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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랑과 투쟁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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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가 죽은 후 일제에 복수라도 하듯이 묵묵히 옥중의 삶을 이어나갔다. 장장 22년 2개월에 걸친 징역살이를 거쳐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야 그는 석방되었다. (2018.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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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2017년 작)은 <동주>에 이은 이준익 감독의 두 번째 전기 영화다. 영화 서두에서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었다고 밝히듯, 이 영화는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가 당시 일본 정부를 ‘엿 먹인’ 사건을 거의 왜곡 없이 보여준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대개의 사람들에게 박열은 생소한 이름이고,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1920년대 당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는 통쾌함을, 일본 정부에는 당혹감을 안겨준 인물이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표방한 독립운동의 근거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있었고 이후 박열의 마지막 행보가 납북으로 끝나 남한에서 그의 이름이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외면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네코 후미코’란 생경한 일본 이름이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실도 한몫하였다. 박열은 1990년대 이후에나 그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독특하고 강인했던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이름도 그제야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화 <박열>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호명하여, 유쾌하지만 비장하고 가벼운 듯하나 치열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1 운동의 영향을 받다

 

영화 <박열>의 배경은 일본 도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박열(이제훈 분)은 끈질기고 근성 있는 인력거꾼으로 등장하는데, 도입부의 시간적 배경인 1922년은 박열이 도쿄로 간 지 2년여 정도 되었을 때다.


박열의 집안은 경상도 문경에서 대대로 글을 읽는 선비 가문이었으나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제의 자본가들이 문경을 광산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몰락하였다.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저임금, 인권 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고, 이 때문에 박열의 집안을 비롯한 이 지역 사람들의 반일정서가 상당히 강했다.


박열은 16세 무렵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는데 이는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으로 각지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학교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는 대한제국기인 1900년에 관립학교로 처음 설립되었을 때부터 우수한 인재를 관료로 배출하는 학교로 여겨졌고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뛰어난 학업 성적을 거두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


박열은 이곳에서 1919년 3.1 운동을 목격하고 적극 참여한다. 민족적 거사였던 3.1 운동에 크게 공명한 박열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친구들과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3.1 운동의 열기가 잦아들면서 박열은 1919년 10월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고학생활을 시작한 박열은 영화에서처럼 인력거꾼부터 날품팔이, 인삼 행상 등등 고된 노동을 하면서 영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쿄에서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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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열(출처: 국가보훈처)

 

 

한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도 박열이 고향에서 3.1 운동을 이어가던 시기에 조선에 있었다. 박열과는 다소 다른 입장이었지만 가네코 후미코 또한 3.1 운동에 무한히 감격하고 조선 사람들의 마음에 감응하였다.
박열보다 한 살 어린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핍박당한 일본의 빈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텅스텐 광산 광부로 그 지역의 처녀였던 그녀의 어머니와 눈이 맞아 도망친 뒤 가네코 후미코를 낳았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출생 신고도 없이 부모로부터 버려졌다. 그녀의 부모는 살기 위해 각자의 인생을 찾아다니는 도시 빈민이었고 일찌감치 헤어져 둘 사이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를 서로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가네코 후미코는 여러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자랐는데 9세 무렵 고모의 집에 맡겨져 조선으로 들어온다.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의 숫자는 꽤 많았는데 가네코 후미코의 고모부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청주에 있던 고모집에 맡겨진 가네코 후미코는 당시 고모와 함께 살던 친할머니로부터 엄청난 구박을 받았다. 친할머니는 그녀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뒤늦게 올린 그녀의 호적도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어머니의 성 가네코를 받도록 했다.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노동과 구박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녀를 측은하게 여긴 것은 친척인 일본 사람들이 아니라 동네의 조선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3.1 운동을 목도하면서, 핍박받는 조선 사람들의 심정에 감정이입을 하고 그들의 항거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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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결혼을 하여 박문자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출처: 구글 갈무리)

 

 

박열과 마찬가지로 1919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가네코 후미코는 스스로의 운명을 더 이상 친척에게 맡기지 않고 홀로 도쿄로 나온다. 그리고 박열처럼 노동을 하면서 영어 학교에서 고학한다. 그녀는 아나키스트였던 이와사키(岩崎)가 운영하는 ‘오뎅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일본인 아나키스트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운명과도 같이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접하고 1922년 그와 동지적 우애와 남녀의 사랑으로 뭉쳐 함께 살게 된다.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함께 살며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영화에서는 이 지진 장면을 흘러가듯 다루었으나 관동대지진은 기실 엄청난 천재지변이었다. 관동(關東, 간토. 교토와 오사카 등은 하코네 관문 서쪽이라 하여 關西, 즉 간사이로 부른다)이란 하코네의 관문에서 동쪽이란 뜻인데 대개 도쿄와 이와 인접한 사이타마, 지바, 이바라키, 도치기, 군마, 가나가와 현 등을 일컫는 말이다.


관동대지진의 피해 규모는 어머어마했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사망자와 행방불명이 총 40만 명에 달했다. 피해 규모가 이토록 컸던 이유는 일본의 급진적인 공업화와 도시화로 도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장 노동자화하면서 밀집되어 있어서였다. 이들의 주거환경이 잘 정비되지 않았던 탓도 컸고 대규모 지진에 대비하지 못한 일본 정부의 문제도 있었다. 그 이전부터 쌀값이 폭등하는 등 공업화와 도시화의 폐해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던 일본 대중들의 불만은 지진과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계점을 넘어 폭발할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폭동을 막기 위해 정부에 대한 자국민의 분노를 조선 사람에게 향하도록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일본인들을 죽이려 하고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정부 측에서 낸 것이다. 터질 듯한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에게 소문의 진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분노를 터뜨릴 대상을 필요로 했고 이를 일본에 나와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풀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 관헌들과 함께 조선인을 무차별로 체포?구타?학살했다. 이때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던 동료 몇 명도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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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대학살을 알린 <동아일보>

 


영화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고엔(5엔)을 발음해보라고 하는데 이 고엔이란 말은 외국인이 일본 사람처럼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렵다. 고엔은 고엔과 고엥의 중간쯤의 발음이어서 일본인들은 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선인이라고 여기고 마구잡이로 학살을 하였다.


일본 정부가 자국민을 선동해 무법천지를 만든 비열한 획책의 한가운데에는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1868~1949, 김인우 분) 내무대신이 있었다. 영화에서 동료 관료가 조선에서 부상당한 원한을 풀기 위해 조선인 학살을 조장하느냐는 의미의 대사를 하는데, 그는 1919년 사이토총독과 함께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남대문에서 강우규 열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경미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공포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공포와 복수심을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미즈노 렌타로는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3년간 조선에 있으면서 기만적 문화정치를 시스템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유화적인 정책을 펴는 듯한 모양새를 하면서도 뒤로는 이전의 무단정치시기보다 더 악랄하게 조선인을 핍박했던 것이다. 미즈노 렌타로가 만든 총독부의 통치방식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우리 민족을 괴롭혔다.


관동대학살로 죽은 조선인의 수는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았는데 2000명에서 6000명, 더 나아가 1만 명에 이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국민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로 일어난 학살이었지만 이것이 언론과 해외에 알려지면서 일본 정부는 궁지에 몰린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를 잡아 자신들의 과오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자 그들은 불심검문에 걸린 박열과 그의 동료들을 이용하여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려 하였다.


마침 일본에 폭탄을 들여와 무장투쟁을 하려 했던 박열의 계획을 구체화하여 그에게 황태자(당시 황태자는 훗날 쇼와천황이 된다)를 죽이려 했다는 대역죄를 뒤집어씌웠다. 박열은 이 죄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릴수록 관동대학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박열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기꺼이 희생양이 된다. 그리고 박열의 뜻에 동조한 가네코 후미코는 그와 함께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재판에 나와 일본 천황제를 비판하고 제국주의의 추악한 얼굴을 낱낱이 까발렸다.

 


옥중 결혼과 서로 달랐던 최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에서뿐만 아니라, 옥중 사진 촬영으로 또 한 번 일본 전체에 혼란을 일으켰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어떤 면에서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설득하는 진정성이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취조하던 검사와 예심판사는 두 사람에게 호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영화에서도 두 사람이 옥중에서 혼인 신고서를 내고 다테마스 예심판사의 호의로 사진을 찍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이 포개어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의 사진은 예심 기간에 찍은 것이어서 언론에 알려졌을 때 일본 전체가 들썩거렸다. 죄인의 심문기간에 두 사람이 만나는 것도 있을 수 없는데, 죄수복이 아닌 옷을 입고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사진을 빌미로 야당의 ‘대역죄인 우대’라는 정치공세가 시작되고, 결국 당시 일본내각 전체가 사퇴하고 다테마스 판사가 사직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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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예심판사의 배려로 옥중에서 찍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 언도를 받고 각각 다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제는 사형선고 일주일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하고 천황의 은사 운운하면서 여론을 수습하려 하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타살설도 있다. 박열과 옥중 결혼으로 그녀는 법적으로 박열 집안의 사람이 되었기에 유골은 박열의 형제가 인수하여 문경에 안장하였다.


한편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가 죽은 후 일제에 복수라도 하듯이 묵묵히 옥중의 삶을 이어나갔다. 장장 22년 2개월에 걸친 징역살이를 거쳐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야 그는 석방되었다.


석방된 박열의 환영회에는 박열을 감시했던 일본인 형무소 소장이 나와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들이겠다는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재판 중에 다테마쓰 판사를 감동시켰듯이 박열은 자신을 가두었던 형무소 소장마저 감동시킨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박열은 이국에서 일제의 손에 죽음을 당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열사의 시신을 고국으로 안장하는 큰일을 맡아 했다. 또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을 위한 조직인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다. 1949년에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는데 1950년 터진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납북되었다고 하나 북한에서도 박열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 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74년 1월 17일에 사망하였고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가네코 후미코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죽은 후 시신을 안장할 곳을 마련해준 박열은 끝내 가네코 후미코 옆에 묻히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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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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