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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일한 취미

돌이켜보면 만화를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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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를 올려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저 같은 프리랜서들에게 고정 수입은 자욱한 미세먼지 속 봄비 같거든요. 물론 원고료가 오르면 그만큼 숨통이 더 트이겠지만,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체제 순응자라서요. (2018.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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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무렵이었다.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손수 제작한 소책자 형태의 만화책을 팔고 있었는데, 친구 녀석이 페북에 책 광고를 권유했다. 그 당시 나는 페북을 미국판 싸이월드쯤으로 생각했고, 페북을 하려면 도토리와 스마트폰이 필요한 줄 알았다. 친구 녀석은 그런 나를 돌도끼로 밭매는 원시인처럼 대했다.

 

“(한숨을 내쉬며) 형, 페북은 이메일만 있으면 가입할 수 있어요.”


“아, 그래? 스마트폰 없어도 할 수 있는 거야?”


(참고로 나는 아직 스마트폰이 없다.)


“그럼요. 참, 지난 번 책 다 파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다 안 팔렸어. 아직 꽤 남았고, 몇 달 걸렸지.”


“그럼 페북에서는 한 달도 안 걸릴 걸요?”

 

솔깃했다. 당시 판로는 블로그와 홍대 카페 「한잔의 룰루랄라」밖에 없었고, 집에 남아 있던 책은 하릴없이 먼지만 쌓여 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팔아치우고 싶었다. 그런데 페북에 책 광고를 시작하자마자 친구 녀석 말대로 재고 100부를 한 달만에 모두 팔아치웠다. 이듬해에는 다른 책 두 권을 같은 방식으로 제작해 팔았고, 그 판매 속도라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그때 팔던 책이 단편만화모음집 『예쁜 여자』 에 수록된 단편 「국화차와 소주」와 「예쁜 여자」, 그리고 송아람 씨의 『두 여자 이야기』 에 수록된 중편 「대구의 밤」이었다. (딱히 책 광고는 아닌데, 무슨 책을 팔았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하지만 책이 잘 팔린 만큼 영업은 생각보다 고됐다. 주문을 받고, 주문을 확인하고, 책 배송 받을 주소가 지번 주소면 혹시 배송사고라도 날까봐 도로명 주소로 바꿔 쓰고, 우편번호도 빼먹지 않았다.(참고로 나는 체제순응자다.) 책을 포장하면 책을 부치러 동네 우체국을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다시 말해 책을 주문받고, 포장하고, 부치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됐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복잡한(?) 과정의 업무를 한꺼번에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요령이 부족했고, 아무래도 영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내 영업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증쇄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책 광고를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페북에 일상을 틈틈이 쓰기 시작했다. 애가 성큼성큼 자라나는 순간들은 물론, 마누라와 부부싸움 뒤 가출했던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숨기지 않았다. 아니, 적당히 숨기긴 했으나 하고 싶은 얘기는 최대한 있는 그대도 썼다. 이왕이면 책을 재밌게 팔아 보려고 시작했던 페북이 내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장이 된 셈이다. 심지어 내 일기장을 눈여겨보던 한 편집자가 (돌았는지) 대뜸 출간 제의를 했고, 덕분에 재작년 여름에는 『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라는 산문집도 출간했다.(딱히 책 광고는 아닌데, 무슨 책을 출간했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운이 좋았다. 보잘것없는 일기로 산문집까지 출간할 줄 몰랐고, 산문집 출간 이후에는 글 원고 청탁도 제법 있었다. 작년부터는 만화가 아닌 글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부업이던 글쓰기가 점점 본업이 됐다. 안정된 고정수입이 생겼다는 얘기고, <채널예스> 관계자들은 이 점을 꼭 유념해주시면 고맙겠다. 원고료를 올려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저 같은 프리랜서들에게 고정 수입은 자욱한 미세먼지 속 봄비 같거든요. 물론 원고료가 오르면 그만큼 숨통이 더 트이겠지만,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체제 순응자라서요.

 

사실 만화를 그리는 일은 수지 타산이 도무지 맞지 않았다. 만화 원고료가 글 원고료보다 많은 편이지만, 한메타자로 치면 만화를 최소 평균 500타의 속도로 그리지 않는 한 생계 유지도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사람을 쓰면 인건비가 더 많이 든다. 노동착취를 하지 않으려면 일을 벌려 수입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깜냥도 안 되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믿지 못했다. 일을 벌려 사람을 썼으면 틀림없이 노동착취를 했을 거란 얘기다. 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이었다. 그러던 중 페북에 올리던 글이 책이 되고, 일이 되고, 밥이 되고, 술이 되고, 미래가 됐다.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것만 같다. 얼떨결에 기차에 올라탔지만, 그 기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아름다운 문장의 기준은 무엇인지, 무엇을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통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만화를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다. 모르는 것투성이였음에도 닥치는 대로 그렸다. 너무 애써서 그리지 말자는 원칙 정도는 있었지만, 그 원칙을 지킨 적은 거의 없다. 그 간단한 원칙을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글을 쓸 때도 나름 지키고 싶은 두 가지 원칙이 있다.

 

- 쉽게 쓰자
- 하고 싶은 얘기는 숨기지 말자

 

만화를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이 간단한 두 가지 원칙을 지키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특히 이번 글이 어렵다. 고백하자면 이번 글은 다음 달 「월간 채널예스」에 실릴 예정이고, 주제가 마침 ‘글쓰기’다. 말하자면 나는 ‘만화가의 글쓰기’에 관해 뭐라도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쥐어짜내는 중이다. 돌도끼로 밭매는 원시인처럼 말이다.

 

죄송하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글쓰기에 관해서 혹은 인생에 관해서, 이 글을 용케 여기까지 읽은 당신보다 아는 게 없다. 내가 아는 건 어쩌다 보니 글쓰기는 내 유일한 취미가 됐고, 지금은 황송한 고정수입이 되셨다. 황송한 고정수입이 없더라도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것 같고, 어쩌면 나는 이미 환자일지도 모르겠다. 먹고살기 위해 무언가를 쓰다 질릴 때조차 다른 무언가를 쓰고 있으니까. 그렇게 뭐라도 쓰고 나면 홀가분하고, 내세울 만한 취미는 그것밖에 없지만 나쁘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우울도 견디고, 넘치는 기쁨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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