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 “외면과 내면도 결국 ‘나’ 안에서 존재”
'지대넓얕’의 채사장, 『열한 계단』을 펴내다
아주 우연히 삶이라는 긴 순간에 하고 싶은 것과 돈이 일치된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만, 이건 금방 지나갈 거라고 생각해요. 짧게 주어진 맑은 날이니 잘 지내다가 비가 오고 흐려지면 잘 견뎌보려 합니다.
지난 2월 11일, 흰 물결 아트센터 화이트홀에서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 함께하는 『열한 계단』출간 기념 북 콘서트가 열렸다. 지난 12월 출간된 『열한 계단』은 “무슨 책을 읽고,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왔기에 오늘에 이르렀나요?” 라는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대넓얕’ 네 명의 작가 중 채사장의 삶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와 더불어 그가 공부한 문학, 종교, 철학, 과학, 역사, 경제, 예술까지 전 영역을 아우르는 계단들로 책이 구성되었다.
팟캐스트 1위에 빛나는 ‘지대넓얕’답게 추운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500여 명의 독자가 그의 책을 손에 꼭 쥐고 한자리에 모였다. 화이트 홀 1,2층 모두 독자 및 팟캐스트 청취자들로 채워졌으며, 북 콘서트와 동시에 팟캐스트 방송도 시작했다.
네 명의 패널, 각자의 삶을 말하다
『열한 계단』의 저자 채사장뿐만 아니라 김도인, 깡쌤, 독실이까지 지대넓얕 패널들이 총 출동한 북 콘서트는 ‘내 인생의 계단’ 이라는 첫 번째 주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채사장은 인생에 대한 보편적 이미지를 ‘계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대넓얕’ 멤버들이 가진 각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김도인 : 저는 인생에 대해 ‘어둠이 있으면 그 안에서 내가 길을 만들어 가는 거다’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어요. 제가 인생에 대해 이렇게 자각한 건 고등학생 2학년 때 같아요. 학창시절에 삶에 대한 의욕 없이 무기력하게 숨만 쉬고 있는 아이였는데, 그때 명상을 처음 시작하면서 ‘내 삶에 출구가 있다, 힘든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자각했어요. 당시 하교하면서 무기력하게 숨만 쉬며 걸어가고 있는데, 동네 광고에 ‘명상, 행복한 삶을 꿈꾸게 해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있었죠. 그걸 보고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며 따라갔고, 그 길로 명상을 시작했어요.
대화 주제가 『열한 계단』으로 옮겨지며,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계단에 대해 각자 이야기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깡샘 : 가장 인상 깊었던 계단이 첫 번째 계단입니다. 왜냐면 첫 번째 계단에서 채사장이 겪은 경험과 똑같은 경험을 저도 똑같은 책에서 느낀 적이 있어요.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처음으로 목도했던 때를 말이다. 견고하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삶의 방향을 크게 바꿔야만 했던 시점. 나의 무기력한 일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 영혼의 골방에 깊은 균열이 났다’ 라는 부분이요. 채사장은 고등학생 2학년 때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하는데, 저는 고등학생 1학년 예비소집일 날 『죄와 벌』을 읽고 똑같은 경험을 했어요.
『죄와 벌』의 줄거리를 설명해 드리자면, 19세기 말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에요. 당시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도입되어 황금만능주의, 쾌락주의에 물들어 있던 시기이며 동시에 극심한 빈부격차가 있던 때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동네 악덕 사채업자 할머니가 탐욕을 위해 가난한 사람을 해코지하는 버러지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며 할머니를 살해해요. 하지만 주인공은 죄책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아픈 의붓어머니, 가난한 의붓동생을 위해 매춘부가 된 소냐를 만나죠. 『죄와 벌』은 소위 말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엉망진창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소설 속 사람들의 탐욕, 무능, 위선, 타락을 보면서 우리 인생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 느끼며, 채사장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어요.
채사장 : 누구나 사회질서, 도덕, 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 자신의 신념으로 거부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서 충격받았어요.
깡쌤 : 기성세대에 찌들어 있고, 자기 정당화를 하고 그걸 실천에 옮겨 살인까지 저지르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관점에서 책을 읽으며 ‘내가 믿어온 세계가 꼭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구나, 부조리도 있구나’ 느꼈어요. 삶의 부조리, 인생의 전반적인 부조리함을 그때 처음 깨닫고 문제의식이 생겼죠. 이 부조리한 인생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깊게 빠져든 분야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책이에요. 부조리한 인생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니까요.
채사장 :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문제 해결 방식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법이나 질서에 기반을 둔 해결이 아니라 영웅, 범인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요. 평범한 사람은 법과 질서를 극복하지 못하는데 영웅은 법과 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그게 허락되어 권리와 의무를 진 사람이잖아요.
깡쌤 : 하나의 비겁한 사람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 이상향을 위해선 비도덕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부도덕한 사람을 비판하겠지만 다음 세대는 칭송할 거예요. 작금의 현실도 부도덕하고 뒤엎고 싶지만 우리는 힘이 부족해 당해야 하잖아요. 요즘을 보면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도인 : 로자의 방식은 문제가 있다 생각해요. 한 개인을 보더라도 습관을 바꾸는 게 오래 걸리는데, 사회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한국 현실에 대입해 보면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정의, 법을 어겨서 일어난 일인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 상대와 똑같은 방법을 저지르면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어요. 절차를 지키며 해결하는 과정에서 처벌이 빨리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굉장히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거예요. 설사 현실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한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바꾸려는 건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조정하는 게 타당하다’는 인식이 깔린 거예요. 그런 생각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걸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아주 위험한 인식이죠.
깡쌤 : 이런 소설, 책 한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지는 계기가 있어요. 그런걸 보면 정신적 성숙이라는 게 되게 우연한 기회로 오는 듯 해요. 이런 점이 책을 읽으면서 의미 있었고, 20년전 추억을 회상할 수 있어 좋았던 첫 번째 계단이었어요.
소설 『죄와 벌』의 줄거리부터 사회적 선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영웅에 관한 각자의 견해까지 깡쌤에게 의미 있던 첫 번째 계단을 두고 많은 대화가 이어졌다. 이후 김도인에게 의미 있던 계단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김도인 : 여덟 번째 계단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해요. 채사장님 인생에서 교통사고가 났던 부분이요. 채사장의 구체적인 인생 경험을 우리가 똑같이 겪을 수는 없지만, 공통으로 이 부분을 읽으며 인생에서 자기가 믿던 세계가 무너졌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여러 가지 인생의 역경을 겪으면서 극단적인 곳까지 오면 자신이 ‘믿는 세계’를 잃는 상황이 와요. 저도 2010년도에 이런 경험이 있었는데, 길을 걷는 것조차 잘 못할 정도로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왔어요.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은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에서 누군가 와서 ‘너는 꿈을 꾼 거니까 일어나’ 라고 깨우는 거 같아요.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과 대화조차 잘 안 돼요. 내가 길을 건너면 안전하게 건널 수 있고 차들은 멈춰 줄 거라는 당연한 믿음이 없어져요.
부처의 이야기 중에서 외아들을 잃어버린 남자가 나와요. 외아들이 죽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채로 떠돌아다니다 부처를 만나죠. 부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과 고통, 근심 두려움이 생겨난다’ 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흔히 싫어하는 슬픈 감정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자 남자가 비웃어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는 사랑과 행복, 기쁨만이 생겨난다 하면서요. 그러자 부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는 슬픔과 괴로움, 고통이 생겨난다’고 다시 말해요. 인생에서 미리 사소한 상실을 경험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견뎌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마지막엔 인생에서 결국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릴 텐데 그땐 아주 힘들 거에요. 앞으로 인생에서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텐데 이것들을 견뎌내고 버텨 내는 걸 일상 속 사소한 것을 잃어버림으로써 배웠으면 좋겠어요.
채사장 :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긍정적인 면만 보는데, 삶이 나중에 그걸 빼앗아 갈 때 반드시 고통을 주니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거군요. 내가 기대한 행복이 없어질 수 있고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습관화시키고 미리 알고 있으면 극단적인 공포나 좌절을 주지 않는 것처럼요.
김도인 :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던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는 것 때문에 충격을 받는 거 같아요. 행복한 일을 마음껏 누리는 것도 좋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상실이나 괴로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봄으로써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다채롭고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도 왜 슬픈 생각을 해야 하냐고 물어볼 수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인생에서 갖고 싶은 걸 죽을 때까지 유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건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요. 이건 누구한테나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미리 바라보는 기회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채사장이 말해주는 『열한 계단』 의 결말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후 ‘작가의 말’ 이라는 세 번째 주제로 북 콘서트의 2부가 시작되었다. 앞서 1부에서는 ‘지대넓얕’ 패널들의 이야기를 주로 들었다면, 이번에는 『열한 계단』의 저자 채사장이 평소 가졌던 궁금증과 그가 독자들에게서 듣고 싶은 반응들을 이야기했다.
채사장 : 1부에서 각자에게 의미 있는 계단을 꼽아주셨는데, 저는 열한 번째 계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깡쌤 : 순환과 고통이 집대성된 게 열한 번째 계단이 맞나요?
채사장 : 네, 첫 번째 계단은 열한 번째 계단에 가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변증법을 차용해 목차를 만들었어요. 정신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가를 헤겔이 얘기해준 게 변증법이죠. 어린 정신은 나의 반대, 나의 여집합에 대해 상상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입니다. 나와 정반대되는 거울 앞에 서서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모순과 문제를 느끼고 그걸 통합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이 반복된 과정을 거치는 것이 변증법입니다.
‘결론은 이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과 죽음을, 나와 외부를, 자아와 세계를 통합하는 구심점이다’ 라고 결론이 나와요. 이러한 결론을 내기 위해 첫 번째 계단부터 밟아온 거예요. 처음에 삶과 죽음을 통합한다고 되어 있는데, 과학적 증거의 여부를 떠나서 가정을 해보자는 거죠. 만약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몸은 죽지만 우리의 의식은 꺼지지 않는다고 심리적 가정을 해봅시다.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 의식이 존재하고, 무언가를 계속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사후가 있고 삶이 되돌아온다면 ‘계속 깨어있는 존재가 있겠구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두 양면일 뿐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열 번째 계단에선 ‘아트만이라는 의식과 브라우만이라는 세계 전체가 동일한 거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삶과 죽음도 나 안에서 통합이 되고, 세계와 자아도 나 안에서 통합이 되는 거에요. 나의 외면과 내면도 결국 ‘나’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자, 제 인생에서 내린 결론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바다에 경계가 있다고 믿은 것처럼 우리는 내가 죽으면 죽음이 경계일거라 생각하고, 내가 소멸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 경계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경계가 없을 수도 있어요. 경계가 없으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의미하지 않기에 경계가 없으면 출구도 없는 거예요. 우리가 자아라는 것을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누군가 저의 이 의견에 대해 리뷰를 달아주기를 원했어요.
열한 계단채사장 저 | 웨일북
어떤 지식은 한 인간의 지평을 넓히지만, 어떤 지식은 오히려 그를 우물에 가둘 수도 있다. 불편한 지식만이 우물을 파는 관성을 멈추게 하고, 굳어버린 내면을 깨트리고, 나를 ‘한 계단’ 성장시킬 수 있다. 이 책은 어느 평범한 인간이 난생 처음 책을 읽고, 질문을 만나고, 깨달음과 깨부숨을 반복해가며 한 명의 지식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생생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