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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말할 테니 지금은 이해해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꼭 필요한 소통의 필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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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지금은 잠시 연락을 못합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정도의 말 한마디로 족하다. 이 것을 못하는 이유가, 무기력이거나 바쁨이거나 경황없음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무신경한 것’이고 ‘관계적으로 미숙한 태도’다.

노비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 문장)

 

“아줌마, 나는 먹고 살자고 이 안에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일합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그는 앞치마로 두 손을 닦았다.“ 여기서 밤낮없이 일해야 겨우 수지를 맞출 수가 있어요”


-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124쪽

「별 것 아닌데도 도움이 되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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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그런 핑계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어어, 하는 사이에 전세(戰勢)가 이상하게 흘러가더니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가 있다. 웃으면서 악수하고 헤어졌는데 뭔가 찜찜한, 포청천 귀신이 자꾸 “일 대 영” 이라고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 남자들의 사정과 같은, 이런 경우.

 

사례 1

 

A씨와는 공부 모임에서 만났다. 우리는 스스럼없이, 그러나 서로에 대한 예우를 잃지 않고 3년 정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모임 사람들은 우리를 단짝이라 불렀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겠노라며, 안정된 직장까지 그만두고 자격증 시험 준비를 시작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했고 기도했다. 다행히 그는 합격했고 우리는 긴 통화로 기쁨을 함께 나눴다. 나는 시험 준비로 계속 빠졌던 그에게 다음 번 모임 일정을 알려줬고 그는 모두에게 한 턱을 쏘겠다고 전해라, 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문자를 해도 답이 없었고 카톡을 해도 읽기만 했고 전화를 하면 받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에 전화기가 꺼져있기도 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하루키 소설 속의 ‘다자키 쓰쿠루’는 ‘빨돌이’, ‘청돌이’, ‘백순이’, ‘흑순이’ 네 친구에게 영문도 모른 체 버림받고, 거의 6개월을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데, 쓰쿠루 마음이 진정 이해됐다. 다행히 나는 6일 만에 지옥에서 나왔다. 다른 회원을 통해 전해 들은 그의 소식 덕분이었다. 


 “다른 일로 A씨와 통화했는데, 다음 모임에도 불참한다고 하던데?”


그를 향한 내 걱정과 자책은 순간 분노와 모욕감과 배신감으로 변해버렸다. 누구 연락은 씹고, 누구 전화는 받는다는 말이지? 나에게는 한 턱을 쏜다고 하고 남에게는 못나온다고 했다는 말이지?

 

그를 향해 쌓은 3년의 신뢰를 허무는 데는 3 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애써 흥분을 감추며, 최대한 쿨함으로 위장한 체, 그에게 문자 한통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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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연락이 온 것은 3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는 3개월 내내 세상을 나오지 않았다 했다. 모든 것을 걸고 어렵게 자격증을 땄는데, 정작 구직을 하려고 하니 나이 제한에 걸려서 100군데 정도에 낸 이력서를 모두 퇴짜 맞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우울증까지 오는 바람에 누구든 보기 싫었고 세상만사가 다 귀찮았노라고 말했다. 이제 기운을 차리고, 제일 먼저 나에게 연락을 했다는 말에 나는 한동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나의 경망함을 반성했다. 얼마 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라도 용기를 내 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례 2

 

B씨도 그랬다. 사적으로는 사회 친구였고 공적으로는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관계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꽉 막힌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소통의 정체 상태가 반복됐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꽤 친해졌다는 암묵적인 느낌을 교감한 이후였던 것 같았는데, 일과 관련된 것을 쉽게 펑크 내고, 약속 시일을 어기는 일도 잦아졌다. 그렇다고 닦달하거나 정색하고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술 한잔 같이 마시게 되면 어느새 ‘헤헤헤’ 하고 있거나 ‘헤헤헤’ 하고 나면 ‘다 이유가 있었겠지 뭐’ 와 같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번에는 달랐다. 사안도 엄중했고 약속 파기도 상습적이었으며 불통은 너무 오래였다. 차마 말로는 못하겠기에, 몇 번의 재촉 문자를 보냈으나 돌아오는 것은 무응답이었다. 우정이고 애정이고 이러다가는 일도, 사람도 다 잃겠다 싶었다. 나하고 일하는 것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솔직히 말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날 늦은 밤, 그가 전화를 했다.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집안에 문제가 있어, 아내가 사기를 당했어, 그래서 요즘 경황이 없었어. 전화기 너머에서 풀 죽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서에 제출했다며 고소장까지 메신저로 나에게 보내왔다. 하루 종일 그로 인해 속을 끓이던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와 영문도 모른 채 엉겁결에 전달받은 증거물 사진 앞에서 죄인처럼 침묵했고, 어느 새 열심히 그에게 문자를 타전하고 있었다. 기운 내, 잘 될 거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연락해.

 

사례3

 

모르는 남자의 사정도 이야기하자.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수록된 「별 것 아닌데도 도움이 되는」의 빵집 남자의 사정.

 

이틀 후로 다가온 아이의 생일을 위해 엄마는 빵집에서 케잌을 주문하고, 생일날 아침 아이는 등굣길에서 뺑소니 차에 치여 의식을 잃는다. 의사의 낙관적인 말과는 달리 아이는 깨어나지 않는다. 아이의 회복을 기도하며 부부가 집에서 잠시 휴식을 갖던 중 어김없이 걸려온 의문의 전화.

 

“여기 가져가지 않은 케잌 하나가 있어요.”

 

남편은 상대를 자꾸 전화하는 미친놈으로 취급한다. 한편 아내는 “스코티(아들 이름) 일은 잊어버리셨소?”라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서 온 전화로 착각해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결국 아들은 죽고, 이 전화의 주인공이 “주문한 케잌 좀 찾아가라”는 빵집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분노한 아내는 남편과 빵집을 찾아간다. “빵 장수들, 전화질도 밤에 잘하죠. 이 못된 자식아.” 라고 폭발한 아이 엄마와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탓하는 아이 아빠에게서 이틀 동안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용서를 빌며 빵을 내온다.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

 

소설 속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는 미워했던 빵집 주인에게 위로를 받고 들어올 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빵집을 나왔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나는 A씨, B씨에게 오해를 풀었고 지금 표면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노비 문장을 보자. 빵집 주인의 입장에서 케이크를 주문해놓고 찾아가지도 않다가 나흘 만에 오밤중에 씩씩거리며 찾아온 부부는 진상 중의 ‘견(犬)진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향해 빵집 주인은 노비 문장으로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번거롭게 하지 마라, 빵 만드느라 시간과 돈만 낭비했지만 가져가라. 나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케잌 노쇼(No Show)를 낸 고객에 대한 이 주인의 분노는 정당하고 밤에 일하므로 밤에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은 타당하다. 그런데 빵집 주인은 죄인이 되고 용서를 빈다. 왜? 주인의 분노보다 고객의 불행이 더 막중했으므로. 그 막중함 앞에서 주인의 몇 일 동안의 속끓임과 무효화된 노동은 내밀지도 못한 채 폐기돼버리는 명함이 된다.

 

찜찜함과 1:0 의문의 패배, 그 정체는 이것이었던 것이다. 상대의 상황을 몰랐으므로, 알려주지 않았으니 모를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응당 생길 수 있었던 한 사람의 상처와 고통은, 뒤늦게 시도된 상대의 해명으로 인해, 위로는커녕 오히려 속 좁은 자가 벌인 경솔한 행위 취급을 받는 것. 옛날의 정준하 드립대로, 이것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

 

이제 정리.

 

개떡같이 말하든 찰떡같이 말하든 말을 해야 의중을 알고 상황을 안다. 배속에 품고 있는 의중은 똥으로도 나오지 않는 무용함이다. ‘미안한데, 지금은 잠시 연락을 못합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정도의 말 한마디로 족하다. 이 것을 못하는 이유가, 무기력이거나 바쁨이거나 경황없음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무신경한 것’이고 ‘관계적으로 미숙한 태도’다.

 

어른이 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어쩌면 수 많은 A,B 씨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상대는 나보다 상사였거나, 나이가 많았거나, 갑이었거나 어쩌면 나도 무신경과 미숙함으로 누군가에게 그러했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노안의 지점에 도달하니 그때는 적당히 넘겼던 것들이 목에 탁 걸리고, 설령 삼켰더라도 영 소화가 되지 않는다.

 

빵집 주인의 경우처럼 아주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당신의 관계적 태만함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어이없게도 그 상처받은 자가 사과를 하게 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음을, 우리가 자주 생각하면 좋겠다.

 

세상에 비교 당한 후 무시 당할 상처의 경중은 없다. 내가 아팠던 것은, 그냥 아팠던 것이다. 그 아픔은, 너의 고통의 유무와 상관없이 당신이 준 것이고 내가 겪은 것이다. “나중에 말할 테니 지금은 이해해줘”, 이 말 한마디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꼭 필요한 소통의 필수 언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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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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