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지혜의 사적인서점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보르헤스의 말에 마음속에서 번개가 쳤다
세계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이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10명 정도일까요. 이 10명에게 책을 판다고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죠.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앞으로 90명에게 책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의미도 돼요. 그렇게 생각하면 즐겁지 않나요?” (2018. 01. 05.)
책싸개를 싸는 동안 기다리는 손님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다. 간판도 없이 4층에 떡하니 자리 잡은 이 서점을 어떻게 알 고 왔는지, 이 책은 어떤 이유로 골랐는지. 호기심 많지만 소심한 책방 주인의 즐거운 취미 생활.
학교 다닐 적에 책을 좋아하는 나를 두고 “지혜는 문학소녀잖아” 하고 얘기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문학소녀’ 혹은 ‘책벌레’ 안에는 어쩐지 똑똑하지만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 나는 그 별명이 창피했다.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책 읽는 행위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책 읽는 모습이 근사해 보여야 다른 사람도 따라 읽고 싶어질 테니까.
나는 땡스북스에서 일하며 책을 다루는 세련된 태도를 배웠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기쁨도 크지만, 좋아하는 책을 편안한 공간에서 고르는 기쁨도 큽니다”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땡스북스에서는 책을 엄격히 관리하는 것만큼 음악 선정이나 홍보물 디자인 등 책을 둘러싼 환경을 매력적으로 연출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품을 들였다. 땡스북스는 ‘세련된 취향으로서의 독서’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책을 고르고 있노라면 손님들은 자신이 근사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콘텐츠만큼이나 그것을 보여주고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기에 사적인서점에서도 그러한 태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라는 독서 캠페인이었다. 시작은 작가 보르헤스의 인터뷰를 모은 책 『보르헤스의 말』을 읽다가 마주친 문장에서 출발했다.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보르헤스의 말에 마음속에서 번개가 쳤다. 마침 서점에서 책을 사면 서비스로 제공하는 책싸개가 소진되어가던 참이었다. 책싸개를 이용해 독서 캠페인을 해보자!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주문을 외우듯 이 문장을 되새기며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작가와 사적인서점의 두 번째 책싸개를 만들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방바닥에 누워 편안하게 책을 읽는 모습, 책을 읽다가 깜빡 잠든 모습 등 책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담았다. 책 표지를 감싸는 부분에는 임진아 작가의 손글씨로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써넣었다. 손님들이 책을 꺼내 읽을 때마다 이 말을 곱씹으며 책과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아서. 책싸개가 갖고 싶어서 책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기쁠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게 뭐가 중요해, 책만 좋으면 됐지’ 혹은 ‘서점은 책에 집중해야지’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책을 갖추고 손님을 기다려도 서점 바깥의 사람들이 서점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한 번은 사적인서점에서 일본의 개성 있는 서점을 쏘다니며 주섬주섬 모은 책과 잡화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름하여 ‘주섬주섬장’. 교토 여행 중에 번뜩 떠오른 생각이라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포스터를 만들어서 하루 전날에야 공지를 올렸다. 그랬는데 이럴 수가! 행사 당일, 서점 문을 열기도 전부터 문 밖에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역대 최고로 많은 손님이 모여 역대 최고로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그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행사가 잘 된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책이 아니라 잡화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이 씁쓸했다. 그런데 영업 마감 후 정산을 해보니 책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방문이 뜸했던 손님도 한 번도 서점에 온 적 없던 손님도 잡화를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해서 함께 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점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의외로 재미있는 곳임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주섬주섬장을 통해 깨달았다. 다른 목적을 갖고 서점에 왔다가 책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 서점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일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책을 원서로 읽으며 일본어를 배우는 수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시작한 일이다. 마스다 미리의 팬이라면 매주 서점에 올 때마다 자연스레 다른 책들을 접할 수 있고, 마스다 미리를 몰랐다면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책과 서점을 가까이 할 수 있어 좋은 일이다. 인테리어 애플리케이션 ‘집 꾸미기’와 인터뷰를 한 것도 온라인 편집숍 29CM와 블라인드북 이벤트를 한 것도 모두 책이 없는 곳에서 책의 재미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람들이 서점에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책을 가지고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일을 한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세상에서 몰랐던 책과 우연히 만나는 기회를 일상 속 여기저기에 흩뿌리고 싶어서다.” - 『책 따위 안 읽어도 좋지만』 9쪽
한국과 일본의 서점 주인들이 모여 대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도쿄 카모메북스의 야나시타 쿄헤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이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10명 정도일까요. 이 10명에게 책을 판다고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죠.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앞으로 90명에게 책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의미도 돼요. 그렇게 생각하면 즐겁지 않나요?”
과연! 내 마음속에 또 한 번의 번개가 쳤다. 나 역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 하고 불평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책의 재미를 전할 수 있을까?’ 즐겁게 고민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중심은 책이다. 하지만 그 안에 갇혀 있고 싶지는 않다. 책과 연결되는 통로를 다양하게 열어 놓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서점. 나는 그런 서점을 만들어 가고 싶다.
보르헤스의 말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 마음산책
오늘은 영지주의자, 내일은 불가지론자이면 어때요? 다 똑같은 거예요.” 이런 식의 태도는 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호성, 사실과 허구 사이의 틈새라는 우주적 수수께끼를 연상시킨다.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윌리스 반스톤> 공저/<서창렬> 역15,120원(10% + 5%)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 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중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