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구애
보편적인 허기보다, 나를 채워줄 음식을 요리하는 것
나를 위한 저녁 식탁은 하루를 무사히 마친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내게는 하루 중 가장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이다. (2018. 03. 23)
어제 저녁은 10분만에 차려먹었다. 샐러드는 조리 시간이 짧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보기 좋은 색감과 접시로 식탁을 꾸린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저녁을 고이 쓰고 싶어서.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의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제의 메뉴는 아보카도 닭 가슴살 샐러드였다. 적당히 숙성된 아보카도를 가지런히 샐러드 한 중간에 놓고, 선물 받은 초록색 잎 모양의 접시 위에 야채를 놓은 뒤, 닭 가슴살을 손으로 찢어 놓는다. 드레싱은 가장 좋아하는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 후추면 충분하다. 며칠 전엔 강된장과 봄나물을 곁들여 먹었다. 어떤 봄나물을 사느냐에 따라 내 입에 들어오는 향이 달라질 것을 상상하니, 장 보는 내내 향긋했다. 저녁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봄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혼자 산 지 8년 차인 나는, 사 먹는 음식보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이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것을 비로소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하루를 무사히 마친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로. 좋아하는 음악이나,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틀어 놓고 요리를 하는 순간이 내게는 하루 중 가장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이다.
누구에게도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해 차리는 식탁. 되도록 건강한 음식으로 차리려는 데에는 바로 ‘나를 위해’ 차리는 저녁이라는 인식이 내게 강해서이다. 출근 하기만도 벅찬 아침 시간부터 퇴근 직전까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나를 생각할 시간 없이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어떤 업무의 담당자로 살다 보니 내 하루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시간은 너무도 적었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나로 살아가는 시간을 챙기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요리였다.
자신의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 저는 이런 것들이 소수만을 위한 특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혜택은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시간이 많은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또 반드시 누려야 한다고 믿고 있어요. (중략) 집을 가꾼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돌본다는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방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어느 구석, 어느 모퉁이 하나도 대충 두지 않고 정성을 들여 돌보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삶을 대하는 방식이자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최고요,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 40쪽
혼자 살면 인스턴트나 레토르트 음식을 먹게 된다는 것은 내게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으로 꾸민 지금 집과 달리, 생존에 급급했던 예전 집들에 살던 나는 혼자 살면 누구나 그렇듯이, 편의점 음식과 포장 가능한 음식들로 끼니를 때웠다. ‘밥을 먹었다’가 아닌 ‘끼니를 때웠다’고 표현 하는 것은, 먹어도 배가 고픈 음식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꽃 파스타’. 이번 봄에는 꼭 싱싱한 식용 꽃으로 파스타를 해 볼 테다.
얼마 전 보았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고향에 돌아온 혜원은 ‘너무 배가 고파서 내려왔어’라고 대답한다. 무언갈 먹어도 계속해서 배가 고픈 끼니, 나를 위한 음식이 아닌 ‘보편적인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널려 있는 음식들. 배 부른 소리 한다 싶어도, 정말이지 배는 부른데 배가 고픈 아이러니한 식사들이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식탁이 그리도 그리웠고, 할머니의 제철 음식들이 내겐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비단 나의 허기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여유 없이 살아가는 모두에게, 바깥의 음식들은 ‘보편적인 허기’를 위한 음식일 때가 많을 테다.
영화에서 혜원이 만드는 음식들은 모두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와의 소중한 추억이자, 어린 혜원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기억들이다. 엄마와의 시간이 깃든 주방에서 비록 혼자일지라도, 각종 음식들을 뚝딱 해내는 혜원은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도시란 그런 곳이었다. 할 줄 아는 음식들이 많아도, 쉬이 음식을 할 수 없던 여유 없는 곳. 그러니 무얼 먹어도 배가 고플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의 허기를 온전히 채워줄 수 없는 곳.
좋아하는 것을 나열하다 보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서로 맞닿아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많은 것이 개연성 없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어 당황스럽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커다란 덩어리를 이룬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일상생활을 디자인하는 일에 재미와 깊이가 생깁니다.
- 같은 책, 80쪽
음식을 만들다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 양배추를 먹어도 볶아 먹는 게 좋은지 생식으로 먹는 게 좋은지를 고민하게 되고, 고기를 먹어도 어떤 날은 소고기, 어떤 날은 닭고기를 먹고 싶은지 알 수 있게 된다. 나를 위해 고민하는 시간들이 합쳐지면, 나라는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더라는 것은 나의 경험담이다. 왜인지 혼자 살면서부터 나의 자존감은 날로 떨어져갔고, 우울한 날이 많아졌다. (아직도 깊은 수면은 어렵지만) 제대로 잠을 못 자는 밤들이 많아졌고, 외로움도 덩달아 커졌다. 어느 날 나를 위한 생일상을 차려보자고 마음 먹었고, 할머니의 미역국을 떠올리며 할머니가 주신 국간장으로 미역국을 끓이다 보니 행복이 샘솟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고민을 요리를 통해 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방영 중인 <효리네 민박2>를 보니, 부부 두 사람이 민박객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오로지 ‘잘 먹이고 잘 재우기’라고 했다. 직접 만든 정갈한 음식들로 잘 먹이고 잘 재우는 것. 아주 단순하고 누구나 하고 싶지만, 일에 치이는 우리들은 할 수 없던 일들이다. 이 두 가지는 두 사람이 제주도에서 찾은 자신 그대로 살아가는 방법일 테다. 그들처럼 행복해지는 법을 우리는 잘 알고는 있다.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집에서 잘 먹고 잘 쉬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내 행복해지기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 행복해질 시간은 오로지 여행을 가는 순간일 뿐일 거라고, 현실의 공간에서의 나는 부정되고 만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장을 보면서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해보길 바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무얼 먹고 싶은지, 내 건강은 지금 어떠한지. 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들고 냉장고를 채워 넣으면 오늘 하루도 제법 수고한 나였다고, 조금은 힘이 날 지도 모르니까. 단순히 장 보는 행동만으로도, 내 공간을 나의 자존감이 샘 솟을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채울 내 시간이 멈추지 않기를, 오늘 식탁에서도 다짐할 테다.
저는 흔한 장식품보다 이야기가 있는 무언가로 집을 꾸미는 걸 좋아합니다. 엄마가 그려준 그림, 친구들이 준 편지, 여행지에서 가져온 나뭇가지가 저에게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비싼 소품보다 더 의미 있고 값어치가 있습니다. (중략)
내게 소중한 물건, 내가 좋아하고 예뻐하는 물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면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번씩 웃게 됩니다. 좋아하는 물건들로 공간을 꾸미는 것. 그게 진정한 인테리어라고 생각해요.
- 같은 책, 226쪽
가끔 쓰고 가끔 읽는 게으름을 꿈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