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과 하림, 그림자를 찾아 떠난 여행
『그림자 여행』출간 기념 북 콘서트
작가 정여울과 가수 하림, 문학평론가 허희가 그림자를 찾아 떠났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때로는 나조차 외면하고 싶은 모습들은 그들에게도 있었다.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듯이. 세 사람은 그림자를 은폐하거나 삭제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걷는 방법을 고민할 뿐.
당신의 그림자를 꿰매주는 사람이 있나요?
낯선 이와 친구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먼저 내보이는 것이다. 『그림자 여행』 안에서 작가 정여울은 그렇게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때로는 감추고 싶고, 또 때로는 지우고도 싶었을 모습들을 작가는 덤덤하게 말한다. 이내 독자들은 알게 됐다. 그 이야기가 자신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결국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그림자 여행』은 정여울에게서 시작되어 우리에게 다다랐다.
지난 24일, 정여울 작가는 또 한 번의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 여행에는 가수 하림과 문학평론가 허희, 그리고 『그림자 여행』을 사랑한 많은 독자들이 함께했다.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을 가진 그림자들을 들여다보고,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명확하게 가르기 어려울 만큼 닮아있는 기억들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다. 떼어낼 수도 지워낼 수도 없는 그림자와 부대끼며 살아갈 우리를 위해 작가는 ‘그림자와 함께 걷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림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림자라고 하죠.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억들과 상처들 모두가 그림자를 구성하는 성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죠. 그런데 모두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의 그림자가 있는 것 같아요.”
정여울 작가는 『피터팬』의 그림자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웬디의 집을 처음 찾아오던 날 피터팬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더 이상 그림자는 피터팬의 발끝에 매달려있지도 않고, 피터팬의 움직임을 따라하지도 않는다. 피터팬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림자라는 존재가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거나 분석하려고 하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꽁꽁 숨기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럴수록 그림자는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아요. 마음속의 그림자는 수많은 상처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 통제할 수 없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죠.”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 애쓰는 피터팬의 곁에는 웬디가 있었다. 웬디는 피터팬과 그림자를 바느질로 꿰매 한 몸으로 이어준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웬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웬디처럼 그림자를 꿰매주는 존재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아이의 주변에는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지만 어른들은 스스로 그런 존재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제 경우에는 그 대상이 책인 것 같아요.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책이 나의 그림자를 쓰다듬어줄 수 있을까, 덜 아프게 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거든요. 저는 책을 통해서 웬디와 같은 따스한 손길을 찾는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소서
이어진 작가의 이야기는 “그림자는 상처의 보물창고이기도 하지만 좋은 감정들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심리학자인 융의 말을 빌려 “내면의 그림자와 맞선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림자와 대화하려면 그것을 감추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그녀가 “그림자라는 존재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다.
“『그림자 여행』에는 저의 그림자가 찍힌 사진이 실려 있는데요. 『그림자 여행』을 쓰는 데 기폭제가 되어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런던 리치몬드 공원에서 사슴을 촬영한 건데, 돌아와서 보니까 제 그림자가 더 크게 찍혀있더라고요(웃음). 이 사진을 보고 ‘내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고,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 없는 게 바로 그림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자 여행』에는 여행지에서 작가의 발길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순간들이 담겨있다. 때로 그것은 잊고 있던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엽서에 적혀 있던 하나의 문장 역시 그러했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소서”라는 문장과 만난 후,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끝없이 질문 받는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대체 뭐냐고.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들 때문에 가장 상처받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물론 소중하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많은 것, 너무 대단한 것,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자신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꿈꾸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림자 여행』 156쪽)
책 속에 새겨놓은 구절을 직접 낭독하며 작가는 고백했다. 여행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소서”라는 말을 되새기곤 한다고.
“어쩌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나를 막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의 욕심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욕망이, 나의 무의식이 깨어나는 걸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정말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 여행』은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강인함을 성찰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강연과 낭독이 끝난 후, 정여울 작가는 문학평론가 허희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문학평론가 선후배 출신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TV, 책을 말하다>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해 박완서 작가를 추억하기도 했다.
허희 : 『그림자 여행』에서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는데요.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정여울 : 예전에는 저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제가 공부한 것,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서 그 글들을 다시 보면 제 그림자가 보이더라고요. 제 눈에는 저의 그림자가 보였던 거고, 어떤 분들은 저를 잘 알지 못해도 글을 통해서 제 그림자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저를 보여드린 것 같아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에서 처음으로 ‘나’라는 주어를 자유롭게 썼던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솔직하게 표현하는 글을 쓸까’에 대해서 점점 고민했던 것 같아요. 여행에 대해서도 제가 생각하는 나만의 여행, 여행을 통해서 바뀐 제 자신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닌데, 제 그림자를 많이 보여드리게 되더라고요.
허희 :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신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사랑의 진실성을 체크하는 방법도 ‘그 사람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걷고 싶은가’로 판별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정여울 : 기억을 떠올려 보면 사랑에 빠졌을 때의 특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과 같이 걸어가면 엄청나게 떨리는 거죠. 단 둘이 걸어갈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떨림, 그건 정말 많이 좋아해야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연애 초기에는 그렇죠(웃음). 어느 정도 연애가 성숙했을 때는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데요.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그 사람의 그림자마저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죠. 그러면서 계속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게 진짜 사랑인 것 같아요.
그림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무대에 오른 이는 가수 하림이었다. <월간 객석>의 인터뷰를 통해 정여울 작가와 인연을 맺은 그는 ‘내면의 그림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독자들을 위해 <배낭여행자의 노래> <너의 기억>을 선물해주었다. 그가 노래하는 여행 이야기는 공연 후에도 이어졌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 10』에 실려 전해졌던 정여울 작가의 여행 이야기는 『그림자 여행』에도 담겨있다. 카프카의 무덤, 브론테 자매의 고향 등 작가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거닐었던 여정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허희 : 작가님만의 여행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여울 : 많은 분들께서 ‘어떻게 하면 여행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 물어 오시는데요. 여행을 떠나면서 효율을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여행지에서 나 아닌 또 다른 나와 만나려면 나를 던져야 되는 것 같거든요. 평소에 못하던 일들이나 엉뚱한 일들도 해보는 거죠. 저 역시 또 다른 나와 만나는 여행이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 이끌리듯 떠났던 기억은 하림에게도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악기를 만드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곤 했다. 그리고 정여울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문학작품을 이유로 떠난 여행도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처럼 크레타 섬의 해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기 위해 홀로 크레타 섬으로 향했던 것이다. 물론 하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야기는 『그림자 여행』 안에도 감춰져 있었다.
하림 : 『그림자 여행』에서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 이야기를 읽고 많이 공감했어요. “인간은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끊임없이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면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제멋대로 자랑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늑대는 소유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이익과 손해를 따지며 미래를 예측하지도 않는다. 영장류에게 소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영장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소유의 정도가 아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다.”라는 부분에서 제가 정말 바라는 모습이 늑대의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림과의 만남은 여행에서 시작돼 여행에서 끝을 맺었다. ‘결국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는 깨달음을 담은 <연어의 노래>, 고비사막에서 마주쳤던 낙타를 보고 쓴 <푸른 낙타>, 독자들을 비 오는 세렝게티로 데려가 보고 싶어 선택한 곡 <세렝게티에 비가 오네>, 아프리카를 여행할 당시의 감성을 담은 <해 지는 아프리카>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서 다시 독자들과 만난 정여울 작가는 『그림자 여행』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공감은 시작된다. 이야기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단순한 몸짓에서 인간은 커다란 힘을 얻는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는 저마다 서로의 슬픈 사연을 털어놓음으로써 친구가 된다. (중략) 그들은 저마다 심각한 인생의 타박상을 입었지만 누구도 서로를 타박하지 않는다. 항상 격려하고 서로를 믿고 도와준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줄도 몰랐던 놀라운 잠재력을 끌어낸다. 누구도 야단치지 않고 누구도 군림하지 않는데 서로를 향한 절묘한 리더십이 발휘된다. 그리하여 아무도 권력을 휘둘러 지배하지 않는 세상, 수평적 연대감을 통해서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그림자 여행』 212쪽)
이야기의 끝에서 작가는 덧붙였다.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그림자를 걱정해주고 나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친구를 만든다면, 우리의 그림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것이 작가 정여울과 『그림자 여행』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림자와 함께 걷는 법’일 것이다.
그림자 여행정여울 저 | 추수밭
분명 ‘나’이지만 나도 몰랐던 내 모습,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상처와 아픔을 지닌 나의 일부, 의식의 자아가 아닌 무의식의 자기, 그리하여 진정한 ‘나 자신’이 곧 ‘그림자’이다. 이 책 《그림자 여행》에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삶과 사람,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정여울 저자의 에세이 50편과 그 풍경을 담은 50장의 사진, 그리고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우리 모두의 그림자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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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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