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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7번 B플랫장조
1943년 모스크바에서 초연했던 곡
이 곡에는 ‘전쟁 소나타’라는 공인된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강철 소나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이 강렬합니다. 듣는 이의 몸을 해머로 두들기듯이 육박해오는 막강한 에너지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20세기 작곡가들을 거론하면서 절대 빼놓고 갈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입니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혁명기의 러시아, 이후의 스탈린 체제를 함께 겪었던 음악가였습니다. 쇼스타코비치보다 15년 연상이지요. 둘 다 20세기의 새로운 음악, 이른바 모더니즘을 지향했던 까닭에 소비에트의 통제적 분위기 속에서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스탈린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3년 3월 5일이었지요. 사인은 뇌출혈이었습니다. 물론 독재자와 음악가의 ‘같은 날 죽음’이라는 사건은 어쩌다 일어난 우연이겠지요.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의 회고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그는 순회연주를 하느라고 그루지아의 트빌리시에 머물고 있다가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는, 아울러 빨리 모스크바로 귀환하라는 당의 전보를 받았지요. 그렇게 당의 명령을 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던 중에, 악천후로 비행기가 흑해 근처의 수후미에 착륙했을 때 선배 음악가 프로코피에프의 부음을 듣게 됩니다.
모스크바에 당도한 리히테르는 독재자의 장례식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혐오스럽고 불쾌한” 연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중얼거리지요.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저 샤워가 하고 싶었다. 스탈린이 죽은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프로코피에프의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리히테르는 생전에 딱 한 편의 글을 써서 발표했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코피에프에 관하여’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일종의 추도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애도를 감상적 필치로 털어놓는 글은 아닙니다. 자신이 겪은 프로코피에프의 인간적 풍모와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게 무뚝뚝하게 털어놓는 ‘증언’이 오히려 더 추모의 진정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 글은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리히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이라는 책에 약 30쪽 분량으로 수록돼 있는데, 가능하면 책을 구해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리히테르에게 프로코피에프는 꽤나 어려운 존재였나 봅니다. “그는 늘 나에게 위압감을 주었다”라는 표현이 서두에 등장합니다. 아마 그 위압적인 이미지는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리히테르는 자신이 열두 살이었던 1927년에 오데사음악원 연주회장에서 프로코피에프를 처음 봤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 홀은 상당히 어두운 편이었다. 키가 크고 팔이 기다란 청년 한 사람이 무대로 등장했다. 그는 유행의 첨단을 걷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바지가 깡똥하고 소매가 짧은 재단이 자못 신기해보였다. (…) 청중에게 인사를 하는 방식도 아주 별났다. 몸이 갑자기 툭 부러져 둘로 나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사에 앞서 정면을 주시할 때나 몸을 구부렸다가 일으키며 천장의 한 지점을 응시할 때나, 그의 눈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에 표정이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고작 열두 살 때의 기억을 거의 30년이 흘러서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요. 리히테르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시각적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글은 곳곳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묘사들이 튀어나옵니다. 원문을 대조해보진 못했지만 한국어 번역도 정확하고 유려하다고 느껴집니다. 프로코피에프는 생전에 두 번 자서전을 펴낸 적이 있긴 하지만, 리히테르가 쓴 이 글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프로코피에프’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용해 보입니다. 아울러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에 대한 리히테르의 기억과 해석이 ‘음악 듣기’에 적잖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리히테르가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했던 음악가 프로코피에프는 1891년 우크라이나의 존트조브카(Sontsovka)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영주의 땅을 관리하는, 우리 식으로 치면 ‘마름’ 같은 일을 했고 어머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접하고 배웠지요. 어머니는 아들의 음악 교육에 상당히 열성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고향인 존트조브카는 예술과 거리가 먼 시골 지역이었지만, 프로코피에프는 여덟 살 무렵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봤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두 편의 오페라와 여러 곡의 피아노 소품들을 습작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당대의 작곡가이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였던 알렉산더 글라주노프(1865~1936)의 권유로 13세에 음악원에 입학합니다. 10년간 이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20대의 그는 <스키타이 모음곡>처럼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어찌 보면 과격한 곡들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거의 동시에 ‘고전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처럼 온건한 작풍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적 연대기는 서구로 떠난 1918년 이전과 이후, 또 옛소련으로 귀환한 1936년부터 세상을 떠난 1953년까지의 세 시기로 나뉘지요. 하지만 각각의 시기를 한두 마디로 특정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서구의 아방가르드들에게 그의 음악은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러시아 전통주의자들의 귀에는 상당히 혁신적이고 때로는 과격하게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초기 음악 중에서 오늘날에도 많이 연주되는 곡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가 있습니다. 이 곡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비교적 편안하게 들을 만한 곡입니다. 두 개의 느린 악장, 또 그 사이에 날카롭고 신랄한 스케르초 악장을 배치해놓은, 모두 세 악장으로 이뤄져 있는 곡입니다. 연주시간도 20여분으로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지요. 특히 1악장의 서정적인 주제 선율,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플루트가 함께 어울리는 실내악적인 앙상블이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코다 부분에서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피아니시모의 마무리도 매혹적입니다. 2악장의 리드미컬한 바이올린 테크닉, 3악장에서 목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바이올린 선율도 인상적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도 “나로 하여금 프로코피에프를 좋아하게 만든 작품은 1번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고백했을 정도지요. 책에 수록돼 있는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뒷날 나는 이 작품이 계기가 돼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좋아하게 됐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이 작품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하다.”
프로코피에프는 1918년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가 2년쯤 뒤에 프랑스 파리로 가서 정착하지요. 그렇게 18년의 긴 세월을 서구에 머물면서 작곡가로서는 물론 피아니스트로서도 국제적 명성을 얻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한 곡으로는 세 곡의 피아노 협주곡(3번ㆍ4번ㆍ5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2번 g단조>, 세 곡의 교향곡(2번ㆍ3번ㆍ4번)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곡은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국에 머물던 1919년 작곡했는데 그가 작곡한 오페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물론 그의 음악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곡을 하나만 꼽자면, 1935년 12월 소련으로 귀환해 이듬해 4월에 썼던 <피터와 늑대>입니다. 마치 한 편의 구연동화 같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피터와 할아버지, 늑대, 사냥꾼, 작은 새, 오리, 고양이, 회색 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적 캐릭터가 숱하게 등장할 뿐 아니라, 음악과 내레이션이 한데 어울리며 진행되기 때문에 유명한 ‘음악동화’로 자리잡은 곡입니다. 아마 요즘에는 애니메이션으로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프로코피에프는 11살과 7살짜리 두 아들이 있었고, 이 음악을 모스크바의 어린이를 위한 5월제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해 초연했지요. “모스크바 아이들과 내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 최종적으로 소개하려는 음악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도 아니고 <피터와 늑대>도 아닙니다. 앞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프로코피에프는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당연하게도 ‘피아노 음악’은 그가 남긴 작품들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부 9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그 작곡 시기가 거의 평생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번은 1907년에, 9번은 1947년에 작곡했지요. 세상을 떠난 1953년에 10번의 작곡을 시도했지만 마무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평생토록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2차대전 시기에 작곡한 세 곡의 소나타(6번ㆍ7번ㆍ8번)를 ‘전쟁 소나타’라고 부르지요. 그중에서도 20세기 피아노 음악의 위대한 걸작으로 손꼽히는 곡이 있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 자주 거론한 피아니스트 리히테르가 1943년 모스크바에서 초연했던 곡이지요. 바로 <피아노 소나타 7번 B플랫장조>입니다. 이 곡에는 ‘전쟁 소나타’라는 공인된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강철 소나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이 강렬합니다. 듣는 이의 몸을 해머로 두들기듯이 육박해오는 막강한 에너지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18분의 비교적 짧은 곡이지만, 오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집중해 듣노라면 심신이 얼얼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모두 세 악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프로코피에프는 1악장에 ‘불안한(inquieto) 알레그로’라는 독특한 지시어를 붙였지요. 2악장은 파워 넘치는 1악장과 달리 느리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감미롭다기보다는 무거운 느낌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3악장은 전체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지요. 마지막 코다의 성난 해머에 얻어맞으면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어질 정도입니다.
이 곡을 초연한 리히테르는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요? 오늘 앞에서 리히테르를 길게 거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1943년 초에 나는 7번 소나타의 악보를 받았다. 이 소나타는 나를 몰아지경에 빠뜨렸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기가 막힌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 소나타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평형을 잃은 어떤 세계의 불안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혼돈과 미지가 지배하는 분위기다. 힘들이 광란한다. 이 힘들은 위협적이고 때로 살인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힘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이 힘들은 계속 존재하며, 인간은 느끼고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리히테르의 연주를 어찌 건너뛸 수 있겠는가. 1959년 옛소련의 음반사 ‘멜로디아’에서 발매했던 연주를 재수록한 ‘Alto’ 레이블의 음반이 현재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리히테르의 연주로는 거의 유일해 보인다. 음악의 심연을 더듬는 출중한 해석가의 연주다. 일련의 ‘전쟁 소나타’ 중의 또 다른 곡인 <소나타 8번 B플랫장조>를 함께 수록했다. 비톨드 로비츠키(Witold Rowicki)가 지휘하는 바르샤바 필하모닉과 협연한 <협주곡 5번 G장조>도 커플링돼 있다.
오래도록 애청돼온 음반이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은 거장 폴리니가 전성기에 어떤 연주를 펼쳤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면 둔중해지거나 템포감을 잃을 수도 있는 난곡의 리듬감을 출중하게 살려낸다. ‘리듬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완벽하다. 조형감과 섬세함은 물론, 에너지도 좋다. 힘과 기교라는 두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수준에 오른 연주다. 특히 3악장에서 전해오는 에너지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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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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