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놓친 사랑의 거리, 그 쓸쓸함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한때는 서로가 세상의 모든 것 같았던 코너와 엘리노어는 뜨거운 사랑을 했다. 이어, 거친 숨소리로 자살을 시도하는 엘리노어. 평범하지만 행복했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1.jpg

 

그런 날이 있다.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날의 날씨, 그 날의 감정, 그리고 그 날의 냄새. 하지만 가끔 그 날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날의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같은 일을 겪었지만, 각기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워지는 기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는 서로가 세상의 모든 것 같았던 코너(제임스 맥어보이)와 엘리노어(제시카 차스테인)는 뜨거운 사랑을 했다. 이어, 거친 숨소리로 자살을 시도하는 엘리노어. 평범하지만 행복했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잔잔한 사랑이야기로 시작해서, 급변하는 이야기의 정서는 그렇게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의 이야기를 관통한다. 갑작스런 변화 속에서 엘리노어는 무작정 달아나고, 코너는 그녀를 쫓지만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교차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겪은 깊은 상처가 드러낼 즈음, 서로는 느낀다. 함께 겪은 사건을 극복하는 다른 태도와 기억 때문에 두 사람은 점점 더 먼 길로 따로 걸어가고, 서로의 행동을 품어내지 못한다.  네드 벤슨 감독의 데뷔작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한 일종의 3부작의 마지막 버전이다. 앞선 두 편의 영화를 나란히 두고 본다면 훨씬 더 이해의 깊이가 넓어지겠지만, 상실을 극복하는 다른 방법 때문에 결국 나란히 걷지 못하는 두 남녀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도 오롯이 담겼다.

 

영화는 엘리노어와 코너가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발을 벗고 도망갈 준비를 마친 엘리노어는 코너에게 눈치껏 따라오라고 속삭이며 달아난다. 그리고 비극을 맞이한 두 사람 중 엘리노어는 첫 장면처럼 늘 먼저 달아나고  코너는 그녀를 뒤쫓는다. 사랑할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달렸던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늘 어긋난다는 것이다. 늘 앞서가거나, 뒤에서 따라가거나 스쳐갈 뿐, 같은 길을 걷지 못한다. 포스터가 전달하는 이미지와 달리 <엘리노어 릭비>는 애잔한 사랑을 그리는 멜로 영화가 아니다.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 지긋지긋하지만 끝내 구심점이 되어 그 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코너와 엘리노어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낸다. 이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애잔한 기억은 편린처럼 떠돌지만, 역시 함께 나눈 기억은 다시 쓸쓸하고 아픈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 상대방의 따뜻한 심장이 아니라, 계속 되짚어가야 하는 나의 기억이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그래서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공허하다. 각자의 기억이 달라 명쾌한 처방이 없는 상실의 아픔은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은 교차점 없이 점점 멀어진다. 

 

4.jpg

 

네드 벤슨 감독은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다른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각각의 사람이 상처를 극복해 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코너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으로 상처를 극복하려하고, 릭비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릭비는 코너의 일상성이 서운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릭비의 모습을 코너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것이라 이해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면서, 스스로 외면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같은 시간 동안 사랑했지만, 서로 다른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남녀의 시선을 꽤 고르고 균등하게 보여주며, 두 사람의 행동을 옹호하지도 편을 들지도 않는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행동하는 두 사람을 통해 관객들은 결국 제 자리로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열을 함께 겪는다. <어톤먼트><비커밍제인> 등의 로맨스 영화의 풋풋한 청년에서 깊은 슬픔을 간직한 남자로도 잘 어울리는 제임스 맥어보이는 과장된 표정 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로 애잔한 진심을 전한다. 우리에겐 <인터스텔라>로 기억되는 제시카 차스테인은 대기만성형 여배우로서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자벨 위페르와 윌리엄 허트 등 연기파 배우들이 든든하게 또 다른 상실을 극복하는 가족의 한 축을 연기한다. 아주 소수의 극장이긴 하지만,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의 버전도 함께 볼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 쯤 엘리노어 릭비는 거리를 걷는데, 그녀의 뒤로 그라피티가 비친다. 무심한 듯 지나치다가, 마치 같이 바라보라는 듯 그녀는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그 그라피티는 마치 영화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이 영화의 숨겨진 상징이기도 하다.

 

 Love isn’t missed by minutes. It’s missed by miles
 사랑은 시간이 아니라, 거리 차로 놓치는 것이다.

 

 

 

 

 

[추천기사]


-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여행 <와일드>
- <백설공주 살인사건> 세 치 혀와 세 마디 손가락이라는 흉기
- 이기적이고 거친 박동의 오르가즘 <위플래쉬>

- 개 같은 개 인생을 책임지라는 경고 <화이트 갓>
- 아님 말고 내던진 칼날이 향하는 곳 <소셜포비아>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오늘의 책

사람을 남기는 독서와 인생 이야기

손웅정 감독이 15년간 써온 독서 노트를 바탕으로 김민정 시인과 진행한 인터뷰를 묶은 책이다. 독서를 통해 습득한 저자의 통찰을 기본, 가정, 노후, 품격 등 열세 가지 키워드로 담아냈다. 강인하지만 유연하게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손웅정 감독의 인생 수업을 만나보자.

쉿, 우리만 아는 한능검 합격의 비밀

한국사 하면 누구? 700만 수강생이 선택한 큰별쌤 최태성의 첫 학습만화 시리즈. 재미있게 만화만 읽었을 뿐인데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마법! 지금 최태성 쌤과 함께 전설의 검 ‘한능검’도 찾고, 한능검 시험도 합격하자! 초판 한정 한능검 합격 마스터팩도 놓치지 마시길.

버핏의 투자 철학을 엿보다

망해가던 섬유공장 버크셔 해서웨이가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난 과정을 보여준다. 버크셔의 탄생부터 버핏의 투자와 인수 및 확장 과정을 '숫자'에 집중한 자본 배분의 역사로 전한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담아 가치 투자자라면 꼭 봐야 할 필독서다.

뇌를 알면 삶이 편해진다

스트레스로 업무와 관계가 힘들다. 불안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다. 이런 현대인을 위한 필독서. 뇌과학에 기반해 스트레스 관리, 우울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수면과 식습관에 관해 알려준다. 처음부터 안 읽어도 된다. 어떤 장을 펼치든, 삶이 편해진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