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지각마’의 지각을 위한 변명
우리의 일이 불행한 이유는 일의 과정에서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데 있지 않을까
시간 권력을 쥐고 흔드는 세상의 모든 ‘갑’에게 하고 싶은 부탁은 이 한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이 문장은 내 치트키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2018. 07. 17)
언스플래쉬
취재팀에서 편집팀으로 옮긴 지 한 달 뒤쯤이었나. 팀장과 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다름 아닌 나의 잦은 지각 때문이었다. “늦지 마라.” “죄송합니다.” 따위의 대화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울 리 없다. 나는 “내일은 늦지 않겠습니다.” 같은 헛된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도 늦을 거 같았다. 그리고 늦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불행했다.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나조차도 기가 막혔다. 다른 회사와 비교하면 얼마나 파격적인 출근 시간인가.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출근길에 하루치 기운을 다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한국은 ‘출근하다 죽겠다’라는 제목의 주간지 커버스토리가 나오는 나라다(<한겨레21> 1037호). 그러니 내가 출근 때문에 징징거리는 건 그야말로 사치 아니겠는가. 장담하건대, 지각하는 내가 가장 싫었던 사람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었다. 자기혐오를 반복하던 어느 아침, 나를 향한 과녁에 꽂아 넣을 화살이 바닥나자 나는 질문을 좀 바꿔보기로 했다. 지각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불성실’의 기준은 왜 출근 시간이 돼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있나?
“팀장님. 저는 10시까지 출근 못 하겠습니다.”
더는 죄송하기 싫었다. 경험상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 문제의 성격을 막론하고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솔직함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팀장은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나는 그 말을 결국 해버린 내가 대견해서 웃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나는 못 할 수 있다고, 못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르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 생활’인 만큼 지각하지 않도록 노력은 하겠다고 말했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니,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지각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지만 오전 10시 출근이 힘들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취재팀에 있을 때는 달랐다. 편집팀 발령 직전 일했던 정치팀에서 나는 매일 오전 6시께 일어났다. 아침 라디오 방송을 챙기고, 조간신문 3개를 읽었다. SNS도 수시로 체크했다. 전날 술을 아무리 많이 마시고 귀가한 날도 (다시 잠들지언정) 이 과정은 루틴하게 이뤄졌다. 하루 일정은 스스로 계획했고, 내 의지와 통제 아래 취재가 이뤄졌다. 바뀐 건 한 가지뿐. 팀이 바뀌었다. 팀이 바뀌자 일의 방식이 바뀌었고, 일이 바뀌자 시간 쓰는 법 자체가 달라졌다. ‘내 글’을 쓰는 일에서 ‘남의 글’을 기다리는 일. 편집팀 업무는 ‘기다림’이 거의 전부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할 수 없었다. ‘연쇄지각마’는 그 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였다.
나는 여상을 졸업하고 중소기업 인사팀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뒤늦게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9 to 6’(9시 출근, 6시 퇴근) 때문이었다. 그나마 6시 퇴근은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왜 모두가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야 하는 걸까. 왜 상사들은 직원이 사무실 책상 앞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어야만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학을 나오면 꼭 그렇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년 뒤 그 조건에 일견 부합하는(?) 기자가 되었다. 물론 기자로 일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기자의 일이란 게 ‘나’와 ‘일’을 완벽히 분리하지 못할 때가 많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완벽에 가까운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사 맨 위에 적는 바이라인(기자 이름)의 의미를 책임이라고 배웠다. 허투루 일한다는 건 내 이름뿐만 아니라 매체가 쌓아온 신뢰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정치팀에서 불안을 밥 먹듯 먹으며 시간을 쌓는 동안 나는 ‘나만의’ 일하는 스타일과 리듬과 호흡을 가지게 됐다. 그러니까 나에게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졌다는 건 엄청난 변화였다. 편집팀 발령은 나에게 일과 시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건물주로 태어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되고, 우리는 그 돈으로 ‘아슬아슬’ 입에 풀칠하며 산다. 살아보려고 하는 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때로 우리 삶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다종다양한 책이 증명하고 있듯(‘노동’을 키워드로 한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면 3000종 넘는 책이 나온다.), 다행히(?) 나만 불행한 건 아닌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이 불행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좀 더 주목하는 부분은 ‘시간’이다. 우리의 일이 불행한 이유는 일의 과정에서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데 있지 않을까. 우리는 회사에 단지 노동력을 파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도 판다. 그 과정에서 시간에 대한 통제권과 자율성도 볼모로 잡힌다. 출근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하지만 퇴근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는 듯, 세상은 일자리를 얻는 것조차 힘겨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5분 대기조’처럼 일하는 사람의 수가 전체 인구의 2% 이상이다. 이른바 ‘제로 아워’ 노동자들인데, 근로계약서에 별다른 근무시간을 명시하지 않고 고용주가 원하는 시간에 나와 고용주가 원하는 시간 동안만 일하는 형태의 고용 형태를 말한다. 최저 근무 시간 기준이 0시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의 ‘제로 아워’다. 내가 원할 때가 아니라, 고용주가 원할 때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에 대한 통제권이 있을 리 없다.
『타임 푸어』 는 일하는 현대인의 불행을 드러내는 책이다.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결이 풍부한 책이지만(이를테면 이 책은 ‘페미니즘’으로 분류해도 마땅하다) 내가 굵게 밑줄을 그었던 문장은 이렇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전 8시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캐물을 필요가 없습니다(217쪽).” 나는 재빨리 메시지창을 열어 나처럼 지각 때문에 상사와 갈등하고 있는 친구에게 저 문장을 쳐서 보냈다. “큰 글자로 프린트해서 책상 앞에 붙여, 내일 당장!”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내 제안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아무튼 나를 감탄시킨 저 문장은 한때 미국의 소프트웨어 전문 소매업체 베스트바이(BestBuy)에 근무했던 조디 톰슨이 한 말이다. 베스트바이는 ROWE(Results Only Work Environment) 프로그램을 업무에 적용해 ‘시간의 새장’을 부쉈다. 결과 중심 노동 환경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하는가’를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긴다. 이 시스템은 “남이 시간 쓰는 방식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존중을 바탕으로 굴러가는데, 동료가 오후 3시에 자리를 비워도 ‘당신도 나처럼 오후 5시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어디 가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식이다. 직원들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적게 느끼게 됐고, 회사에 대한 충성도도 높아졌다. 시간 권력을 ‘갑’이 쥐고 있다고 해서 ‘을’에게 시간 주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우리 같은 을에게 시간 주권을 보장했을 때에도 갑은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다.
시간 권력을 쥐고 흔드는 세상의 모든 ‘갑’에게 하고 싶은 부탁은 이 한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이 문장은 내 치트키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황정은 저, 『계속해보겠습니다』 ) 갑이 우리의 노동에 대해 다른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면 자주, 필사적으로, 아니 조금, 대충이라도 계속 떠드는 수밖에.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각자의 의지로 행복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 그편이 훨씬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도 여럿이다. 역사가 발전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이다. ‘10시 출근 불가’를 선언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다시 책의 소제목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하자. “바보야,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성과야.”(220쪽)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 저 | 창비
서로 갈등하는 소라와 나나의 속마음을 보는 것이나, 공유한 과거를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소설적 장치는 독자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황정은> 저12,15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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