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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위의 집> 억울한 사연이 쌓아올린 시간의 집

이승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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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위의 집>이 취하는 입장(?)은 선명하다. 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 꽃 같은 청춘이 죽어 나가는 비극의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와 같은 과거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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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장르가 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공포물의 하위 카테고리 정도 된다. 집이 생명을 가진 듯 사람을 무섭게 하고 공격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는 내용의 영화를 일컫는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디 아더스> <폴터 가이스트> <이블 데드> <샤이닝> <주온> <장화, 홍련>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타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시간위의 집>도 귀신 들린 집이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비가 내리치는 어느 밤, 영화는 으스스한 기운이 테를 두른 적산가옥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런 분위기에 걸맞게 정신 잃은 한 여자가 마루에 쓰러져 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녀는 가정주부 미희(김윤진)다.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지하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에 그녀는 서둘러 내려간다. 칼에 찔려 죽어 있는 남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은 지하실에 위치한 의문의 방문 뒤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다음 날 아침, 미희는 남편과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25년 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2017년 11월이 되어서야 석방된 미희는 그 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992년에 살았던 그 집으로 돌아온다. 그 소식을 듣고 그녀와는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최신부(옥택연)가 찾아온다. 그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에 미희는 말한다. ‘그들’이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데려갔어. 그렇다면 이 집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귀신 들린 집 영화는 보통 주인공이 살던 그 이전 사람들의 사연이 집과 결합해 주인공을 괴롭히게 마련이다. 사실 괴롭힌다는 표현이 좀 과하게 느껴지는 건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아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주인공 당사자에게는 공포를 다가가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억울한 사연은 시간을 매개하여 집이라는 역사의 공간에 쌓인다. <시간위의 집>이라고 제목을 지은 연유도 여기에 있다.

 

미희가 석방 후 바로 집을 찾은 이유도 억울한 사연이 있어서다. ‘그들’에게서 아들을 찾아야 한다. <시간위의 집>에서 그들의 사연은 종류가 다양하다. 다양한 시간대 층위의 사람들이 그 집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의 사건이 미희에게 벌어졌던 날은 1992년 11월 11일. 25년 전인 1967년 11월 11일에도, 더 앞서 25년 전인 1942년 11월 11일에도 이 집에서는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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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25년을 주기로 11월 11일이 되면 이 집에서는 시간의 빈틈이 생기고 그때마다 이승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미희가 석방되어 돌아온 2017년 11월 11일은 이 집에 들어찬 억울한 사연들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인 셈이다. 어디서부터 이 사연들이 출발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귀신 들린 이 집의 억울한 사연이 쌓인 첫 번째 시간은 1942년, 일제 강점기다. <시간위의 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이 영화는 극 중 적산가옥을 일종의 한국 역사로 보는 듯하다. 25년이 주기인 이유? 1967년과 1992년은 큰 의미는 없고 2017년 현재와 맞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예전에 이 지면에서 <가려진 시간>에 대해 설명하며 ‘세월호 영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시간위의 집>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엄마의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시간위의 집>이 취하는 입장(?)은 선명하다. 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 꽃 같은 청춘이 죽어 나가는 비극의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와 같은 과거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는 것. 비극적 역사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적폐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은 한국사회 전체에 공포로 다가온다.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는 억울한 사연이 쌓이고 쌓여 ‘시간 위의 집’이 생겼다는 논리가 이 영화를 지배한다.

 

이는 동의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 구성원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공포이자 현실이다. 다만, <시간위의 집>이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동의하기 힘들다. 여러 시간의 층위를 다루면서 자체적인 논리를 구축하는 노력을 들이기보다 메시지의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활용하는 연출이 노골적으로 엿보인다. 머리로 설득시키기 이전 감정을 자극하겠다는 의도는 허구의 장르와 현실의 일면으로 구축한 영화적 논리를 무참히 깨뜨려 버린다.

 

귀신 들린 집과 같은 공포와 SF와 판타지와 스릴러 등의 접근으로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픔과 같은 한국사회의 비극을 다루고자 하는 장르 영화는 다른 접근법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감정의 위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건설적인 토론이 가능한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영화를 통한 감정 해소는 일시적이라 비슷한 패턴의 작품이 반복되면 관객은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간위의 집>이 주는 교훈은 영화의 메시지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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