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단골이 없는 아침

21세기 속 20세기 카페의 나날들처럼 평안한 내일이 찾아오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요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읽고 나니 새삼 클래식이 좋아졌다. 더불어 클래식에 입문한 계기를 떠올렸다.

IMG_6367.JPG

 

요즘은 아침 출근이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여섯 시 전후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 데 걸리는 시간 7분, 집 앞 공원을 지나다 보면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각인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른다. 평소 같으면 텅 비었을 공원이 웬일로 남녀노소 불문 사람이 많다. 아, 그러고 보니 장미 대선 본날이다. 공원 끝에 있는 투표장을 새벽같이 찾는 인파다.

 

대선의 여파는 카페에도 미쳤다. 평소 같으면 일곱 시 반, 가게 문을 열자마자, 혹은 내가 여는 것과 동시에 들어오는 나보다 오래된 단골들이 있다. 오늘은 그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 조용한 카페에서 클래식을 듣기로 한다. 요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읽고 나니 새삼 클래식이 좋아졌다. 더불어 클래식에 입문한 계기를 떠올렸다.

 

중학생 시절부터 아버지의 만화 콘티를 컴퓨터로 입력하며 얼결에 글 쓰는 법을 익혔다. 그 재주를 살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글쓰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익백서 제작부터 시작해 잡지 자유기고에 홈페이지 제작, 게임 시나리오며 영화 시나리오까지 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 2002년 운 좋게 한 방송국에서 크리스마스 특집극을 방영했다. 영상물이 돈이 된다는 걸 깨닫고는 진지하게 그쪽으로 빠져들었다. 전통 있는 빵집 이야기를 적고 싶다는 일념으로 집 근처 태극당에 취직했다.

 

2003년의 일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매일 아침 여덟 시까지 출근했다. 카스테라 박스를 백 개씩 접어 창고에 탑처럼 쌓았다. 단골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카페를 겸한 홀에서는 인스턴트커피며 우유, 쌍화차를 팔았다. 옛날 다방에서나 볼 법한 공중전화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최초의 태극당 때부터 일했다는 공장장 할아버지를 만났다. 반 지하층에 있는 모나카 아이스크림 공장의 은밀한 제조법을 들었다. 대를 이은 사장님은 클래식을 좋아했다. 매일 듣다 보니 하이든과 모차르트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됐다. 사장님이 따로 용돈을 챙겨주시거나, 유명한 족발집에서 족발을 사주시기도, 안경도 맞춰주시는 일도 있었다. 직원뿐만 아니라 근처 보석점 겸 안경점 매출을 염려하셔서 아르바이트가 들어오면 금으로 된 액세서리나 안경 같은 것을 꼬박꼬박 구입하셨다.
 
최근 태극당에 들렀다가 격세지감을 느꼈다. 클래식 대신 가요가 나왔다. 빵 종류도 많이 바뀌고 가격은 올랐다. 카페에는 에스프레소 머신도 생겼다. 스타벅스 같은 분위기에 영 적응을 못했다.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걱정했다. 사장님은 잘 지내실까. 이젠 매장에 안 나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 계시던 빵공장 어르신들이며 직원 분들은 어떻게 지내실까. 예전, 이곳을 메웠던 단골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오전 여덟 시가 넘도록 마수걸이를 못했다.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 클래식 CD를 튼다.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 언급되었던 '어느 황홀한 저녁‘이 흘러나온다. 옆집 사장님이 “투표는 했어” 물으며 천원짜리 두 장을 들고 들어오신다. 손님이 너무 안 오자 염려하신 모양이다. “부재자 투표요. 미리 했죠.” 대꾸하며 철제 드리퍼를 왼손에 든다. 글라인더에 꽂고 원두를 간다. 서서히 떨어지는 가루의 리듬감은 십오 년 전 처음 에스프레소를 뽑았을 때 그대로다. 템퍼로 적당히 다독여 머신에 꽂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사이, 비가 온다.
 
테라스에 내놓은 철제 테이블과 의자를 들여놓을까 고민하다 그냥 두기로 한다. 혼란한 정국처럼 미세먼지가 심했던 흔적을 빗물에 씻겨본다. 단골들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 바쁜 것일 테니 문학수 기자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각자의 책에서 소개했던 클래식을 차례로 복습해보기로 한다. 21세기 속 20세기 카페의 나날들처럼 평안한 내일이 찾아오길 빌며.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조영주(소설가)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

오늘의 책

모두가 기다린 찰리 멍거의 이야기

버크셔 해서웨이의 전설, 찰리 멍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 최초로 공식 출간된 유일한 책이자 마지막 책.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하여 투자와 삶에 대한 지혜와 통찰을 선사한다. 세대를 아우르는 찰리 멍거의 생각과 사상을 집대성한 인생의 지침서

대한민국 No.1 일타 강사진의 특급 솔루션!

채널A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 공식도서로 스타 강사 정승제 x 조정식 멘토의 성적 급상승 전략을 비롯해 공부 습관, 태도 등을 다루며 학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맞춤 솔루션을 제시한다. 자신만의 공부법을 찾는 학생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책이다.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소설상 대상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어른들이 잠들어버린 세계. 멈추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는 시선으로 담아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단단한 용기와 위로를 건네는 소설.

어린이를 위한 지식 트렌드 리포트 2025

동물, 우주, 인체, 환경, 역사, 문화, 지리 등 올해의 과학 역사 교양 토픽을 한 권에! 초등학생이 꼭 알아야 할 필수 지식과 최신 정보를 두루 모은 최고의 다큐멘터리 매거진. 전 세계 아이들과 함께 보고, 매년 기다려 있는 세계 어린이를 위한 지구 탐험 교양서.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