영어 이름은 the fortune palm입니다.” 한국어 웹페이지에서 당종려나무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이었다.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곳까지 온들 재산도 행운도 얻을 수 없겠지만, 그저 운명이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2012년 1월, 제주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나자 내 눈에 제일 먼저 익은 것은 집에서 빵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서 있던 특이한 형태의 가로수였다. 이 이국적 열대의 나무는 이곳은 내가 살던 도시와는 너무나 다른 곳임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증거였다. 기후대는 단지 온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삶의 미묘한 온도 차이는 겨울 평균기온 1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닐까? 그 온도가 눈에 보이는 풍경을 다르게 만든다. 임시로 살던 원룸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내가 본 나무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 당종려나무에 품었던 감상은 내가 제주도에 온 이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만큼이나 잘못된 것이었다. 먼저, 당종려나무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 이 식물의 학명은 Trachycarpus Fortunei이고, 영어로는 windmill palm, Chusan Palm이라고 한다. 풍차는 나무의 형태, 추산은 원래 산지였던 중국의 섬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Fortune은 이 나무를 영국의 큐 가든으로 가져갔던 식물 밀수꾼의 이름이었다.

 

나의 사라져버린 재산이여, 행운이여, 운명이여. 밀수꾼의 이름이 붙은 슬픈 나무여.

 

제주도에 한두 달간 가 있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첫 반응은 ‘부럽다’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지 나도 익히 상상할 수 있었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트인 창 옆, 나무 탁자 위에 노트북을 펴들고 우아하게 원고를 쓴다. 가끔은 차를 마시며,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지지만 다시 고상하게 문학의 세계로 돌아와 원고.

 

참으로 슬픈 오해이다. 내가 묵었던 곳은 일조권도 보장되지 않을 정도로 옆 건물에 바짝 붙어 선 오피스텔, 10평 남짓의 원룸이었다. 당시에 한둘 생겨나던 월세형 주거 건물들이 늘어선 동네를 걸어보면 이젠 오해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당종려나무 이외에는 서울 북부의 뉴타운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형마트, 프랜차이즈 우동 전문점, 문 연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로스터리 카페, 건강식품 전문점. 바다는 2주일 기른 손톱의 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보인다고 해도 회색의 겨울 바다는 바람 맞은 피부처럼 거칠었다. 바다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는 달리, 내가 여기 온 것은 인간과의 기본적 상호 작용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사교활동도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 일에만 집중해야할 만큼 정도로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잠 한번 마음 편하게 자지 못할 정도로 마감에 쫓기던 나날들이었다. 내게 잠재력이 있다면 바닥이 보일 정도로 박박 긁어내 써서 일정을 맞춰야만 했다. 일은 점점 버거워지고, 나이만 먹어버렸다. 시간은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고 타인에게 나누어줄 수 없을 만큼 나는 각박했다.

 

그리하여 자발적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삶이 시작되었다. 자신을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 같은 인물에 비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경한 일이지만, 나는 작은 방 안에 틀어박혀 생활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활동을 제외하고는 계속 번역을 했다. 고3 때도 가져보지 못한 몰입의 시간이었다. 간간이 제주도에 살거나 놀러 온 친구들이 위문차 들렀지만, 대체로 혼자였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해 겨울은 제주에도 눈이 많이 왔다. 살아보지 않은 곳에 대한 예상들은 대체로 환상이거나 희망인 경우가 많다. 남쪽 나라 제주는 따뜻하겠지, 아니었다. 바람이 많이 분다. 이건 맞았다. 그러나 마트에는 귤이 많았고, 겨울은 귤과 책이 있다면 견딜 수 있다.

 

설 즈음에는 킨들 본으로 사두었던  『깡패단의 방문』 을 읽었다. 매 장이 섬세하고 가슴 아픈, 그러면서도 묘한 여운이 있는 엔딩으로 이어지는 단편 모음 같은 장편소설이다. 시간의 배열을 완전히 무시하는 이 소설은 70년대부터 근미래까지 일정한 관계망 안에 있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삶을 다루었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레코드 음반 회사의 매니저인 베니 살라자르와 그의 비서인 사샤가 주요 인물인데, 각 챕터의 주인공들은 그들과 오랜, 혹은 스쳐가는 관계로 엮인 사람들이다.

 

『깡패단의 방문』 에 나오는 인간들은 모두 어느 시점 중년의 문 앞에서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제주도에 은신한 나도 생각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이제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초조함에 몰려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깡패단의 방문』 의 한 장, 「A to B」는 베니의 아내이자 홍보 전문가인 스테파니와 그의 오빠인 전과자 줄스가 펑크록 스타에서 이제 만신창이 퇴물이 되어버린 보스코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보스코는 줄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제안하며 말한다.

 

“(…) 이런 게 현실 아니겠어? 이십 년 지나면 반반했던 얼굴도 맛이 가. 뱃살의 반을 잘라낸 사람은 더하지. 시간은 깡패잖아? 그게 제대로 표현한 거 아냐?”(194쪽)

 

소설의 원제인 The Visit of the Goon Squad, 깡패단의 방문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goon”은 어원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말의 해결사나 정치 용역 깡패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요새는 일반적으로 깡패들을 말할 때도 쓰인다. 그리고 책 내에서 반복되듯이, 이 ‘군’, 깡패는 바로 시간을 의미한다. 시간은 우리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전락시킨다. 그들이 공격하면 피할 수가 없고 사정없이 린치를 당한다. 어쩌면 나는 시간에 벌써 넉다운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도저히 이길 길이 없다. 이렇게 발버둥을 쳐도 이제 젊음의 집중력과 열의는 돌아오지 않고, 언젠가 한때는 일에 가졌던 애정조차 다 잊은 채 나는 비참히 다시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처음의 의욕이 좌절되어버릴 때쯤, 친구 K가 나를 방문했다. 그녀와 나는 한때 외국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다. 제주도가 본가인 K는 설을 지내러 왔다가 혼자 있을 내가 염려되어 설음식을 들고 들러준 것이다. 우리는 약밥과 전 같은 명절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우리가 얼마나 버겁게 살면서도 희망이 있었는지, 우리가 믿었던 가치가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 그렇지만 어떻게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지. 나는 언젠가의 겨울, 무척 힘든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내게 K가 밥을 해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얘기를 꺼내자, K 본인은 기억하지 못했으면서도 “지금도 이렇게 해줄 수 있으니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K가 돌아간 후, 나는  『깡패단의 방문』 을 마저 읽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챕터 「순수한 언어」에서는 한때 록 음악과 산업에서 밀려났던 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콘서트가 벌어진다. 그러나 복귀란 쉽지 않고 두렵다. 무대 위에 올라가기를 두려워하는 기타리스트에게 베니는 말한다.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 있을 거야?”
스코티는 고개를 저었다. “깡패가 이겼어.”
(…)
“내가 그랬잖아. ‘이제 네가 스타가 될 차례야’. 그랬더니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지?” 베니는 스코티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생각보다 우아하게 생긴 손으로 스코티의 떨리는 양 손목을 붙잡고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네가 그랬잖아. ‘어디 한번 해 봐’라고.”(451~452쪽)

 

시간은 우리를 해코지한다. 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 한번 해 봐’밖에 없다. K가 돌아간 후, 나는 나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따뜻하기도 했으며, 흘렀기 때문에 용서하거나 잊을 수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은 이 책에 나오는 쉼표와도 같은 것이리라. 사샤의 아들, 자폐증이 있는 아이 링컨은 록 음악 속 쉼표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에 지친 아빠가 짜증스럽게 왜 이렇게 쉼표에 집착하느냐고 물었을 때 링컨은 울면서 쉼표가 나오면 노래가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곧 다시 이어지는 걸 듣고 안심할 수 있어서라고 말한다.

 

무한한 줄 알았던 시간은 언젠가 끝난다. 적어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그렇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에는 끝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해피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지만, 해피 콤마는 분명 존재한다. 삶에 있는 행복한 쉼표들, 그를 향해서 나아간다. 잠깐 멈췄다가도 이어가기 위해서.

 

바로 그것이 내가 제주에서, 당종려나무가 있는 거리에서 외롭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이제 속절없이 늙어가는 일만 남았다고 좌절했을 때, 시간이 깡패처럼 찾아와 나를 후려쳤을 때, 모든 것이 황폐히 무너져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래도 나는 “어디 한번 해 봐”라고 말할 수 있다. 다 끝난 게 아니라, 지금은 쉼표이며 계속 이어져 나가리라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가? The Fortune Palm Tree의 fortune이 운명도 행운도 재산도 아니라 해도, 당종려나무의 꽃말은 승리이고 쟁취이다. 신뢰도 높은 출처는 아니지만, 위키피디아에서 확인도 했다. 고대로부터 승리자에게 바치는 종려나무의 잎. 나는 나를 공격해오는 시간에 대항해서 이길 것이다. 언젠가 무너지더라도 지금은 얻어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깡패단의 방문제니퍼 이건 저/최세희 역 | 문학동네
열두 살짜리 소녀가 간단히 작성한 파워포인트 페이지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휙휙 지나가는 시간의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사막의 아름다운 밤이 눈앞에 그려지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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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현주(번역가)

소설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로맨스 추리 소설을 쓴다. 그리고 드라마를 본다.

깡패단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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