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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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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치유자이다. 그들이 창조한 작품을 보고 감동 받은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진정한 자기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으니까. (2018. 07. 12)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가슴속에 품고 있는 꿈 중 하나는 ‘안경 디자이너’이다. 내 나름의 기준에서 멋진 디자인의 안경을 보면 미쳐버린다. 해외여행을 가면 꼭 사가지고 오는 것이 안경이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며칠 머물며 골목골목을 산책하다 우연히 발견한 안경점 쇼윈도에서 검정색 얇은 아세테이트로 미끈하게 둘러진 둥근테와 은색의 철제 브릿지로 구성된 인상적인 안경을 구매한 적이 있다. 아, 그런데 먼 이탈리아까지 날아가 사 온 그 안경의 다리에 찍힌 원산지는 Made in Japan. 일본 여행 중에 들린 안경점 점원이 해준 이야기였는데, 일본의 어느 시골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안경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산다고 했다. ‘나도 조기 은퇴하고 그곳에 살면서 안경 만드는 기술을 사사 받아볼까’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다가 그 지역에서 생산된 위아래로 조금 길게 늘어진 원형의 갈색 뿔테 안경을 발견한 뒤 ‘아, 르 코르뷔지에가 썼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잖아’라며 바로 카드를 긁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써보니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너무 튀어서 밖에서 쓰고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안경에 돋보기 알을 맞춰서 독서용으로 애용하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한갓진 저녁 날에 아내와 서래마을을 산책하다 들린 안경점에서 발견한 금색과 은색의 조화가 아름다웠던 안경테. 그 자리에서 비상금을 탈탈 털어 사고 봤더니, 프랑스제 안네발렌틴이었다. 서래마을에서 프랑스제 안경을 만난 것도 운명(?)이라 여기고 지금도 즐겨 쓰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니까, 내 안경의 역사는 30년이 훨씬 넘었다.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일 하시는 엄마 대신 이모 손에 이끌려 안경점에 갔다. 근시 판정을 받았을 때 나는 엉뚱하게도 신이 났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다 안경을 쓰니까, 나도 안경을 쓰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겠구나’ 철없는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안경을 끊임없이 사들이는 건, 어린 시절의 이런 환상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거다. 안경은 내 지적 욕구의 투영이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아는 나는 그리 이지적이지 못 하다는 열등감을 안경이라는 오브제로 보상 받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더 정확한 해석이냐, 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적인 이미지를 풍길 수 있는 안경을 쓴다고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그렇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안경을 쓰고 있으면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은 바로 이쪽이야’라고 체감하게 해주니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가슴속 깊이 품고 있는 이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준다. 내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구현한 물체를 몸에 지니고, 그것이 전달하는 물성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좋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우리가 바라는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디자인은 그것이 시각적으로 못나서가 아니라, 이상적인 나의 존재 감각과 충돌하기 때문일 테고.  

 

“작품의 정취는 관람자의 감정을 깊고 깨끗하게 해준다. 이러한 작품들은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마치 소리굽쇠로 악기의 현을 조율하듯 영혼의 음조를 맞추어준다.”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열화당) 이건 미술 작품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안경, 의자, 데스크램프, 펜, 머그잔, 커피포트, 향수병, 핸드백, 시계…… 그것이 무엇이든 아름답게 디자인된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감정을 깨끗하게 해주고 영혼의 음조를 다시 맞춰준다. 물론, 좋은 디자인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러니 디자이너는 치유자이다. 그들이 창조한 작품을 보고 감동 받은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진정한 자기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으니까. 어쩌면 정신과 의사보다 디자이너가 더 실용적인 치유자가 아닐까? 비싼 상담료를 내고도 정신과 의사는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 번 정도 교감하지만, 자아 이상이 구현된 디자인의 제품은 24시간 365일 곁에서 두고 보며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거짓 장식에서 구출해내는 것이 디자인의 목표라면, 디자인을 심리치료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거짓 자아를 진짜라 믿으며 그것을 쫓다가 지쳐버린 이들을 구출해내는 것이 심리치료의 목표니까. 사물에 숨겨진 고유한 아름다움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면, 심리치료도 디자인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심리치료니까. 그렇다면 나도 정신과 의사이자, 디자이너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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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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