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제’의 가장 큰 전제는 ‘평등’
압축성장과 분단으로 인한 징병제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건 배후에는 아주 독특한 ‘평등사상’이 깔려있다. ‘한국적 평등사상’의 근거는 두 가지다. ‘압축성장’과 ‘분단으로 인한 징병제’다. (2018.06.29)
징병된 '아마추어 병사'가 '프로 병사'보다 강한 이유
여수 돌산에 가면 ‘둔전마을’이 있다. 공식 지명은 ‘여수시 돌산읍 둔전리’다. 여수 돌산대교를 지나, 돌산의 남쪽 끝 향일암(向日庵)으로 가려면 해발 460미터의 봉황산을 돌아가야 한다. 봉황산을 향해 언덕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분지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는 논과 밭의 들판을 보게 된다. ‘둔전들판’이다. ‘둔전(屯田)’은 국가가 관리하는 농경지를 뜻한다. 주로 군대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이 없을 때 군인들을 동원해 농사를 짓게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신라시대부터 둔전의 기록이 존재한다. 중국이나 서양의 역사를 살펴봐도 병사들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한 둔전과 같은 제도는 아주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수 돌산의 둔전마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왜군은 주로 경상도로 쳐들어왔다. 경상도의 피난민들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전라도 지역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었다. 이순신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돌산에 살게 하며 군량을 경작하게 했다. 아울러 병사들도 전투가 없을 때는 피난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게 했다.
여수 돌산의 둔전마을(출처: 네이버 지도).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게 돌산의 빈 땅에 농사를 짓고 살게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병사들은 전투가 없을 때는 피난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나가야 하는 ‘아마추어 병사들’이 전투만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 병사들’을 이길 수는 없다. 병사들의 식량을 따로 마련할 수 없어 그들에게 직접 식량을 경작하게 하는 둔전을 운용하는 나라가 전쟁을 잘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국력이 강할수록 용병과 같은 프로 군사들을 운용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나 유럽의 기사가 그 경우다. 그러나 총이라는 개인 화기가 나오면서 아마추어 병사들은 달라졌다.
장전에서 발사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던 시대까지만 해도 총은 뛰어난 무사의 칼이나 활에 비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전과 발사까지의 동작을 표준화한 제식훈련이 개발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총을 가진 병사들의 훈련은 단계별로 모듈화 되었고, 병사들의 훈련은 아주 짧은 기간,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행해졌다. 평생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프로 병사들과 달리 아마추어 병사들의 양성은 비용 대비 효과가 놀라웠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훌륭했던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켰던 1877년의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 사무라이들의 참패로 끝났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정한론의 공식적인 이유는 새로 출범한 메이지 정부를 아주 대놓고 하대한 조선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부와의 전쟁을 일으켜 프로 싸움꾼들이었던 사무라이들의 역할을 찾아주려는 의도가 더 컸다.
당시 메이지 정부에서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즉 ‘징병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873년, 정한론이 좌절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향인 가고시마(鹿兒島)에 돌아가 사무라이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자치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다. 중앙정부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라진 바로 그 이듬해인 1874년, 국민개병제를 본격 시행했다. 국민개병제는 사무라이들의 목줄을 죄었다. 전문 칼잡이 무사들로 구성되었던 군대가 평민들의 군대로 재편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무사들은 강제로 제대시켰다. 당연히 무사들에게 지급되던 급여도 없어졌다. 사무라이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던 칼까지 뺏겼다. 군인과 경찰 이외에는 칼을 찰 수 없도록 한 ‘폐도령’이 시행된 것이다.
1860년대의 일본 사무라이. 1876년에 시행된 폐도령은 사무라이들로부터 칼을 빼앗았다. 군인, 경찰관 이외에는 칼을 휴대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불만에 가득 찬 사무라이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프로 쌈꾼’ 사무라이들은 징집된 평범한 병사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근대식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간단한 훈련으로도 충분했다. 장인적 수준의 칼잡이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식훈련으로 길러진 병사 집단은 ‘전투기계’였다. 싸우는 것과 관련해 사람이 기계를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불만에 가득 찬 사무라이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찾아왔다. 주저하던 다카모리는 결국 사무라이들을 규합해 자신이 세운 메이지 정부에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후 불과 3년 만의 일이었다. 개전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사무라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규군의 물량공세를 당할 수 없었다. 비록 징집되었지만 근대식 화기로 무장한 정부군의 화력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무라이 군대의 화력과는 비교될 수 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아무리 용맹하고 경험이 많은 사무라이라고 할지라도 경험이 미천한 신병이 집단적으로 발사하는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 세이난전쟁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자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 집단으로 추앙받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가 징집된 아마추어 병사들에게 괴멸된 것이다. 싸움 기술을 평생 익힌 ‘장인’ 싸움꾼들이라도 현대식 무기와 이를 활용하기 위한 ‘제식훈련’으로 길러진 병사들의 ‘집단’을 결코 이겨낼 수 없었다. 훈련된 병사들을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전투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리 오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소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들은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와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소총과 같은 근대무기가 징병제와 효과적으로 결합된 최초의 군대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즉 ‘국민국가’가 되었다. 봉건영주에게 충성하며 세금을 바치던 사람들은 이제 ‘국가’의 주인이 된 것이다. 국가는 국민들의 것이기에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국민국가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징병제는 제대로 기능한다. 아울러 동일한 연령대의 모든 국민은 일정 기간 자신의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보편적 징병의무, 즉 ‘평등사상’이 있어야 ‘프랑스 국민’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성립할 수 있다. 징병제는 국민 모두가 동일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제대로 기능한다는 이야기다. 징병제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폴레옹 군대. 징병제로 동원된 나폴레옹의 군대는 특별한 무기로 무장했다. ‘애국심’이다. 목숨을 담보로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무장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을 휩쓸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이라는 애국심은 ‘프랑스 역사’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국민교육’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제 아무리 잘 훈련된 프로이센의 직업군인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애국심에 불타는 프랑스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애국심으로 무장한 나폴레옹의 군대에 짓밟힌 독일은 수십 년 후 비스마르크의 절묘한 외교정책과 몰트케의 참모제도를 통해 독일 통일을 이룩하며 자존심을 회복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평등사상’은 왜 이렇게 특별한가?
일본의 경우는 프랑스와 많이 달랐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 근대국가로서의 애국심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 세이난전쟁에서 본격적인 애국심을 논할 수는 없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흉내는 내게 되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천황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1890년 메이지 헌법이 선포되고 ‘대일본제국 신민(臣民)’이라는 개념이 새로 생겨났지만, 신민은 국가의 국민이라기보다는 여전히 황제의 신하에 가까운 봉건적 개념이었다. 세이난전쟁은 ‘봉건 사무라이들’과 ‘천황의 군대’ 사이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에서 실시한 국민개병제는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프랑스의 국민개병제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하지만 청나라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에는 ‘국민’이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인들 내부에서는 서서히 ‘국민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어느 번(藩)’에 속한 사람인가가 중요했지만, 청나라보다 강대해진 ‘대일본제국의 국민’이라는 자의식이 일본인들 사이에 생겨난 것이다. 특히 전리품으로 가져왔던 랴오둥 반도를 반환해야 했던 ‘삼국간섭’은 일본인들의 국민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청나라를 대신해 서양 세력에 맞서는 새로운 ‘아시아의 맹주’라는 의식과 더불어, 삼국간섭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사자성어가 일본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섶에 누워 쓸개를 씹으며 치욕을 기억하자’는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애국심은 특히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났고,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국민개병제와 세이난전쟁, 청일전쟁, 삼국간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형성된 국민의식은 청일전쟁 이후의 본격적인 ‘보통선거 운동’으로 이어졌다. 1889년 2월 메이지헌법이 제정되고 1890년에 일본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 즉 제국의회 선거가 있었지만 이 때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만 25세 이상의 ‘남자’와 ‘15엔 이상을 납부한 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조건을 충족한 사람은 45만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 인구의 1.1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러나 삼국간섭 이후, 참정권 확대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불같이 일어났다.
‘참고 견뎌서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사자성어가 일본에서 아주 익숙한 일상어가 된 것은 청일전쟁 이후의 ‘삼국간섭’ 때문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기껏 뺏어온 랴오둥 반도를 서양 열강들에 의해 반납하게 되자 일본인들 사이에는 이 치욕을 참고 견뎌서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중국 고사에서 와신상담이란 단어를 찾아온 것이다. 그 복수의 대상은 러시아였다. 일본인들 사이에 천황의 ‘신민’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의식이 생긴 것은 바로 이 ‘와신상담의 시기’였다.
국민개병제로 인해 청일전쟁에 참전한 이들 가운데 약 17,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징병되어 죽거나 다칠 수도 있는데, 선거권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삼국간섭이 일어난 것은 일본의 외교가 약했기 때문이고, 일본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보통선거에 관한 국민적 의식을 고취시켰다. 의회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해서 삼국간섭과 같은 치욕은 다시 겪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민권혁명으로 ‘국민국가’가 세워진 후 국민이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에서 국민개병제가 시작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 대륙을 휩쓸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후에 스스로 황제가 되어 프랑스 국민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하지만, 초기의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구현할 영웅으로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크게 추앙받았다. 일본의 경우는 정반대의 과정을 겪었다. 천황의 국가에서 국민개병제가 실시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비로소 국민국가라는 의식이 생겨나고, 보통선거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국어(國語)’라는 개념도 탄생한다. 그전까지는 그저 ‘일본어’라고 했다. 그러나 1897년 ‘광일본문전(?日本文典)’에서 각국의 언어를 ‘그 나라의 국어’라고 설명하며 ‘국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겨난다. 청일전쟁을 통해 ‘국민’이 만들어지고, 이어 국민의 언어인 ‘국어’가 생겨난 것이다(하라다 게이이치 저, 최석완 역, 『청일, 러일 전쟁』, 어문학사, 2013년, 154쪽). 1900년이 되자 소학교령 시행 규칙을 제정하여 국어 과목이 공식 설치된다. 현대 일본어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와의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국사(國史)’에 대한 논의도 이때부터 본격 시작된다.
한 국가에서 ‘징병제’가 가지는 의미는 이렇게 크다. 오늘날 분단 상황에서 모든 청년이 군대에 가야 하는 대한민국 군대가 가지는 의미는 메이지시대 일본의 국민개병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격변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바로 이 분단 상황의 징병제와, 여기서 비롯된 대한민국 특유의 ‘평등의식’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육군훈련소 훈련병(출처: 육군훈련소 홈페이지). 대한민국의 이 유별난 ‘평등사상’은 분단 상황의 징병제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거의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아주 독특한 평등사상이 깔려 있다. ‘한국적 평등사상’의 근거는 두 가지다. ‘압축성장’과 ‘분단으로 인한 징병제’다. 서양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룬 근대화의 과정을 대한민국은 불과 수십 년 만에 해치웠다. 이처럼 역사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압축성장은, ‘성공’은 느닷없이 우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갖게 했다. 내 이웃의 성공은 ‘능력’이 아니라, 느닷없는 ‘땅값 상승’과 같은 ‘우연의 결과’ 혹은 ‘권력자와의 뒷거래’ 같은 ‘비리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실제 그렇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성공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그 어떤 능력이 있어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한국적 평등사상의 또 다른 이유는 ‘징병제’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누구나 행해야 하는 의무다. 이 같은 의무는 국민적 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평등’에 대한 동의가 없다면 징병제는 성립할 수 없다. 징병제의 사상적 기초는 평등이란 뜻이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의 공포를 감당해야 하는 징병제는 ‘사회가 평등하다’는 전제가 흔들리면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제도다. 군대는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들을 군대 보내야 하는 모든 엄마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들 그렇게 군대 문제에 예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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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