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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가 장르물의 문법을 입는 순간. <그것이 알고 싶다>

스스로 외연을 한계 짓지 말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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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밤에까지 암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을 잡아 세우려면, 결국 “진실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마리텔>, TV가 인터넷의 문법을 수용한 순간 - 스스로 외연을 한계 짓지 말라 (1)”에서 이어집니다.)
 
태생부터 MBC <PD수첩>이나 KBS <추적60분>과는 그 궤가 다른 프로그램이긴 했다. 사건 사고나 우리 사회 비리에 포커스를 중점으로 맞춘 <PD수첩>과 <추적 60분>과는 달리,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그 위에 오컬트 장르도 함께 끼얹어 버렸으니 말이다. 어딘가 연극적인 서재 세트 안에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목소리로 시청자들에게 말을 건네던 초대 진행자 문성근의 존재는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와 같은 영미권 미스터리 프로그램에서 차용해 온 것이고, 소재도 일단 ‘미스터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죄다 아울렀다. 1991년 이형호 군 유괴 살인사건부터 UFO와 드라큘라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훗날 <토요 미스테리 극장>(1997~1999)으로 미스터리 분야가 따로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는 태생부터 조금은 오락적인 성향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던 셈이다. 그런 탓에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시사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이름은 <PD수첩>이었다. 그 뒤를 <추적60분>이 따랐고, <그것이 알고 싶다>이 이들보다 앞서 호명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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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미국 ABC < Ripley’s Believe it or not! >(1982~1985)의 진행자 잭 팔란스.
우측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초대 진행자 문성근.

 

 

태생부터 남들과는 달랐던 프로그램
새로운 시도를 꺼릴 이유가 없었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초반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MBC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흉흉해 질 무렵, 제일 먼저 철퇴를 맞은 건 시사 프로그램들이었다. <PD수첩>의 제작진은 다양한 핑계로 징계를 당하거나 다른 프로그램으로 전출되었고, 개중 몇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국제 시사를 다루던 <세계와 나 W>, 뉴스의 이면을 다루는 <후 플러스> 등은 시청률의 논리로 폐지됐고, <시사매거진 2580> 또한 다 제작한 프로그램을 상부의 지시 탓에 방영할 수 없는 사태가 터지기도 했다. KBS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추적60분>은 제작진의 절반이 한 번에 물갈이가 되는가 하면 특정 장면들을 삭제하라는 압박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언뜻 생각하기엔 이 시기에 <PD수첩>과 <추적60분>을 즐겨보던 이들이 자연스레 압박에서 자유로웠던 <그것이 알고 싶다>으로 몰려갔을 것이라 추측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무렵 <그것이 알고 싶다>는 당시 토요일 밤 11시로 단독 편성되자 마자 토요 예능 시청률 1위에 등극한 MBC <세바퀴>와 경쟁해야 했고, 심할 때는 <세바퀴>에 트리플 스코어로 지곤 했다.

 

그 시기 젊은 PD들로 팀을 교체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프로그램을 더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결의를 다졌다. 시간대는 심야 예능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각종 해외 수사물과 추리물에 길들여진 젊은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더 세련된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택한 길은 미스터리 콘셉트를 밀었던 초창기의 정신으로 돌아가되 영상은 더 세련되게 다듬는 길이었다. 더 이상 귀신이나 저주 받은 집과 같은 오컬트적 소재를 다루진 않지만, 비리나 사건 사고를 다루면서도 스토리텔링 적인 요소를 강화한 것이다. 다른 시사 프로그램들이 사건 자체를 직관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서두를 뗄 때, <그것이 알고 싶다>는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이 그렇듯 사건의 주변부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불온한 균열로 변곡점을 그리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주는 것으로 서두를 뗐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전진배치 시킴으로써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TV 앞에 붙잡아 두는 전략이었다. 정통 시사 프로그램이라면 쉽게 택하기 어려운 길이었을 테지만, 애초에 미스터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으로 출발한 <그것이 알고 싶다>였으니 딱히 피할 이유도 없었다.

 

 

시사 프로그램 아닌 장르물 벤치마킹
과감한 시도가 외연을 넓혔다

 

화면 구성이나 미스터리 검증 방식도 철저하게 젊은 감각으로 재무장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도면을 구해 고스란히 세트로 구현하고, 연극적인 재연이 일어나고 있는 한 구석에서 관찰자 김상중이 걸어 나와 화면 너머에 말을 건네는 식의 연출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시청자들을 사건 한 가운데로 끌어당겼다. 필요하다면 직접 전문가들을 섭외해 실험도 해보고 범죄심리학자들에게 범죄자의 프로파일링을 의뢰하는 검증 방식은 설득력을 높였다. 전문성을 높여 신뢰도를 확보함과 동시에, 정통 시사 프로그램에선 좀처럼 쓰지 않는 세트와 장치들을 동원해 젊은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셈이다. 결과는 효과적이었다. 제작진이 직접 사건 현장과 동일한 조건을 만들어 실험을 해 자살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던 ‘사각 맨홀에 갇힌 진실- 오창 맨홀 변사 사건’(2010년 3월 13일. 제749회)은 아직도 <그것이 알고 싶다> 팬들 사이에선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됐고, 영화 <도그빌>처럼 바닥에 도면을 그려 넣은 마을 세트를 만들어놓고 사건의 시간 순서대로 재연을 진행했던 ‘이백리 실종 미스터리 - 기억, 소문 그리고 거짓말’(2013년 6월 1일 방영. 제896회)는 시청자들의 주목도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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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리 실종 미스터리를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
보는 이들을 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 그 거리로 끌어당기는 듯한
과감한 세트 활용이 압권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 SBS. 1992~2016.

 

물론 <그것이 알고 싶다>가 오늘날의 위치에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진실된”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제작진의 노력일 것이다. <PD수첩>과 <추적60분>이라는 경쟁자들의 부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러나 동시간 대 예능과 경쟁하며 시청률 하락을 면치 못하던 프로그램이 방영 18년만에 새삼스레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컬트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기존 시사 프로그램에선 볼 수 없었던 과감한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은 때론 지리하고 자주 답답하다. 주말 밤에까지 암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을 잡아 세우려면, 결국 “진실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같은 장르의 선두주자들을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각종 추리 수사물의 장르적 스토리텔링을 도입했고, 지금은 예능프로그램 경쟁이 치열한 토요일 밤 11시에 시사 프로그램으로 동 시간대 1위를 차지하는 자리에 올랐다. “시사 프로그램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시도가, 결국 시사 프로그램의 외연을 넓힌 셈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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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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