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배수아,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번역하며
나는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산책자』
그는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하지 않은 드문 작가였다. 그는 타이프라이터라는 물건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타이프라이터뿐 아니라 그에게는 작가라면 작업을 위해서 의당 소지했으리라 생각되는 물건들이 없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거주지가 없으며, 단 한 점의 가구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_ 로베르트 발저
to be small and to stay small
번역 작업은 나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독서이기에, 나는 내가 번역하는 책의 번역가이면서 동시에 (외국어로 읽는, 따라서 약간 서툴고 그만큼 더 진지한) 독자라는 위치를 벗어날 수가 없다. 여기서 독자란 단순히 불특정한 책을 읽는 불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독자란 감응되고 유도된 행위자이며,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열광자로 다시 태어나는 개념이다.
내 번역은 대개의 경우 실시간 독서와 동시에 병행하여 유발되는 산물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은 다음에 올 문장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은, 자기 스스로의 육신을 놀라워하고 충격에 휩싸이고, 소스라친다. 자신의 몸이 종처럼 울리는 것을 낯설고도 황홀하게 듣고 있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읽으면서 깜짝 놀라게 될 문장들이 있다면, 그 문장들 역시 스스로 깜짝 놀라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기는 그 순간에, 마찬가지로 번역자 역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독자들이 무엇인가를 궁금해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지점에서 번역자도 같은 것을 궁금해하고 있다.
텍스트는 자신의 궁극의 지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대본 없는 낭송, 즉흥의 산책을 이어나가는 듯하다. 이것은 내가 연구 번역자, 언어학 번역자, 텍스트와 거리를 유지하여 자기 컨트롤이 능숙한 번역자가 아님을 고백하는 서두이다. 또한 아무도 그 규칙을 파악하지 못하는 발저(Walser)의 스텝을 한 박자 한 박자 따라가는 이 번역이 믿기 힘들만큼 기묘했다고, 광적일 만큼 현란하게 아이러니하고, 달빛 비치는 차가운 밤이면 내면의 황야를 홀로 가로지르는 고독한 왈츠(Walzer)였다고 환희로 고백하는 서두이다.
우리가 발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미미한 정보들을 간추려보면, 자기 부정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여행이 연상된다. 1878년 스위스 베른 주 비엘의 독일어 사용 가정에서 출생. 가정 형편상 14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학업을 중단함. 처음에는 배우가 되고 싶어 했으나 하인 학교에 등록했고, 슐레지엔의 성에서 집사로 일하며 겨울을 보냈다. 나중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1956년 크리스마스 날 눈 속에 얼어붙은 시신으로 쓰러진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발견되었다. 산책길에 심장발작이 왔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듯한 산문 「크리스마스 이야기」 중에서처럼.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그의 삶에 언제나 좌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소망이던 배우의 꿈이 좌절된 그는 형 카를이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무대 화가로 성공적인 캐리어를 쌓고 있는 베를린으로 가서 행운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은행의 견습 사무원과 고무공장 노동자 등으로 일한 이후에 말이다. 그는 1905년부터 1913년까지 베를린에 머물렀다. 초창기에 그는 작가로서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으며, 베를린의 독일 문학인 모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성인들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소년처럼 행동거지가 악동인 데다가 기괴한 장난이 심했다. 파티에서 레슬링을 벌이는가 하면 점잖은 성인들이 당황스러워할 만한 언행을 일삼았다. 게다가 그가 사용하는 스위스 방언, 정규 교육을 마치지 못한 점 등 때문에 베를린 문학계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술 몇 잔에 금세 과격할 만큼 촌스럽게 변하곤 했다. 그리하여 점차, 사람들로부터 멀어졌고 홀로 남았다.
형의 집을 나와 독립한 그는 가구 딸린 골방을 전전하며 이사를 다녔다. 생활은 매우 근검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장편소설 『탄너 집안의 아이들』(1906), 『조수』(1908), 『야콥 폰 군텐』(1909)을 썼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자조적 표현에 따르면, “조롱만 당하고 성공하지 못한 작가”로 고향 스위스로 되돌아갔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책상 앞에서 일하거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밖에서 걸어 다니면서 보낸 듯하다. 그는 보기 드문, 특별한 수준의 기나긴 산책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짧은 산문 쓰기에 집중했다. 그는 산문을 써서 신문사로 보냈다. 그의 산문 「최후의 산문」에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산문을 썼고 또 얼마나 참담한 좌절을 겪었는지 유머러스한 문체로 드러난다. 그가 대체로 폄하되는 형식인 산문을 주로 쓴 까닭은 아마도 경제적인 이유가 컸겠지만, 이런 종류의 장르를 구분하기 힘든, 너무도 자유분방한 형식과 길이의 산문들에서 그의 재능은 마음껏 빛을 발했다.
나는 지금도 「툰의 클라이스트」, 「헬블링 이야기」, 「원숭이」 등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산책」의 문장들을 접할 때면 저도 모르게 감탄과 충격의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무대에서 관객에게 즉석에서 말을 걸면서, 그 말을 글로 쓰고 있는, 그러므로 작가 자신도 다음 문장의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지 미리 계산하고 있지 않다는, 우아하고 유쾌한 자포자기의 즉흥 댄스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까지 성공한다.
물론 그 이외에도 참으로 아름답고 황량하며, 어떨 때는 이빨을 드러낸 듯하고, 방치되고 산만한 언어, 끝을 모르는 풍자와 비꼼,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무의미함과 무의도성, 그리고 마침내는 인과성과 연속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돌연하고 뜻밖인 결말들.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
태연을 가장한, 뼛속 깊이 스며드는 시니컬함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둘 다 의미심장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간혹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최대한 아무 목적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철학자가 하품을 했다. 나는 그에게 매우 어울리는 그 행위의 공공연한 무신경함에 감탄했다. 사회적 업적이 큰 남자에게는 완벽하게 적절한 태도보다는 도리어 그 반대가 더 적절하게 어울리는 법이다. 침묵을 지키면서 서로가 서로를 대담하게 관찰했다. 아마도 그는 혓바닥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고, 내 혓바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 방어를 위한 냉소의 포즈, 기괴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특징은 그가 쓰지 않은 것, 빈 자리, 일부러 생략한 어휘, 다른 것으로 대치된 감정들, 입 다묾, 돌연한 마침이다. 그의 모든 것은 의외이다. 그의 글에서 아름다움이 넘실대는 것은 의외이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한 후에 공교롭게도 바로 헤르만 헤세의 글을 번역했다. 그 둘은 문체의 스타일에서 매우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한 사람은 차분하게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감동시키며, 다른 사람은 스스로의 흔적을 끊임없이 지우며 모퉁이를 돌아버린다.
그는 돌연하고 불연속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작게 여기고,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카프카도 어느 편지에서 쓰지 않았던가, “Indeed I am a chinese”라고?
그의 산책이 곧 그의 글이 되었다. 걷기는 그의 스타일을 구축한 육체였다. 걷기를 통해서 “그는 어디서나 살았고, 그 어디에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글 안에서 “하나의 내면이 되었고,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그의 산문 <산책>을 읽어보라. 그것은 하루 온종일에 걸친 산책이다. 그는 화창한 아침에 집을 나서서, “시간이 늦었고, 어둠이 세상에 깔”린 다음에야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다.
그는 언제 집에 도착하게 될까? 때로 그는 밤중에도 산책을 했다. 그는 기나긴 산책자이자 홀로인 산책자였다.
매우 열심히 산문을 발표했지만, 그는 다른 직업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는 거주지와 일자리를 자주 바꾸었다.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스위스에서 그는 두 편의 소설 『테오도르』와 『토볼트』를 썼다. 『테오도르』는 그의 편집자가 분실해버렸고, 『토볼트』는 발저 스스로 없애버렸다.
비록 헤르만 헤세와 카프카로 대표되는 동시대의 뛰어난 작가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으나, 그것이 그의 작가적 자립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1905년 막 베를린에 온 스물일곱 살의 그는, “헤르만 헤세가 겁먹을 만큼 훌륭한 작품을 쓰겠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보다 겨우 몇 살 더 많은 헤르만 헤세는 바로 한 해 전에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했고 즉시 독자와 비평가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작가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터 카멘친트』는 그와 유사하게 스위스의 시골 출신인 주인공이 대도시로 나와 문화적 경험과 교양을 쌓는 줄거리였으므로 그가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볼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헤세가 이후 계속해서 성공적인 작가로 도약한 것에 비해, 그는 소설을 발표하면 할수록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Indeed I am a chinese.
그런데 헤세는 그의 열렬한 독자이자 옹호자가 되었다. 헤세는 그를 동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스위스 작가로 인정했다. 수많은 편지와 신문 칼럼에서 그의 작품을 칭송하고 더 많이 읽히기를 촉구하는 글을 남겼으며, 그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뒤로는 경제적으로 돕기도 했다.
“발저와 같은 작가가 지성을 주도한다면 이 세상에는 전쟁이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작가가 수십만의 독자를 갖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와 같이 훌륭한 독일어 문장을 단 한 마디도 쓸 줄을 모르는 스위스의 그 많은 교수들과 라디오 방송 감독들은, 발저가 굶어 죽을 때까지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발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생계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않았다면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말)
하지만 그는 이것을 그다지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1943년 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작품에 약간의 사랑과 슬픔을, 약간의 진지함과 동조를 섞어 넣었어야 한 것 같아. 거기다 귀족적인 낭만주의도 잊지 말고 함께, 헤르만 헤세가 『페터 카멘친트』와 『크눌프』에서 했던 대로 말이야.”
귀족적인 낭만주의.
약간의 추리력을 발휘해보면, 흥미로운 연관을 떠올릴 수 있다. 또 다른 동시대의 뛰어난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1919년 에세이 <모던 픽션>에서, 인상은 더욱 강하고 면밀한 실증은 덜한 현대소설, 고정된 캐릭터보다는 부유하는 감성으로 이루어진 현대소설을 욕망했는데, 그것이 이미 십여 년도 전에 베를린에 살고 있는 스위스 작가에 의해서 상당히 높은 비중으로 실행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울프의 다음 표현은 마치 그의 글을 그대로 가리키는 듯한 뉘앙스이다.
“작가가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면, 써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을 쓴다면, 인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에 기반을 두고 쓴다면, 그러면 그의 글 스타일은 플롯도 없고 희극도 없고 비극도 없고 연애담도 없고 파국도 없을 것이다.”
전쟁이 터졌다. 1차 대전이다. 그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졌다. 그의 빈약한 수입의 원천이 되어주던 독자들은 그의 글이 너무 이상하다고, 혹은 반대로 너무 순문학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했다. 독자들의 절대수가 너무 적었고, 그는 경제적인 궁핍과 함께 빠른 속도로 독일과 스위스 문학계에서 잊혀져갔다.
그는 가구 딸린 작은 셋방에서 셋방으로 끊임없이 이사를 다녔다.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 살롱은 더 이상 그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폭음했다. 불면증을 앓았고, 환청을 들었으며, 악몽과 불안 발작에 시달렸다.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그 자신의 해명에 따르자면, “나는 심지어 올가미조차 제대로 맬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1929년 그는 베른의 발다우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만성우울증 환자였으며,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18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다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보다 더 큰 비중으로 불행을, 고립을, 그리고 가난을 앓았다. 그는 규칙적인 일상 패턴을 제공하는 병원 생활을 받아들이고 적응했으며, 퇴원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거부하기도 했다. 적어도 병원에 있으면 그는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었고 고독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1933년 헤리자우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종이봉투를 붙이거나 콩을 분류하는 등의 단순 노동으로 보냈다. 1933년 이후, 그는 단 한 자도 더 글을 쓰지 않았다.
“나는 여기 글 쓰러 들어온 것이 아니고 미치기 위해 들어온 것이니까요.” 하고 그는 헤리자우를 찾아온 카를 젤리히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의 절필과 정신병원 입원으로 그는 문학에서 실종된 이름이 되었다. 그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의 교유를 끊었다. 그는 존재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자매들 모두는, 대가족이 일반적인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후세를 남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의 실종이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 카프카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5살 연하인 카프카는 그의 열렬한 독자였지만 그는 카프카를 몰랐다. 『성』에 등장하는 두 명의 조수 바르나바스와 예레미아스는 그의 소설 『야콥 폰 군텐』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도 있다. 조수 혹은 시종으로 표상되는, 유래를 찾기 힘든 어떤 종류의 문학적인 주체. 카프카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무목적적이고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계산이나 궤도가 없는 그의 즉흥적인 코드들이 카프카로 옮겨지면서 전체 안에 치밀한 우화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카프카의 산문을 읽은 뒤 로베르트 무질이 “발저 유형의 독특한 예”라고 평한 것처럼.
그는 유머와 아이러니 넘치는 문체 속에서도 자연과 어린아이, 소박한 삶과 소박한 사람들을 칭송했다. 음식과 날씨, 술과 의복, 건축 담배 등을 묘사하고 노래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비극을 그린 것일까?
“내가 아는 건 단지, 모든 가난한 자들은 공장에서 일한다는 거지요. 아마도 가난에 대한 벌을 받느라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얼핏 보아서 그는 특별히 정치적인 작가인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시기에도 그의 글에는 전쟁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 그는 인위적인 거대한 세계의 외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아꼈고, 무관심과 거리를 유지한 듯하다. 그가 애정을 기울여 관찰하고 주목한 자연과 인간 본성의 천진난만함, 둔감한 이기주의에 대한 분노,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유토피아를 몽상하는 세계관에 더 가깝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어떤 요소 때문일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토피아적 사회개혁가에 적극적인 행동가였고, 그 덕분에 목사 직위를 잃었다. 반동주의자 한 명의 총탄이 창으로 날아온 적도 있었다. 그 총탄을 기념으로 보관한 할아버지는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 일부를 손자에게 물려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글 속에서 여러 번이나 자유와 평등의 세계를 꿈꾸었지만, 그것은 혁명으로 도달하는 세계가 아닌 보편적 관용과 배려심으로 이룩되는 세계에 가깝다.
그는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하지 않은 드문 작가였다. 그는 타이프라이터라는 물건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타이프라이터뿐 아니라 그에게는 작가라면 작업을 위해서 의당 소지했으리라 생각되는 물건들이 없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거주지가 없으며, 단 한 점의 가구도 소유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마도 추측건대, 그 자신이 쓴 책조차 한 권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빌려서 읽었다. 심지어는 그가 글을 쓴 종이도 새것이 아니었다. 또한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는, 여자들도 그에게는 머나먼 불가능한 존재였다. 마치 그의 글 속, 멀리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어여쁜 소녀, 하지만 도달할 수 없었던 슬픈 소녀들처럼. 그의 삶은 계속해서, 물건과 마찬가지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일관되게 점차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나는 집을 가졌던 많은 작가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사후에 집은 박물관으로 남아 보존되고, 그들의 작가적 필수품들, 책상과 서재, 펜과 안경, 수많은 책들, 우아한 거실, 멋스럽거나 소박한 가구들, 각양각색의 수집품, 먼 외국이나 식민지에서 가져온 기념품들, 산책용 지팡이와 장화 등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유럽인들은 작가의 집과 문학의 공간을 보존하는 전통이 강하다. 거의 모든 도시와 작은 마을에서도, 외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공간도 고스란히 보존되고 연구자들을 위한 자료 아카이브 역할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방문했던 독일의 마을과 도시들에 그런 작가 박물관이 전혀 없었던 곳은 도리어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특별히 열광적인 독자가 아니라 해도 그런 식으로 괴테 하우스와 헤세 하우스, 포크너 하우스를 방문해본 적이 있으리라. 그들은 대개 별도의 주택을 소유할 여력이 있었던 작가들, 중산층이거나 시민계급의 작가들이다. 집이 없었던 작가들, 공동주택에 살았던 작가들의 경우, 시에서는 공동주택 건물 입구에 기념패를 붙여두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베를린에는 그가 한때 형 카를과 함께 거주했던 주택 건물 입구에 기념패가 붙어 있다.
마지막 날까지도 집 없이 셋방을 전전하며 떠돌았던 작가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작가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오직 책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만약 이미 완전히 잊힌 작가에 속하던 그의 작품 재출간을 염두에 두고 1936년 헤리자우 병원으로 찾아간 출판인 카를 젤리히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글과 문학을 끊임없이 언급해준 동시대의 작가 헤세, 그리고 그의 이름을 계속해서 호출해준 다른 많은 문학가들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책 또한 영영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많은 작가들이 그렇게 사라져갔을 것이다.
(카를 젤리히가 헤리자우 병원을 방문하여 그와 함께 산책을 나가려고 허락을 구하는 모습에서 나는 W. G. 제발트의 작품 『현기증. 감정들』에서 제발트가 오스트리아 빈 인근의 소도시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 살고 있는 에른스트 헤르베크를 방문하여 그와 함께 당일로 짧은 소풍을 다녀오는, 독자들로서는 좀 돌연한, 배경이 모두 삭제된 기이한 에피소드로 들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헤르베크 역시 34년 동안을 정신병원에서 살았던 시인이다.)
타이프라이터는 없었지만 그는 필체가 좋았다. 캘리그래피처럼 멋진 필체는 그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으로 쓰기는 그에게 오른손의 심신성경련을 가져왔고, 이후 그는 펜을 포기하고 연필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사후 발견된 500여 장의 종이에는, 크기가 최대 3밀리 정도인, 해독 불가능할 만큼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사람들은 비밀암호로 기록한 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기가 아니었고, 암호도 아니었다. 그의 최후의 작품에 해당하는 그 미세 필체의 원고 『마이크로그램』 중에는 그의 마지막 소설인 『도둑』도 포함된다. 그것은 평생 동안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글을 최대한 작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의. to be small and to stay small(『야콥 폰 군텐』 중에서). 상징적인 흔적이었다.
* 위 글은 <산책자> 속 옮긴이의 말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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