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서 비롯된 그림 이야기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가가 따로 있지만 근대 이전엔 부와 권력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었다. 로마 시대의 황제, 중세 종교 시대의 교회,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들이 바로 정치의 주체였으며 그들이 주문한 초상 조각, 제단화, 궁정화 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그들의 정치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대에 맞지 않게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건 거기에 표가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 기간 중 환경미화원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을 TV 광고로 내보냈다. 수레를 끌고 눈 쌓인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는 환경미화원이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언덕에 오르는 내용이다. 환경미화원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으로, 이 효과는 적중하여 서민의 땀과 눈물이 그의 표로 직결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헤어스타일이나 애니메이션이 국회 연설문보다 더 정치적이고 더 효과적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소 비교 화법을 즐겼다. 그중 이런 비교가 있다. 여기 불구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맹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귀머거리다. 만약 네가 이러한 불구자 중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어떤 쪽을 택하겠느냐. 당연히 귀머거리를 택할 것이다. 맹인이 훨씬 불편하기 때문이다. 다 빈치는 이 비교를 통해 시보다 회화가 우위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음송하는 시는 귀를 통해 전달되고 회화는 눈을 통해 전달되니, 회화가 더 우위라는 것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다. 사람의 다섯 감각 기관이 발휘하는 정보 파악 능력 중 눈을 통한 것이 8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참으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시각은 수집하는 데이터의 양도 많거니와 이를 순간적으로 통합하는 우리 뇌의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한다. 헤어스타일과 애니메이션이 더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도 바로 이 시각 작용 덕분이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이 큰 시각 매체는 아마 TV일 것이다. 그러나 TV나 영화, 사진이 나오기 전에는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동상이나 교회의 벽화나 제단화가 그 역할을 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좁고 어두운 집에 살던 옛 유럽 사회에서 도시 한복판의 광장이나 교회에 놓인 시각 매체들은 영웅을 만들고, 심판자를 만들고, 이를 대중의 의식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유럽의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그 결과물들이다.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교황의 초상을 보며 라파엘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광장에 놓인 다비드 상을 보며 미켈란젤로의 인체 묘사에 감탄한다. 심지어 교회 안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도 화가의 예술성을 찾는다. 맞다. 이 작품들이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관광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이 작품은 꼭 보라고 친절히 안내해주는 이유는 그것이 인기 있는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품이 제작된 시대에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필요에 의해 주문 제작된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큰돈이 드는 미술품의 주문자들은 바로 권력자들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가가 따로 있지만 근대 이전엔 부와 권력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었다. 로마 시대의 황제, 중세 종교 시대의 교회,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들이 바로 정치의 주체였으며 그들이 주문한 초상 조각, 제단화, 궁정화 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그들의 정치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관심을 가지고 『국회보』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다시 정리하고 보완하여 이루어졌다. 이를 관점에 따라 7부로 나누어 보았다.
1부 ‘권력과 이미지의 어떤 관계’에서는 주로 권력을 쥔 주체가 자신을 높은 존재로 인식시키고자 제작한 이미지들을 주로 다루었다. 스스로 베누스의 후예라고 신화화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정의의 혁명으로 역사에 등장했다가 황제에 등극하며 제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도상으로 자신을 나타낸 나폴레옹 등 정치가가 권력을 위하여 어떻게 이미지를 사용했는지 그 예들을 볼 수 있다.
2부 ‘예술가의 눈으로 본 폭력’에서는 19세기 이후 미술가들이 주문생산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으로서 이미지를 제작한 시대를 살핀다. 이 시대 작품에서는 작가들의 비판의식을 볼 수 있다. 폭력을 고발한 고야, “예술은 장식품이 아니라 무기”라고 발언한 피카소 등. 그러나 근대 이후라고 해서 작가들이 언제나 자유로웠던 건 아니다. 정치의식이 투철했지만 직접 비판할 수 없었던 마네는 무심한 척 시니컬하게 프랑스를 비난하고, 중국의 현대 작가 웨민쥔은 웃는 자화상의 가면 속에 정치비판을 숨기고 있다.
3부 ‘종교라는 이름의 정치’는 종교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치성을 다루었다. 어느 교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천당과 지옥, 내세의 구상은 과연 내세를 위한 것일까. 당대의 사회구조를 세심히 들여다볼수록 이는 현세를 지배하기 위한 공포조장의 정치는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그리스도교 사회였던 유럽의 중세와 근세에서는 무슨 일이든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메디치가는 자신의 가문을 미화하기 위해서 동방박사로 변신한다. 반면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던 안트베르펜의 브뤼헐은 종교화 속에 침묵의 저항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내보인다.
4부 ‘다시, 시선의 방향성을 찾다’는 다른 측면에서 재해석해야 할 작품들을 모았다. 이미 가치가 확정되어 흠모의 대상이 되었지만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주변에서 중심을 바라볼 때 달리 보이는 작품들이다. 서양미술사의 개설서 첫 번째에 실리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그 뚱뚱한 여인상을 비너스라 불러야 할까. 또 19세기 문화를 주도한 프랑스의 소위 순수회화들이 지닌 제국주의 시선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5부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는 이미지가 지닌 가장 큰 역할인 기록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는 권력자의 뜻에 달렸다. 이집트를 통일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이집트를 정복한 상이집트의 나르메르 왕은 자신의 승리를 기록했고,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출신의 윌리엄은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기록했다. 이미지의 역사 또한 승리자의 역사임을 드러낸다.
6부에서는 ‘여왕의 초상화’를 짚어본다. 영국은 많은 여왕들을 배출했다. 놀랍게도 이 여왕들의 시대에 영국은 가장 번성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여 해군 국가가 되고, 그 힘으로 2~3세기 후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여왕들은 강인한 남성상과는 이미지가 달라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피의 역사 위에 등극했지만 순결 이미지의 아우라를 만들어야 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가장 침략적인 제국의 여왕이지만 자신을 다소곳한 중산층 부인의 이미지로 나타내야 했다.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에서 원하는 여성 이미지를 표방해야 했기 때문이다.
7부는 ‘그림, 이상을 펼치다’다. 그림은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며 그림을 통해 이상세계를 꿈꾸기도 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영국과 스페인은 루벤스의 그림을 통해 평화 외교를 하고, 시에나의 9인 정부는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벽화를 주문하며 좋은 정부를 꿈꾼다.
이 원고들을 쓰던 2~3년간, 나는 미술작품 속에서 정치 이슈를 발견하는 대로 주제를 정해 글을 써내려갔다. 그러나 내 맘대로, 내 추측대로 쓰지는 않았다. 그동안 주로 논문을 써오던 글쓰기 습관 덕이다. 궁금한 문제에 대해 최대한 검증하고, 다른 연구자들의 다양한 연구 결과를 내 시각에서 모으고, 요약했다. 각 주제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했으니 그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셈이다. 미술사에서는 이미 논증된 학설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아직 덜 알려진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쉽게 풀어 전하고자 한다. 지하철에서, 잠자리에서 한 꼭지씩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글, 그러나 진지한 읽을거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막상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려니 아쉬운 점이 많다. 필자가 서양미술사 중 중세와 근세 전공자라서 많은 주제가 근세 이전에 편중되었다. 서양의 현대, 아시아, 한국 등의 미술에서도 정치성을 논할 주제가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방면 학자들의 글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문장들도 부끄럽다. 특히 『국회보』에 연재했던 글들은 원고 매수와 이미지 게재의 제한으로 너무 압축된 느낌이다. 또한 논문 문체가 여전히 남아 있는 점도 아쉽기만 하다. 이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단행본으로 엮어주신 아트북스에 감사드린다. 정민영 대표님, 손희경 편집장님, 그리고 이 책의 시작부터 편집, 교정까지 꼼꼼히 봐주신 김소영, 장영선 님, 북디자인을 맡아주신 강혜림 님 등 함께 책을 만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더불어 이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음도 밝히고 싶다. 특히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참고문헌들을 최대한 빨리 공급해준 목원대학교 도서관 직원들, 길미정, 정소연, 김영림, 권종학 님, 궂은일을 도맡아준 대학원생 김소연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2016년 싱그러운 계절에
이은기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이은기 저 | 아트북스
이미지가 곧 돈과 권력으로 귀결되는 시대, 권력은 미술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으며, 미술은 시대의 물음에 어떻게 응답했을까. 딱딱한 정치와 말랑한 미술, 서로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야를 접목해 그림이 말하는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흥미롭게 풀어가며 미술 속에 숨겨진 정치성을 좇는다.
관련태그: 정치, 그림, 이미지,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 예술, 미술
<이은기> 저16,200원(10% + 1%)
인간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권력을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미술 대다수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찬미를 바탕으로 더욱 풍성해졌다. 신화나 성경 속 주인공 혹은 영웅들이 예술의 중심 소재가 되었고 종교와 예술이 유착하게 된다. 이후 왕권이 강해지면서 예술가의 주 고객층은 교회에서 왕과 귀족으로 옮겨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