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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의 톡투유>, 토크콘서트를 안방에 가져오다
스스로 외연을 한계 짓지 말라 (3)
“한계를 넘으라”는 말은 종종 기존의 영역에서 보다 훌륭한 결과를 낳으라는 의미로만 해석되곤 한다.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보다 더 자극적인 요소를 첨가하거나 인력과 시간을 쥐어짜내는 식으로 경쟁의 치열함을 높이는 방식으로 한계를 넘으려 든다. 하지만 때로 그 말은 다른 방식으로 음미되어야 한다.
(“시사가 장르물의 문법을 입는 순간. <그것이 알고 싶다> - 스스로 외연을 한계 짓지 말라 (2)”에서 이어집니다.)
2009년 10월, 김제동은 5년 동안 지켜왔던 KBS <스타 골든벨> 진행석에서 갑작스레 하차해야 했다. 비슷한 시기 MBC에서 파일럿으로 진행한 토크쇼 <오 마이 텐트> 또한 정규편성이 불발됐다. 사람들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가 TV에서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김제동 자기 자신은 “방송 형식의 변화에 맞춰 진화해 나갈 수 있는 적응력과 탄성을 보여주지 못”한 때문이었다 설명했지만(<씨네21>, [김혜리가 만난 사람] MC 김제동, 2010년 1월 18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 외에도 “정치적인 외압” 이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2009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의 사회를 보고 5개월 만에 터진 일들이었으니까.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지시로 서울지방경찰청이 민간인 불법사찰을 진행했으며 사찰 대상자 명단에 김제동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2012년 밝혀진 바 있다.) 김제동의 흔적을 TV에서 찾아보는 건 갑작스레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같은 해 12월 그는 토크 콘서트를 시작한다. 150석 규모의 자그마한 소극장,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가 너무도 좁아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 묻은 티끌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석연치 않은 하차를 겪은 김제동이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한다 여겼고, 그가 공연 포스터를 위해 지어 보인 여러 가지 표정 중에서 하필이면 시무룩한 표정만 콕 집어 주목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김제동은 무대 위에서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무대 위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였고, 본디 많은 관객들과 함께 즉흥적인 상황 속에서도 능란하게 대화를 나누는 재주로 유명했다. 그가 방송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KBS <윤도현의 러브레터>와 KBS <폭소클럽> 모두 짜여진 대본 플레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코너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오히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곳으로 돌아간 셈이다.
2009년, 김제동의 첫번째 토크 콘서트 포스터.
이 때 이미 <톡투유>의 얼개는 완성되었다 봐도 좋을 것이다.
<김제동 토크 콘서트 노 브레이크> ⓒ 다음기획. 2009~
훗날 김제동이 선보이게 될 JTBC <김제동의 톡투유 - 걱정 말아요 그대>(이하 <톡투유>)의 특징 중 대부분은 거의 이 때 대부분 정리됐다. 매 공연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해 놓고 그에 대해 김제동과 관객들이 번갈아 가며 마이크를 잡는 형식이나, 사전에 관객의 사연을 받아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게스트를 초대해도 대화의 주제를 게스트의 삶이나 신곡 혹은 신작 드라마로 잡는 게 아니라 그 날의 주제에 국한해서 이야기하는 식의 공개 토크쇼. 그 날 대화의 주제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하기 위한 준비는 어느 정도 갖추되, 정해진 대본에 의존하지 않고 즉석에서 관객들의 이야기를 받아 대화의 흐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함 등등. 이런 특징 때문에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는 자주 정해진 시간보다 한 시간에서 심하면 두 시간까지 오버되곤 했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를 매진시켰다. 일방적인 청취가 아니라 대화의 형식을 띈 그의 공연은 신선한 포맷이었고, 그 포맷의 생명력은 이후 매년 시즌을 이어오면서도 그치지 않는 매진 행렬로 입증됐다.
성공적인 포맷을 보면 TV에 차용하고 싶은 것이 TV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의 생리다. 당연히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 또한 몇 차례 TV로의 이식이 시도됐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핀트가 맞지 않았다. 기존 TV 토크쇼의 관습은 모셔온 게스트에게 대화의 초점을 맞추는 구조인데,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 포맷은 그 대화의 초점이 끊임없이 게스트로부터 MC에게, MC로부터 관객에게, 이 관객에서부터 저 관객에게로 옮겨가는 구조였다. 방송사의 입장에선 치열한 섭외 경쟁과 출연료를 투자해 기껏 게스트를 모셔와 놓고는 그를 수많은 화자 중 한 명 정도로 취급한다는 건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구조였으리라. Mnet에서 파일럿 촬영을 하며 그 실황을 공개했던(그러나 끝내 편성이 불발된) <김제동쇼>(2010)는 관객보다는 초대손님 비에게 보다 더 많은 초점을 맞춘 형식을 취했고, 2015년 김제동과 499명의 관객들이 MC 역할을 한다는 콘셉트로 그 포맷을 변경한 SBS <힐링캠프> 또한 결국 초대된 게스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구조를 피할 수 없었다. 포맷이 온전히 옮겨오지 못하고 관객에게 마이크 배분의 기회를 더 준다는 외피를 가져오는 것에 그치자,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 특유의 활력 또한 화면에서 사라졌다.
<톡투유>가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면서 방송 1주년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TV 토크쇼의 관성을 깼기 때문이다. <톡투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들의 특징을 죄다 공유하는 동시에, 일반인 관객들만 있을 때 자칫 템포가 처질 수 있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제를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도와줄 전문가 패널들을 배치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여타의 TV 토크쇼와는 달리 초대손님은 방송 20분 지점을 통과한 이후에야 소개되고, 그 이후에도 특별히 대화의 주빈으로 대접 받는 게 아니라 대화의 참여자 중 한 명으로만 대접받는다. 익숙한 TV 토크쇼의 관성을 깨고 흡사 토크 콘서트 실황 녹화 중계와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톡투유>는 여타 프로그램들이 실패해 온 김제동 토크 콘서트의 TV 이식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흡사한 포맷으로 개편했던 <힐링캠프>가 폐지되는 동안 <톡투유>가 그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건 비단 <톡투유>가 해당 포맷의 선발주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TV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예인 중심의 토크쇼 포맷의 영역을 넘어, 관객이 주인공이 되는 토크 콘서트 포맷을 고스란히 이식해 온 것이 <톡투유> 성공의 핵심이다.
무대가 아니라 객석으로 직접 들어가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김제동.
그가 오래 전부터 이미 완성해 놓은 토크 콘서트 포맷은 <톡투유>를 통해 TV에 이식됐다.
<김제동의 톡투유 - 걱정 말아요 그대> ⓒ JTBC. 2015~
“한계를 넘으라”는 말은 종종 기존의 영역에서 보다 훌륭한 결과를 낳으라는 의미로만 해석되곤 한다.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보다 더 자극적인 요소를 첨가하거나 인력과 시간을 쥐어짜내는 식으로 경쟁의 치열함을 높이는 방식으로 한계를 넘으려 든다. 하지만 때로 그 말은 다른 방식으로 음미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영역, 우리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갇혀서 뻔히 보이는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 포맷이 그 원형을 완성한 것은 이미 7년 전의 일이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TV에 옮기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 낸 <톡투유>의 사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