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오승원의 반딧불 의원
내 기억력은 괜찮은가요?
건망증과 치매를 구별하는 법
기억력은 확실히 예전만 못해요. 잘 알던 사람 이름도 금방 생각이 안 나고 물건 둔 곳도 깜빡깜빡 잊어버리죠. 예전엔 남편이랑 애들 챙기면서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는데 지금은 그냥 넘기는 일도 있구요. 얼마 전에는 친구랑 전화 통화를 하는데, 바로 며칠 전에 했던 약속도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예요. (2017.08.16)
출처_ imagetoday
대기 중인 환자는 한 명뿐이었다. 열 평 남짓의 대기실 중앙엔 소파 두 개와 앉은뱅이 테이블이, 왼편엔 책이 빽빽하게 꽂힌 원목 책장이 놓여 있었다. 단출한 다른 집기들에 비해 고급스럽고 큰 책장이었다. 맞은편엔 자동혈압계와 체중계, 그리고 제법 큰 행운목 화분이 있었다. 반들거리는 잎의 초록색이 선명했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간호조무사가 대기실을 둘러보던 박정숙 씨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박정숙 씨가 반딧불 의원을 처음 방문한 것은 일 년 전 어느 저녁이었다. 둘째 딸이 따로 나가 살게 되면서 혼자 저녁을 먹는 일이 잦았다. 혼자 하는 식사를 위해선 요리를 하지 않았다. 그날도 냉장고에 남은 반찬으로 대충 해결하고 난 뒤였다. 여덟 시 뉴스가 끝나갈 즈음 시작된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이전에도 가끔 두통이 있었기에 진통제를 하나 먹고 침대에 누웠는데 두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구토가 날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응급실을 가야 하나 싶을 때 떠오른 게 집 근처 야간 진료 의원이었다. 특이한 이름이라 기억해둔 터였다.
그녀는 반딧불 의원이 마음에 들었고, 그중에서도 이 간호조무사를 가장 좋아했다. 일 년 전 이곳에 처음 왔던 날, 진통제와 링거를 맞고 두통이 나아지는 동안 조무사는 그녀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했다. 기껏해야 막내딸과 비슷한 나이일 텐데도 차분한 태도로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종종 꼼짝 않고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심한 편두통을 겪는다고도 했다. 이런 붙임성은 간호조무사라는 직업과는 그리 상관없는 것이었다. 박정숙 씨는 고지혈증으로 집에서 삼십 분 거리의 종합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종합병원 대신 반딧불 의원에서 처방을 받아왔다.
“김 선생, 우리 원장님이 치매 검사도 하시나요?”
그녀는 김희정 씨를 김선생이라 불렀다. 갑작스런 질문에 김희정 씨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치매를 걱정할 만큼 최근 환자의 행동에 변화가 있었던가.
“누가 검사를 받으시려고요?”
“내가 받아볼까 하구요. 치매 검사를 하려면 MRI를 찍어야 한다던데, 다른 큰 병원에 가야 되겠지요?”
“꼭 그런 검사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닐 거예요. 일단 원장님하고 상의해보세요.”
한참 어린 병원 직원에게도 항상 공손한 태도로 말을 건네는 분이었다. 진료실로 들어가는 환자의 뒷모습을 보며 김희정 씨는 걱정스런 마음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원장님께 여쭤볼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묻는 말에는 조목조목 답을 잘 했지만, 여간해서는 본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던 환자다. 그런데 오늘은 진료실을 나가기 전에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다 막 말을 꺼낸 참이었다. 이런 경우엔 되도록 환자에게 여유를 줄 필요가 있다.
“제가 뇌 MRI를 찍어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남편이랑 애들이 찍어보라고 해요.”
노년의 환자가 스스로 치매를 걱정하는 경우라면 실제 문제는 없을 때가 많다. 이전보다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대부분 나이에 따른 건망증이다. 하지만 본인이 아닌, 가족이나 가까운 이가 진료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환자의 기억력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수현은 곁눈질로 컴퓨터 화면의 환자 리스트에 대기 중인 환자가 있는지를 살폈다.
“가족 분들이 검사를 권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전과 달라졌다고 하네요. 기억력도 떨어지고 행동도 굼떠졌다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기억력은 확실히 예전만 못해요. 잘 알던 사람 이름도 금방 생각이 안 나고 물건 둔 곳도 깜빡깜빡 잊어버리죠. 예전엔 남편이랑 애들 챙기면서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는데 지금은 그냥 넘기는 일도 있구요. 얼마 전에는 친구랑 전화 통화를 하는데, 바로 며칠 전에 했던 약속도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예요.”
“친구분들도 진료를 받아보라고 하세요?”
“아뇨. 자기들은 더하다고 해요. 나이 들면서 그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선 제가 적극적인 편이고 모이면 즐거워요. 그런데 가족들에겐 미안하기도 하고 자꾸 위축이 되네요.”
그녀의 가족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적은 없었다. 남편은 통신회사의 중역이었다. 두 딸은 직장을 다녔고 미혼이지만 각자 따로 살고 있다 했다.
“이래 봬도 제가 대학원까지 나왔거든요. 예전엔 제가 나이에 비해 새로 배우는 것도 잘했어요. 그런데 이젠 딸들이 엄마가 뒤쳐지는 게 싫다고 해요. 예전엔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잘 다루지 못하고….”
“남편 분은 뭐라 하세요?”
“남편은 나이 들수록 머리를 더 쓰고 노력해야 하는데 왜 노력을 안 하냐고 그래요. 젊어서는 제가 남편보다 더 성적도 좋고 계산도 잘했어요. 남편은 지금도 회사 경영을 하고 있지만, 저는 집안일만 하다 보니 저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네요. 힘들어도 직장을 다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되고. 지금이라도 책도 더 읽고 이런저런 공부를 해보려 하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힘들어요.”
한숨 섞인 말을 이어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높았다.
“사실 제가 가족들 몰래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받았어요. 선생님이 결과가 좋다고 치매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기분 좋게 집에 돌아갔지요. 딸들에게 슬쩍 이야기했더니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당장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봐야 한다고 그래요. 그런 반응을 보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더라구요. 애들은 다들 독립해 있지만 막상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직도 엄마가 도와주길 바라면서….”
순간 수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과 딸들에게 느낀 서운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과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린 것은 자신의 기억력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었다.
“잊어버린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소설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남자가 나와요.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순간과 느낌들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능력 때문에 그는 오히려 불행해졌어요. 끝없이 밀려드는 기억 때문에 너무 예민해져서 견디기 어려웠던 거죠.”
그녀는 이전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적당히 잊어버려야 새로운 것을 기억할 수 있어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박정숙 씨는 치매가 아니에요. 나이가 들면서 건망증이 생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MRI 검사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검사가 필요 없다는 말에 가족 이야기를 하며 어두워졌던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원장님 말씀만 믿고 갈게요.”
진료실을 나가는 그녀에게 수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분이 우울하면 기억할 기운도 없어져요. 당분간 남편 분 밥 차려주지 마세요. 따님들에겐 결혼할 때 혼수는 본인들이 알아서 장만하라고 하시고요.”
“아유 참 원장님도.”
환한 표정으로 킥킥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쑥 세우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수현은 오늘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의 이야기다. 질병으로 서서히 망가져 가면서도 여전히 앨리스로 남고자 하는 노력을 섬세하게 표현한 줄리안 무어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늘 고립된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며 우리가 함께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의 ‘2012년 치매 유병률 조사’에 의하면 65세 이상 노인의 9.18퍼센트가 치매를 앓고 있으며, 80세가 넘으면 열 명중 세 명이 치매 환자가 된다. 평균수명이 늘고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치매의 유병률 역시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에게 치매는 암보다 무서운 질환이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집 열쇠가 분명 여기 어디에 있었는데? 내가 뭘 하려고 부엌에 왔었지? 뭔가를 깜빡하는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나타난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 잦아지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의 초기 증상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건망증의 경우 옆에서 귀띔해주면 대부분 잊었던 사실을 기억해내는 반면, 치매 환자는 힌트를 줘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노화에 따른 건망증은 기억능력에만 문제를 일으킬 뿐 다른 인지 능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일상적인 생활을 수행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치매 환자는 기억력 외에도 공간지각력, 계산능력, 판단능력 등이 떨어지고 일상생활 수행에도 문제가 생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건망증은 치매로 발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건망증이라 하더라도 횟수가 잦아지거나 정도가 지나치면 건망증과 치매의 중간 단계인 경도 인지 장애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문가를 찾아 평가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치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MRI와 같은 특수한 검사가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검사는 인지 기능에 대한 평가이다. MMSE(Mini-Mental State Examination)가 대표적인데, 검사지를 이용한 짧은 인터뷰 형식으로 병원 외에 보건소의 치매상담센터 등에서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다.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