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할 때
물뚝심송 박성호의 대한민국 모든 떡밥 6
지난 10일, <물뚝심송의 대한민국 모든 떡밥>이 여섯 번째 시간을 맞이했다. 주제는 사회변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중요하게 논의되는 ‘교육’이었다. 물뚝심송은 전교조 문제를 중요하게 논하고, 학계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과학기술연구의 정책적 문제까지 빠트리지 않고 두루 다루었다.
개혁의 선택과 집중, 언론과 교육을 택하다
교육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데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강생들 앞에 선 물뚝심송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 분야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사회변화를 고민하지만 어느 순간, 많은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사회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이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사안들을 하나하나 뜯어 고치는 것이다. 물뚝심송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본인은 현대사회가 더 이상 혁명이 가능한 세상이 아니라 생각한다며, 개혁에 방점을 찍고 논의를 끌어갔다. 그런데 점진적인 변화, 개혁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다수의 유권자를 설득하고, 의회에 진출해서 법안 개정안을 제출하고 통과시키고 사회 시스템이 개선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
게다가 개혁을 바라는 목소리는 쉽게 소진된다. 변화가 시작되면 이해관계가 갈리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손해를 보는 사람들만 끝까지 싸우기 때문에 사회적 저항이 더 많이 발생하는 듯 보인다. 물뚝심송은 참여정부시절 종부세 개정안을 예로 들어 이 상황을 설명해냈다. 종부세 역시 반대하는 목소리만 크게 들리면서, 사실상 거의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이다.
한 분야를 변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선택과 집중을 떠올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이라도 변화시키자고 마음을 먹는다. 80년대 말, 민주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떠올린 것은 두 가지였다. 언론과 교육. 그는 당시 언론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만든 것이 한겨레이고, 교육에 대한 고민이 낳은 것이 바로 이번 시간에 다룰 전교조라고 짚었다.
황우석 사건과 과학기술정책
물뚝심송은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그 교육을 담당해야 할 분야인 학문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사회의 과학기술계, 흔히 말하는 학계문제와 그걸 다루는 과학기술정책의 문제였다. 그는 이 학계의 문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황우석 사건이라며,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고 했다.
과학기술연구에 대한 투자 문제는 어떻게 배분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학계의 오랜 문제는 학술적 성과가 아니라 대학에 자리 잡은지 오래된 노교수, 사교적이고 정치인들과 친한 교수들에게 자원이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 있었던 BK21 프로젝트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정부가 엄청난 금액을 학계에 투자한 프로젝트였는데, 이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해 배분에서 실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참여정부시절에 BK21의 실패가 공론화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러나 룰을 바꾸려하다 기존에 판을 장악하고 있던 학자들과 척을 졌고, 우왕좌왕하며 새로운 룰을 만들지 못해 기대감을 가졌던 소장파학자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과학기술계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된 것이다.
물뚝심송은 바로 여기에서 황우석이 떠오르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유사 이래 최초로 한국 학자가 사이언스와 네이쳐에 논문을 게재했고, 줄기세포 연구에 큰 획을 만든 것이다. 참여정부는 학계에 고루 나누어 지원할 자원을 황우석에게 독점적으로 퍼부었다. 청와대 요직을 맡고 있던 사람들 역시 황우석과 가깝게 지내며 어마어마한 국비 지원을 했다. 물뚝심송은 황우석의 연구가 성공적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당시의 정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황우석 사건을 영화화 한 <제보자>(사진 출처 : 예스24 영화)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과학기술이 발전해야할 방향으로 피케티 일화를 들었다. 피케티는 젊어서 작은 업적을 낸 뒤, 십년이 넘도록 아무런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 지속적인 지원을 받았고 세계를 뒤흔든 <21세기 자본론>을 써냈다. 물뚝심송은 결국 대안은 학계가 스스로 내야한다며, 사회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한, 제대로 된 분배의 룰이 세워지기 전에는 지원 자체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며 길고 먼 길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전교조의 역사: 촌지거부운동에서 법외노조까지
말을 마친 물뚝심송은 다시 전교조로 돌아가자며, 87년 6.10 항쟁 이후 교육계의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초중고교의 부조리는 단 한 단어로 결집되는데, 바로 촌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느꼈을 자괴감은 얼마나 컸을까. 평교사들이 모여서 전교조를 만들고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이 바로 촌지거부와 제대로 된 교육을 하자는 것이었다.
87년도에 전국교사협의회가 출범하고, 89년 5월 전국교직원노조가 창립대회를 여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교사 전원이 경찰에 연행된다. 그날 저녁 노태우 전대통령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교조에 가입한 모든 교사를 해직시키겠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1990년 전교조에 가입한 1,465명의 현직 교사를 해직시킨다. 그 뒤, 김영삼 정부에서 해직교사들이 일차적으로 복직되었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전교조는 합법화가 된다. 합법화까지, 꼬박 10년 가까운 싸움이었다.
그 이후 전교조는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을 해 왔지만, 일반사회에서 전교조에 대한 인식은 꾸준히 아주 조금씩 나빠졌다. 그리고 급기야 작년에는 다시 법외노조로 전락했다. 물뚝심송은 불법노조가 아닌 법외노조라고 강조하면서 결국 상황은 97년 이전으로 회귀한 거라 평했다. 그는 여기에 분명 전교조의 잘못도 있다고 지적했다. 전교조가 만들어지던 당시 국민적 호응을 얻던 것과는 달리, 현재는 사회적 지지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사들이 전교조에 가입해서 방패막이로 전교조를 사용한다는 제보도 있다. 한편으로는 전교조가 학내 비정규직, 영양사 등의 처우개선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자기 조직원들의 권리만 챙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우리가 간과한 힘, 사학재단
물뚝심송은 전교조의 모토가 우리 사회의 교육품질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이미 교육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있다는 말로 다시 논의를 시작했다. 전교조는 기존의 학교 권력이 장악하고 있던 헤게모니를 빼앗으려고 시도한 최초의 조직이었다. 학교의 재산권이나 운영권을 빼앗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학내의 부조리나 부정부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운영을 장악하던 세력과 부딪히게 된 셈이다. 이들은 전교조를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세력으로 간주했고, 오랜 기간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사회 전반의 여론전을 펴온 것이다. 그만큼 조직적이고 치밀하면서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1989년 연세대서 진행한 전교조 창립대화(사진 출처: 신동아)
그렇다면 전교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활동해온 이 ‘반동세력’은 누구일까? 물뚝심송은 그 상대로 사학재벌을 든다. 그는 사학재단들이 공립학교, 나아가 교유관련 부처와 관료들과의 연계까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이들은 종교계의 재벌들, 대형교회 재단과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이 수시로 개신교계의 입장을 옹호하는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학재벌은 어떻게 만들어 졌나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역사는 구한말과 일제로 올라간다. 당시 남한에는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이승만은 전직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토지 개혁을 단행한다. 비록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지만, 토지개혁은 남한의 농민들이 토지를 분배받아 자작농이 된 큰 계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지주들은 남은 땅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때 정부는 전쟁에 폐허가 된 땅 위에 교육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다급한 목표와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안을 만들어 낸다. 바로 학교시설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주들은 땅을 대고, 정부가 돈을 내 학교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학교의 운영비와 교사 월급 등 제반비용은 정부가 낸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이렇게 정부의 자금이 많이 투여되었는데도 학교는 원래 지주의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제 지주는 땅을 빼앗길 염려가 없을 뿐더러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학교의 설립자로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게 된다. 학교를 짓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학부모들이 나서면서 지역사회의 자원도 투입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 사립학교재단이 형성된다.
문제는 사학재단의 설립자와 그 후손들은 학교를 온전한 사유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부지원금을 받으면서도 학교 재단 이사회에 관선이사를 한두 명 파견하겠다는 것도 결사반대할 정도로 독점적 권리를 가지려 한다. 또한 끊임없이 재단을 늘려가는 과정에서 교회와 세력을 잡기도 하고, 가족 비즈니스로서 2세를 정계에 진출시켜 그동안 축적한 자본과 권력을 지켜나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 사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전교조는 제대로 된 교육을 실천하겠다고 촌지거부운동부터 시작해 활동을 개시했지만, 결국 우리 사회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거대한 사학세력의 헤게모니를 빼앗아 오겠다고 덤빈 꼴이 된 것이다. 흔히 전교조의 반대세력으로 교총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사학재벌 권력의 아주 작은 일 부분, 물 위로 떠오른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현재 전교조는 바로 그 물 밑에 숨겨진 90%의 권력에 부딪혀 침몰 직전까지 와 있는 셈이다.
이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시간
여기까지 설명한 물뚝심송은 지금 우리 교육이 처해있는 상황을 떠올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물뚝심송은 이제 다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팔구십년대 운동권의 방법이 아닌 사회적 설득력을 가진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할 때라는 것이다. 그는 수강생들을 둘러보며 어려운 이야기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수강생들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누구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시간들, 아직 오지 않은 역사의 페이지들을 그려보았다. 싱싱하게 빛나며 찾아올 새로운 장을 꿈꾸는 일에는 끊임없는 좌절을 동반하겠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 이 강의를 듣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강의가 아까운 듯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수강생들의 모습을 보며, 기자 역시 함께 고민하자는 물뚝심송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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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