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반전, 오차 없는 감동 레시피 <장수상회>
<장수상회>
<장수상회>는 기대 없이,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강제규 감독이 만든 황혼 로맨스라니 궁금하군, 하는 마음으로 봐야 하는 영화다.
※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을수록 관람하기 좋습니다.
결말이 알려지거나,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담았을 때 리뷰 앞에 경고 문구를 붙이곤 한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써 보았다. 이유는 말 그대로다. <장수상회>는 기대 없이,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강제규 감독이 만든 황혼 로맨스라니 궁금하군, 하는 마음으로 봐야 하는 영화다. 반전이 유출되었다고 영화의 재미와 감동이 딱히 줄어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번 칼럼에서 그 제목을 밝히진 않겠지만 영화의 원안이 되었던 영화를 이미 보았고, 영화 ‘좀’ 본 관계로 초반부에 영화 속에 숨겨진 비밀을 ‘완전’ 눈치 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울어야 할 곳에서 백퍼센트 울었고, 웃어야 할 곳에서는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강제규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감정’은 오롯이, 오차 없이 전달되었다.
강제규 감독 4년만의 복귀작이 황혼 로맨스라니 의아해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하지만 1996년 <은행나무침대>는 전생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가슴 아픈 멜로 SF 영화였고, 1999년 <쉬리>는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첩보 액션물이다. 새로운 장르 속에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성을 담아내어 감동과 재미를 함께 전달하는데 탁월함을 보여준 강제규 감독은 2004년 남북관계 속에 가족의 이야기를 녹여내며 <태극기 휘날리며>로 천만관객을 동원, 자신이 세운 흥행기록을 갱신했다. 하지만 2011년 <마이 웨이>는 승승장구하던 그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사실, 한국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스펙터클을 보여준 영화이긴 했다. 문제는 드라마였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그의 스타일이 빤히 보이는 것이 함정이 되었다. 그런 그가 잔잔한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 이후, 황혼 로맨스를 그린 영화 <장수상회>로 돌아왔다. 얼핏 강제규 감독의 스타일은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영화의 장르는 바뀌었지만, ‘보편적 감수성’을 요리조리 배치하여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그의 영민한 연출 스타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로맨스 가족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장수상회>는 전혀 순진하지 않은, 아주 영리한 상업영화이다.
알려진 것처럼(사실 표면적으로) <장수상회>는 까칠한 고집불통 독거노인 성칠과 이웃집 자상한 할머니 금님의 황혼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여기에 마을 재개발의 유일한 걸림돌 성칠을 설득하기 위한 이웃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치한다. 성칠의 금님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지만, 금님의 의도가 순수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복선은 영화의 전반을 불안하게 떠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어수선하지 않고, 각기 다른 이야기의 축들이 꼼꼼하게 설계되었다. 노련한 연출에 세련된 연기가 더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반전에 앞서 훨씬 더 마음이 짠하게 흔들리는 것은 이야기의 중심에 단단하게 선 박근형과 윤여정 덕분이다. 특히 주로 품위 있는 회장님 연기를 보여준 박근형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깐깐한 독거노인 연기나 소녀감성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윤여정이 보여주는 케미는 너무나 귀여워 사랑스러울 정도다. 상업영화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토양은 없지만, 언제든 만개한 꽃을 피울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나라 중견배우들의 건재하고 알찬 연기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만족스럽다. 여기에 작은 역할이지만 충실하게 제 몫을 찾아 임하는 조진웅, 한지민, 황우슬예, 문가영, 그리고 엑소의 찬열 등 젊은 배우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어수선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한마디로 <장수상회>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충격이 아닌, 감동으로 이어지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가족들이 함께 보아도 좋을,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영화이다. 웃고 싶을 만큼 웃고, 울고 싶을 만큼 울고, 받고 싶을 만큼의 감동을 받아나가면 된다. 그렇게 <장수상회>는 무겁지 않게 노인들의 이야기를 재바르게 품어내면서 달달한 중년 로맨스 영화의 몫을 다해 영화적 재미와 감동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영리해서 정이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딱 울어야 할 순간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감정이 치사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노련하게 훈훈한 온기를 담아낸다. 하지만, 묵직하게 노인들의 삶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진 않는다. 영화 속 대사처럼 자식들은 가슴에 품어야 할 묵직한 돌덩이 같지만, 반대로 늙고 병든 노인은 당장에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인 것은 오늘의 현실이지만, 영화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장수상회> 속 마을 공동체 모두가 함께 챙겨주는 노인의 삶은 판타지에 가깝다. 노인과 노인들이 겪는, 혹은 노인의 가족들이 겪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장수상회>는 애초에 사회문제를 담아내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마을 공동체 속 노인의 이야기는 어차피 로맨틱한 판타지로 설계되었다. <장수상회>는 이미 태생이 그런 영화다.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전하는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와 계산된 감동을 주는 대로 받으면 된다. 계량컵으로 정확하게 용량을 지켜 딱 그 맛이 나는 강제규 스타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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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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