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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허희 문학평론가 ‘힐링보다 위로’

오가와 이토, 『바나나 빛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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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것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위로니까. 『바나나 빛 행복』은 「리본」 외 나머지 여덟 편의 이야기로 또 다른 여덟 개의 위로를 전해준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꼭 맞는 친구와 만난 기분이다.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함부로 쓰이는 시대다. 아무 데나 힐링을 갖다 붙이는 사람들과는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다. 그들이 힐링과 연결되는 대상을 죄다 아픈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탓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프지 않은 나를 자꾸 아픈 사람 취급한다. 내가 보기에는 힐링 없이 살 수 없는 그들이 더 아파 보이는데도 말이다. 치유나 치료로 번역되는 힐링은, 두 사람 사이를 그것을 해주는 의사와 그것을 받는 환자의 관계로 설정한다. 시혜자와 수혜자의 차별적인 위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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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위도, 누구의 아래도 서고 싶지 않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다. 위로는 의사가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의료 행위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친구가 나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언행이라고 할 수 있다. (힐링에 대한 비판과 위로에 대한 긍정은, 정이현 작가의 『어린왕자』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정이현, <낭만서점 북콘서트 - 고생했어요 당신>, 2015년 12월 22일) 그가 따뜻한 말과 함께 가볍게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인생을 살아갈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친구의 위로는 대가의 힐링보다 힘이 세다.

 

오가와 이토의 『바나나 빛 행복』은 이런 ‘사소한 일상의 달콤한 위로’가 되는 소설집이다. 여기에 실린 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가 나에게는 모두 소중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며 여러 번 읽은 소설이 있다. 이 소설집의 원제이기도 한 「리본」이다

 

이 작품은 조모 ‘스미레’와 손녀 ‘히바리’ 두 사람이 공유하는 비밀스런 우정을 담고 있다. 조모가 손녀에게 쏟는 내리사랑이 아니라, 조모와 손녀가 나누는 우정이라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다. 정말로 스미레와 히바리는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손녀에게 종달새라는 이름(히바리)을 선물하고, 그녀를 꼭 껴안으며 할머니는 선언한다. “스미레와 히바리는 영원한 친구야. 분명히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낼 거야.” 그 말이 예언처럼 이루어진 듯, 초등학생이 된 히바리는 스미레를 할머니가 아닌 친구로서 대하며 ‘스미레짱’이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할머니와 손녀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히바리는 오히려 가엾다고 여긴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나이가 그렇게 차이 나는데 친한 친구라니 말도 안 된다고 입을 삐죽거린다. 그 애들은 같은 나이가 아닌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을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나는 한두 살 가지고 나이 차 운운하는 아이들 쪽이 더 불쌍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스미레짱을 ‘할머니’라고 느낀 적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친구에 대한 편견을 보란 듯이 깨뜨리며,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며 우정을 쌓는다. 스미레와 히바리의 내밀한 공동 작업―이른바 새알 부화시키기 프로젝트는 그래서 시작될 수 있었다.

 

스미레는 어미 새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치된 새알을 자기의 풍성한 머리카락 속에 두어 정성을 다해 품고, 히바리 역시 곁에서 힘껏 스미레를 돕는다. 전심전력을 다한 두 사람 덕분에 마침내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새에게 이들은 두 사람의 영혼을 묶어준다는 의미를 담아 ‘리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스미레와 히바리의 우정의 결실인 리본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리본은 두 사람의 곁을 떠나 하늘로 훌쩍 날아가 버린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리본을 잃은 스미레와 히바리는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그러나 이별의 아픔을 겪으며 히바리는 무엇이 진정 귀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다.

 

“리본이 보물이었던 게 아니다. 스미레짱과 둘이서 알을 품었던 날들과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리본에게 모이를 먹여 주었던 것, 리본과 스미레짱과 셋이서 함께 보낸 시간의 전부가 내게는 보물이었다. 그러니까 보물이 사라진 건 아니다. 보물은 내내 이 가슴에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삶의 진실을 찾은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기묘하게도 나는 내가 대신 어떤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고 느꼈다. 그것의 정체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바로 그때 위로 받았다고 느낀 감정을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이것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위로니까. 『바나나 빛 행복』은 「리본」외 나머지 여덟 편의 이야기로 또 다른 여덟 개의 위로를 전해준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꼭 맞는 친구와 만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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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빛 행복오가와 이토 저/권남희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햇살 빛이 감도는 노란 깃털과 먹물 같은 눈동자를 지닌 새, ‘리본’ 소녀의 손바닥 위에서 기적처럼 태어난 생명은 비밀스러운 과거를 가진 할머니 스미레와 사랑스러운 히바리를 엮어주는 영혼의 끈이 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예술가, 안타까운 추억이 떠올라 왈칵 눈물을 쏟아낸 아빠……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잃어버리고 외로워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작은 온기가 위로가 되어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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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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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나나 빛 행복 <오가와 이토> 저/<권남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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