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조건
아픔에도 자격이 있나요
납득할 만한 조건이 모여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병의 경중은 문제이면서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사정이 위중했다. (2018. 04. 27)
두고두고 후회하는 말들이 있다. 이를 테면, ‘~하지?’로 끝나는 질문들. ‘괜찮아?’가 아닌 ‘괜찮지?’ ‘무슨 일 있어?’가 아닌 ‘별일 없지?’ 아닌 가능성을 지우는 질문들. 불편함을 모른 척 하려는, 너무 강한 의지들. 최근에 내가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안부를 묻다 약을 복용한다는 소식에 “큰 병은 아니지?”라고 물어버렸다.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부끄러웠다. 집에 오는 길 내내 목 언저리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괜히 헛기침을 하고, ‘아! 바보!’ 같은 혼잣말을 내뱉고, 머리를 감다 말고 마구 고개를 저었다. 자기 전 자세를 몇 번이나 바꿨는지 모른다.
언스플래쉬
질문에 대한 친구의 답이 나를 오래 찔렀다. “큰 병이라면 큰 병이고, 작은 병이라면 작은 병이지. 계속 신경 써야 하니까.” 결국 나는 첫 질문을 수습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어영부영 도망치듯 화제를 돌렸다. 며칠 간 생각했다. 큰 병은 무엇이고 작은 병은 무엇일까? 종합병원은 대부분 암과 뇌신경과를 별도의 병동으로 분리한다. 그 기준에 따르면 암과 뇌신경질환은 큰 병일 테다. 감기는 손톱에 낀 때 같은 아주 작은 병이겠지. 그러나 정작 병원에 머무르니 이런 구분은 무력했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 종합병원에 입원하셨다. 경미한 뇌출혈이었다. ‘경미한’ 뇌출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은, 뇌출혈 중에서도 비교적 위험성이 적은 경막외 출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을 오가는 한 주는 지옥 같았다. 호전되어가는 아버지 상태와는 별개로, 병원비와 복잡한 가정사에 골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하고 다닐 수는 없어, (보다 정확하게는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처럼 출근해 거래처를 응대하고, 가면이 벗겨지려는 나를 타이르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두 번 환승해서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종합병원에 자주 그리고 오래 머무르며 많은 장면을 마주쳤다. 그때마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그려졌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장소에서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나,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조차도 그랬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보호자, 익숙하게 담요를 개는 전문 간병인, 떼 쓰는 어르신을 능숙하게 다루는 간호사, 수술실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서 잠든 어린이, 경과를 설명하는 레지던트의 길게 자란 수염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인공이 50명인 소설 『피프티 피플』 의 배경이 종합병원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종합병원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의사와 환자, 환자의 가족, 가족의 친구, 간호사 등등이 가졌을 나름의 이야기가 치고 들어오니까. 와중에 아버지 수술은 거듭 밀렸다. 위급한 환자는 계속 생겼고, 수술실은 부족했으며, 당연히도 주말엔 의사도 쉬어야 했다. 납득할 만한 조건이 모여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병의 경중은 문제이면서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사정이 위중했다.
언스플래쉬
‘모든 사정이 위중하다’는 말을 말하고 나서야 나를 이해했다. 올해 초, 언제나처럼 출근하려고 일어났는데 어지러워 병원에 갔다가 전정신경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주요 증상은 극심한 두통과 어지럼증. 원인은 균형 감각을 담당하는 전정 기관의 이상. 멀쩡하게 걷기 어려우니 바깥에만 있어도 두려워졌다. 코에서, 귀에서, 머리에서 심장이 뛰었다. 좀처럼 낫지 않아 몇 번 내원하고서야 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 심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냐고.
알고 보니 귀는 스트레스에 큰 영향을 받는단다. 혼란스러웠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난 스스로 힘들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힘들다는 취업도 바로 했고, 친구들과 대화해보면 근무 환경도 좋은 편이었다. 그 정도로 아플 일이야? 나 자신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히던 가시적인 문제가 사라졌는데 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그러나 모든 ‘왜’를 떠나 나는 아프고 힘들었다. 나를 몰아붙인 질문들은 아무 소용 없었다. (지금에야 생각하니) 당연했다. 상태는 바깥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라도 사정만큼은 판단할 수 없다. 나는 나만의 기준과 사정이 있으니까. 비로소 ‘그래도 너는 취업을 했잖니.’, ‘그래도 너는 밥 세끼 먹고 살잖니.’ 같은 말을 거부하면서, 언제부턴가 거기에 길들여진 자신이 보였다. 자격 따지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도.
‘큰 병은 아니지?’라는 질문은, 스스로를 검열해온 습관이 무심코 튀어나온 모습일 테다. 스스로 ‘괜찮지? 너 괜찮잖아.’ 말해온 습관이 타인에게 향해버린 게으름. 다시, 뻔하지 않은 질문을 고민한다. ‘많이 아파?’ 이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일상 생활하는 데 불편한 건 없어?’ 이건 뭐 내가 의사도 아니고. 여러 모로 고민하다 찾은 답은 결국 이거다. ‘그랬구나. 몰랐어. 내가 너무 연락을 안 했나 봐.’ 어설픈 아는 척은 그만하고, 늦게나마 첫 질문을 바로 잡기 위해 먼저 연락한다. ‘잘 지내지?’가 아닌 ‘잘 지내?’라고.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