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몸에 가까운 페미니즘 에세이라니, 지영아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편집 후기
편집자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기획한 책이지만, 스스로 독자로서 너무 읽고 싶고 또 갖고 싶어 기획한 책으로는 첫 번째다. 기존 페미니즘 독자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어떨까요?” “괜찮은 것 같아요, 한번 생각해볼게요.” 언젠가 저자께 책 제목을 제안했다. 그러고 며칠 후였던가, 몇 달 후였던가. 습관처럼 들어간 페이스북에 저자의 새 글이 떴다. 글에는 이런 제목이 달려 있었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만들면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다. 물론 지극히 내 시점에서. 저자께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하자. 산통 깨기 싫으니까.
아마 나뿐 아니라 적지 않은 편집자들이 저자 홍승은 님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실제로 출간 제안을 드렸을 때, 저자 분은 이미 한 출판사로부터 동생인 홍승희 님과 함께 페미니즘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고 고민하던 차였다. 어떤 말로 저자를 유혹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과 선생님 동생 두 분 글의 결이 다르니 같이 쓰기보다는 따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제가 남자 편집자라 불편하다면 초기 기획 단계에서만 저와 함께 하시고, 편집 과정에서는 여자 편집자와 작업하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며 두근두근하기를 며칠, 드디어 답이 왔다. “선생님과 같이 작업해보고 싶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후에 저자께서는 ‘여자 편집자와 작업할 수 있게 하겠다’는 배려 어린 말에 나와 함께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인연을 시작하자마자 내 출간 제안과 무관하게 저자께 고정 연재처가 생겼다. 또 저자 분과의 두 번째 미팅 자리에서 “선생님 글을 읽다 보면 보라색 느낌이 나요. 책의 전반적인 색감은 보랏빛으로 가면 어떨까요?”라는 나의 얘기에, 저자 분과 당시 함께 자리했던 동생 분이 동시에 환하게 웃으며 “저희도 보라색이 좋겠다고 얘기했었어요”라고 답했다. 그런 연유로, 운명론자인 나는 이 책이 내 손을 거쳐 나올 운명이었다고 우겨보고 싶다.
좋은 신인 저자를 발견하고 끝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측면에서 기획자로서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다만 편집자로서는 아쉬웠다. 저자의 글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아까워서, 편집자인 내가 글을 살려두자고 하고 저자는 빼자고 하는 웃지 못할 역할 전도 현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덜어냈으면 좋았을 부분들이 뒤늦게 보이기도 한다. 구성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아 좀 헤맸고,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도자료 쓸 때도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 절반 정도 썼을 때 이미 ‘보도자료’가 아닌 ‘작품해설’ 분량이었으니까. 부끄럽지만 이번엔 저자의 글이 가진 힘에 좀 묻어가고, 다음 책을 정말 잘 만들어드리기로 한다. 다음 책도 나랑 하시라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미리 깔아놓는다.
홍승은 님의 글은 자신의 내밀한 얘기를 풀어놓은 에세이지만, 부제처럼 “페미니즘 에세이”다 보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잔잔하고 편안한 글은 아니다. 저자가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들은 불편하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저자 분의 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폭 빠져서 읽게 하는 힘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너무 과하지 않을 만큼 뜨거우며, 충분히 따뜻하다. 이 책을 기획한 건 저자의 글이 좋아서였지 페미니즘의 인기에 편승한 게 아니다. 소위 ‘페미니즘 열풍’은 내가 우리 회사에서 이 책을 내기 위해 다른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들었을 뿐이다.
사실 출판 시장에서 페미니즘 열풍을 주도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나쁜 페미니스트』 같은 에세이들을 보면서 조금 아쉬웠다. 그 책들에 보편성이 있어서 사람들이 반응했겠지만, 아무래도 외국 저자가 외국의 사례로 이야기를 펼치다 보니 제대로 공감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이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은 이유 중 하나가 그런 빈틈을 메워줬기 때문 아닐까 싶다.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보통의 여성이라면 『82년생 김지영』에 그랬던 것처럼 이 책에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공감하는 걸 넘어 위안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단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고 직시하는 것을 넘어, 한국사회 저변에 깔린 여성혐오 같은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동시대를 사는 모든 여성들에게 말해주니까.
편집자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기획한 책이지만, 스스로 독자로서 너무 읽고 싶고 또 갖고 싶어 기획한 책으로는 첫 번째다. 기존 페미니즘 독자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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