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가 심리정치 요청, 투명사회가 심리정치 강화
『심리 정치』
한병철 교수의 저작 중 단 한 권을 권한다면 『심리정치』를 선택하는게 옳을 것이다. 다만 “심리정치”시대에 대한 한병철 교수의 대응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더 이상 ‘계급 간의 갈등’은 없고, 이것은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 ‘정치적 우리’의 불가능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한병철 교수의 『심리정치』는 전작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를 다시 소환한다. "신자유주의 성과사회", "무계급적 자기착취", "디지털 파놉티콘"같은 낯익은 단어들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책의 전반부는 『피로사회』, 『투명사회』를 거의 복습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꽤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동어반복에 대한 의심이 살짝 생길만한 분량이다.
하지만 동어반복 없는 사회분석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세 권의 책이 똑같이 '동시대의 세상'을 다루는데, 그 접근각도가 좀 다르다 해서 빠져버리는 개념이란 얼마나 얕고 좁은가. 매번 새로운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논지를 이끌어 내는 저자보다는 동일한 개념을 재활용하면서도 새로운 논지를 이끌어 내는 저자가 훨씬 믿음직하다. 분석도 개념도 '지속가능한' 유용성을 지니는 것이 좋다. 한병철의 저서들은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다만 세 권 모두 워낙 얇은 책이다 보니, 추후에 한 번 구성을 다듬고 반복을 덜어내 한 권으로 출간해도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이런 식의 두둔이 아니라도 『심리정치』가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를 환기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심리정치』는 한 시대가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 지금, 어떤 정치(혹은 통치)가 자리잡게 되는지를 강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세 저서는 "피로사회가 심리정치를 요청하고, 투명사회가 심리정치를 강화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병철 교수의 세계인식을 보다 완전하게 드러낸다.
『피로사회』는 케인즈주의 이후의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성과사회"로 본다. 성과를 인정받을수록 급여는 높아지고 정년도 길어지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두 가지가 달라지면 "계급이 달라진다"고 할 법한 격차가 생긴다. 사람들은 남들보다 성과를 내기 위해 알아서 노력하고, 당연히 사는 건 피로해진다. 피로가 쌓이면 자연스레 불만이 생긴다. 불만이 쌓이면 저항이 된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불만을 저항이 되지 않게 관리하려 하는데, 그 결과 "심리정치"가 요청된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요지다. 여기서 "심리정치"란 불만이 거리로, 투표로 표현되기 전에 '심리' 단계에서 관리를 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누군가(아마도 권력)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 전에 스스로를 원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는데, 내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라거나 "남들보다 자기계발에 게을렀다거나" 자책하는 식으로.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도록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경찰이나 법으로 다스리는 것 보다 굉장히 효율적/비용 절감적인 '통제술'로 기능한다.
『투명사회』는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다 보이는 사회에서는 정치와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통제사회"가 된다고 말한다. 정부와 기업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면 여론/주주의 즉각적인 반응으로 인해 장기적 계획이나 결단이 불가능해지고, 개인이 네트워크 속에 자신의 일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순간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적 자아를 통제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정보들을 정부를 비롯한 온갖 권력들이 수집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거대한 통제사회가 된다는 것도 잊지 않고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심리정치』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빅데이터'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언급하는데, 사람들의 소비, 동선, ‘좋아요’ 등 온갖 행위 패턴들이 데이터화 된다는 것은 그 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의 행동은 ‘의식’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데이터를 가진 자들은 우리의 행위 패턴을 통해 우리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우리에게 어떤 식의 자극을 주어 어떤 행위를 이끌어 낼 것이지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쌓여가는 “투명사회”에서는 권력이 우리의 무의식에 접근해 행동을 제어하는 진정한 '심리정치'(혹은 통치)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심리정치』는 이렇게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로부터 자기 논지를 일으켜 세운 책이다. 거꾸로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는 『심리정치』를 통해 제대로 된 연결끈을 갖추게 된 것도 같다. 한병철 교수의 저작 중 단 한 권을 권한다면 『심리정치』를 선택하는게 옳을 것이다. 다만 “심리정치”시대에 대한 한병철 교수의 대응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더 이상 ‘계급 간의 갈등’은 없고, 이것은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 ‘정치적 우리’의 불가능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정치의 장소는 ‘심리’이고,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정권반대투쟁은 더 이상 ‘정치의 최전선’이 아니고, 파업 투쟁은 ‘혁명의 학교’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세계는 유례없는 양극화로 두 덩이지고 있기도 하다. 그의 논지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까지는 내주지 못하는 이유다.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한병철 저/김태환 역 | 문학과지성사
출간되자마자 커다란 주목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고 ‘??사회’ 열풍을 불러일으킨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의 신작 『심리정치』(김태환 옮김)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에 소개되는 그의 다섯번째 책. 전작 『피로사회』에서 ‘해야 한다’를 넘어 ‘할 수 있다’라는 성과사회의 명령 아래 소진되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투명사회』에서는 긍정적 가치로 여겨진 ‘투명함’이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통제사회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짚어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 논의들의 연장선상에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에 깊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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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