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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은 언제부터 찍었을까요?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편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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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모두가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실은 아무도 하지 않는 경우가 참 많더라는 삶의 경험칙이 나를 한번 불안하게 흔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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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어느 주말, 나도 많은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광화문 광장에 있었다. 그때, 이 말을 누가 믿어줄지 모르지만, 어둠이 내린 광장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마음의 형체를 나는 분명히 보았다. 마음에도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든 바람에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어깨를 겾게 된 백만의 군중이 어둠을 향해 무언으로 내뿜는 그 무엇, 함께 외치는 토막난 구호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형상을 갖고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지금 어떤 큰 소용돌이 속에 있구나 싶었다. 이 소용돌이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그래서 우리는 물론 우리 이후의 사람들과도 공유해야 할 그 무엇이다. 이것의 기록과 공유에 가장 적합한 매체는 사진일 테지. 사진집이 필요해. 그런 생각을 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출판하는 사람이라면 뭐든 책으로 만들 생각부터 하니까.

 

그럼에도 그 순간이 유난히 잊히지 않는 것은 바로 그때 내 생각에 약간의 변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만들겠지'였는데 '내가 만들어야겠다'로 변해 버린 것이다. 거창한 사명감을 느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모두가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실은 아무도 하지 않는 경우가 참 많더라는 삶의 경험칙이 나를 한번 불안하게 흔들었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도 금세 머리가 아주 복잡해지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가장 먼저 밀려온 것은 후회였다. 때는 국회에서 박근혜에 대한 탄핵안이 막 가결된 참. 이것이 혁명의 과정이라면 중반쯤에 접어들었으려나. 이제부터 사진 기록을 시작하자가 하기엔 너무 늦은, 중요 장면이 꽤 많이 지나가버린 시점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이상엽 씨에게 전화를 건 것은(아니, 전화가 왔던가? 아무튼) 그런 후회감 속에 있을 때였다. 나는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얘기를 했다.

 

"이미 기록하고 있어요." 이상엽 작가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노동 현장과 4대강 등 우리 사회의 아픔과 갈등이 있는 곳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달려가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다. 무거운 사진 장비를 들고 차도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안 가는 데 없이 현장을 누비는 것을 보면 감탄을 넘어 존경심을 품게 된다. 나는 내 몸뚱이 하나 끌고 방문 밖에 나가는 것도 버거운데. 그런 그가 광장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행이다 싶어 책 작업을 같이하자고 말했다.

 

"혼자서는 다 못 찍어요." 이 거대한 물결의 기록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많단다. "여럿 있어요. 조직해야 되겠네."

 

"그 사람들은 언제부터 찍었을까요?" 내가 물었다. 최소한 최순실이 수면 위로 부상한 시점, 국정 농단에 항의하는 최초의 촛불이 광화문에 밝혀지던 시점부터는 사진이 있었으면 싶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들 몇 년 이상 찍었죠. 10년, 20년 된 사람도 있고."

 

사진가 경력을 묻는 걸로 들렸나 보다. "그게 아니라 이번 사태에서 어느 시점부터 찍었냐고요."
"그러니까요. 다들 몇 년 전부터 계속 찍어왔어요. 다 연결되어 있는 일이에요."

 

그제서야 감이 잡혔다. 난데없이 솟아나는 문제란 없다. 우리가 어느 시기를 지목해 마치 거기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처럼 잘라 이름을 붙이지만 그것은 모두 연결된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탄핵이 있기 전에 국정 농단이 있었고, 국정 농단이 있기 전에 이화여대 사태가 있었다. 또 그 전에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밀양 송전탑 건설 강행, 위안부 합의, 예술가 탄압, 개성 공단 폐쇄, 청년 실업, 노동 조건의 악화와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억울한 죽음, 농정 파탄과 백남기 농민의 사망, 국정원의 댓글 공작...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모순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시작점을 찾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단군 때까지 올라가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모순을 평생 기록해온 사람들에게는 새삼 광화문의 촛불이 시작점일 수 없었다.

 

10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그렇게 조직되었다. 그들은, 낮에는 현재 진행중인 격동의 현장을 기록하면서 밤에는 오랫동안 찍어온 사진을 선별하는 강행군을 했다. 여러 차례 기획회의를 거치면서, 현상과 원인이 연결되어 있는 이 사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시간 역순으로 편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단군 때까지는 갈 수 없어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던 무렵까지로 끊었다. 그럼에도 사진이 너무 많았다. 사진가들 중에는 미디어에 소속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프리랜서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사진 기록을 그렇게 엄청나게 열심히 해놓았다는 것이 놀랍고도 고마웠다. 때로는 물대포를 덩달아 맞고 나동그라지면서, 때로는 폭도로 변한 태극기 부대에게 린치를 당하면서 기록한 사진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기억을 담당한 전사들이다.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의 불행이 반복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이다.

 

사진집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난겨울의 어느 주말에 나 한 사람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그 기억의 전사들이 기획한 책이다. 우리는 민들레가 절대 멸종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씨앗을 엄청나게 날리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포착해놓은 이 기억들도 엄청나게 퍼져서 절대 멸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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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무성(루페 대표)

금속 활자와 디지털 활자가 아직 함께 쓰이고 편집과 디자인의 직업적 분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에 출판에 입문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만드는 일까지 계속하고 있다. 정신세계사 주간, 열린책들 주간을 지냈고, 리랜스 편집자 겸 디자이너, 계간 <문화예술> 편집위원장, 폰트회사 CCO로 일한 적도 있다. 현재는 루페에서 색다른 시선으로 좀더 자세히 세상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책들을 만들고 있다.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김봉규> 등저22,50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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