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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산문이 섞이면 왜 시집이 아닌가요?”

『조각의 유통기한』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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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하는 동안 시인 선배들에게 책 이야기를 했어요. 대부분 반응은 이랬죠. ‘그래도 첫 시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저는 오히려 반문했어요. 산문이 섞이면 왜 시집이 아니냐고요. 제가 이 구성을 택한 이유가 있어요. (2018. 0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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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는 시인 이지혜. 2012년 계간지 『애지』를 통해 등단했고 산문집 『그런 사람』 , 『그곳과 사귀다』 를  냈다. 독특한 필명 ‘이제야’는 그녀가 좋아하는 단어다. ‘말하고 있는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라는 사전적 뜻이 시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기억 속 어딘가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것들은 말言로, 그중에서도 특히 시詩로 표현되면서 그제야 오롯이 ‘내 것’이 되는 것처럼. 그가 말하는 시란, 나를 잘 들여다보기 위해 나만의 언어로 써내려가는 가장 솔직한 기록이다.

 

이지혜가 고백하길 시라는 건, 시를 쓰게 하는 순간이 있어야만 탄생한다고 한다. 시인 자신의 등단이 딱 그러했다. 우연히 알게 된 문인들 여럿과 통영을 다녀온 뒤 뜻밖에 떠오른 시상으로 적어나간 시들이 시 전문 계간지에 당선되면서 등단에 이르게 된 것. 등단 후 시를 써오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란 가만히 앉아 있다고, 시를 한 편 써볼까 한다고 써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지혜는 시를 쓰며 수첩에 그 시의 배경이 된 결정적 순간들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데, 그 습관의 소산이 바로 이 책이다. 『조각의 유통기한』 은 40편의 시와 그 시를 있게 한 문장들의 기록이다.


2012년 등단 후 ‘이제야’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셨는데 이번에는 본명으로 책을 출간하셨는데 그에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번 책은 시를 쓰게 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로 탄생한 시를 묶은 형식입니다. 아니다, 시와 그 시가 기억하게 한 순간을 묶은 형식이기도 해요. 시가 먼저 쓰이기도 했고 산문이 먼저이기도 했죠. 여기에 그 이유가 있어요. 어느 날은 나를 ‘시를 쓰는 이제야’라고 했을 때, 내가 시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건 아닌지 생각했어요. 편히 문장을 열어두어도 되는데, 시라는 상자에 이야기를 가두는 건 아닌지 말이죠. 시를 사랑하지만, 마음이 시에 맞춰지고 강박을 갖게 되는 게 가끔 슬프더라고요. 그래서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제가 이지혜일 때, 시가 되고 산문이 되어보자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시가 되면 ‘이제야’이고 그냥 산문으로 기록되면 ‘이지혜’로요. 시인이라는 생각에 너무 제한을 두지 말자는 생각에서죠.

 

『조각의 유통기한』 은 40편의 시와 그 시가 있게 한 산문의 이야기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시인으로써 시만 쓰신 게 아니라 산문을 같이 엮어 내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작업하는 동안 시인 선배들에게 책 이야기를 했어요. 대부분 반응은 이랬죠. ‘그래도 첫 시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저는 오히려 반문했어요. 산문이 섞이면 왜 시집이 아니냐고요. 제가 이 구성을 택한 이유가 있어요. 시를 읽어보고 싶거나 관심이 있지만 ‘시집’이라는 단어 자체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잖아요. 시를 전혀 읽지 않다가도 젊은 시인 시집에 관심을 갖고 몇 장 읽다가 어려워 덮는 경우도 많고요. 저만 해도 중학생 때 시를 좋아하게 된 건 시집을 읽으면서가 아니었어요. 심야 라디오 DJ가 읽어주는 시 한 편에 위로 받고 그 시를 찾아 읽고, 시인의 다른 시를 읽고, 그 시인이 추천하는 시를 읽고… 그처럼 시를 읽고 싶지만 시집은 부담스러운 사람, 조금 해설이 필요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분들만이라도 시를 좀더 가까이 하는 다리 역할을 해주고 싶었고요. 제 시뿐 아니라 시라는 장르에 대한 벽을 깨고 산문과 함께 부드럽게 읽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요즘에 일상을 기록하여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요, 혹시 그런 사람들에게 일상의 기록을 조금 더 쉽고 의미 있게 남기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기록하는 도구가 많아진 건 정말 큰 행운 같아요. SNS를 보다보면, 사진, 글, 해시태그 등등 이미 쉽고 의미 있는 기록법들이 많더라고요. '혼잣말 댓글법'이라는 살짝 다른 방법을 제안해봅니다. 수첩에 짧은 글을 한두 문장 적어두고 그 밑에 쭉 댓글들을 달아보는 겁니다. 짧은 글이 어떤 상황이나 심경이 될 테고, 혼잣말하듯 그 아래 오늘, 내일, 다음주, 다음달, 내년 언제든 생각날 때마다 댓글을 달아요. SNS 댓글들이 쭉 달리듯이요. 어떤 글은 댓글이 한두 개로 끝날 수도 있고 어떤 글은 이삼십 개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감정이나 태도 변화를 댓글로 쭉 확인할 수 있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완결체가 될 거에요. 가령 '그 사람이 떠났다'라는 문장 아래 댓글들을 모아보면, 내가 이 사람을 잊고 생각하고를 얼마나 반복하며 이별을 받아들였는지 안다는 거죠. 사람은 그 당시 바짝 느낀 감정으로 사건을 기억하기 쉬운데, 사실 시간에 따라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마음과 태도가 변하거든요. 결국 그 변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기억 조각이 되는 거라 생각해요. 이 방법의 유의점은, 나 왜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하지, 놀랄 수 있다는 거? 누구나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하

 

마음속 전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앞으로 작가님은 그곳을 어떤 기억으로 채워나가고 싶으신가요?

 

책에 있는 전시장에 대한 시를 쓰게 된 날이 기억나네요. 흑백사진전을 보러 갔는데 제 옆에서 사진을 구경하던 분이 어느 사진 앞에 서서 펑펑 울더라고요. 다른 사진들은 그냥 지나가다 유독 그 사진 앞에서요. 자신의 어떤 경험과 기억과 맞물리면서 그 사진에 흠뻑 빠져서 그랬겠죠. 제 전시장은 음… 그날 봤던 사람처럼 흠뻑 우는 작품 하나, 흠뻑 웃는 작품 하나, 흠뻑 긴장되는 작품 하나 등등… 흠뻑 적시는 감정들 하나씩은 있는 기억들로 채우고 싶어요. 어릴 때는 잔잔하고 큰 변화 없는 하루를 바랐던 것 같은데 점점 강렬함이 필요해져요. 그런 강렬한 기억들이 잔잔한 기억들을 껴안는 큰 가지가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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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시라는 건 가만히 앉아 시를 써볼까 한다고 써지는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작가님께 '시를 쓰게 하는 순간'이란 건 보통 언제 어떻게 탄생하나요?

 

시뿐 아니라 대부분의 글이 그럴 거예요. 종이 놓고 펜 들고 마음 가다듬는다고 되는 게 아니죠. 저는 어떤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를 쓸 때가 많아요. 모르는 사람을 쭉 바라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내가 보고 있단 걸 모를 정도로만. 누군가의 눈빛이나 손짓을 보다 어떤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발걸음이나 목소리에서 새로운 기억이 생기기도 해요. 저마다 사람 안에 시간이 있고 냄새가 있고 특별함이 있으니까요. 제 시 ‘가장 실재하는 정류장’은 부암동 가는 버스를 탔다가 건너편 자리에서 새로 산 신발을 신어보는 여자를 빤히 보다 썼거든요. 여자를 보며 제 경험이 생각난 거죠. 그분은 단지 새 신발을 신나게 신어본 것뿐인데 말이죠. 하하. 사람이라는 건, 의도하지 않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에 저에게 귀한 글감이에요.

 

40편의 시와 산문 이야기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시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의 산문과 그 이유를 알려주세요.

 

'달을 그린 연필'이라는 시입니다. 한낮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하늘을 봤는데 달이 희미하게 흔적만 보이는 거예요. 달의 그림자 같았어요. 그때 생각이 머리를 탁, 스쳐갔어요. 어두워지면 저 달이 하게 보일 텐데 지금은 나 여기 있다고 본인의 자리만 말해주는구나. 그 달이 우리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이라 하는 게 맞겠네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잊은 것 같지만 어느 시점 갑자기 선명해지고 뜨거워져 놀라는 것, 그게 기억이잖아요. 잊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닌 것. 머리 위에서 하루를 밝히고 어둑하게 하는. 제게 그래서 기억이 귀한 것 같아요. 없어졌다고 믿지 말고 늘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지내자고. 이 시는 제가 기억을 대하는, 그리고 글을 대하는 평생의 태도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과 가장 좋아하는 시 그리고 추천하고 싶은 시집을 알려주세요.

 

허수경 선생님의 『혼자 가는 먼 집』 을 아껴 읽습니다. 허수경 선생님의 시는 제가 무언가를 경험하든 경험하지 않았든 저를 그 안에 살게 해요. 이별하든 하지 않았든, 죽음을 보았든 보지 않았든, 사랑을 하든 하지 않았든 말이죠. 『혼자 가는 먼 집』 시집에는 때때로 되뇌는 시들이 참 많지만 이 계절 함께 읽고 싶은 시, 「不醉不歸(불취불귀)」입니다. 제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경험을 한, 혹은 하지 않은 어떤 시간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조각의 유통기한이지혜 저 | 이봄
산문 다음에 그와 짝을 이루는 시가 등장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산문은 시의 배경이 되는 순간 또는 시가 탄생하는 일상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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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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