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유난히 뭔가가 잘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숲속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진 배우 이순재 씨처럼 유난히 동물이 잘 따른다거나 하다못해 경품운, 경매운 같은 것이 잘 따르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뭔가가 잘 따라오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게, 벌레라는 게 문제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섬인 프레이저 아일랜드Fraser Island에 갔을 때였다.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선착장 뒤편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과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가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모기가 온몸을 물어뜯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숙소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니 팔다리가 온통 붉은 반점으로 가득했다. 또 시작이구나, 이놈의 벌레들. 모래섬이라 건조해서 벌레들이 없을 줄 알았건만. 이렇게 물리는 줄도 모르고 석양에 빠져 있었던 건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 본격적으로 프레이저 아일랜드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로 했다. 모래섬 위에 쭉 뻗은 숲이 아름다워 세계자연유산에 선정된 곳이기에 일행들과 나는 그 진가를 맛보러 센트럴 스테이션Central Station으로 향했다.
아니, 내가 서 있는 곳이 정말 모래섬이란 말인가?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울창한 수풀이 펼쳐져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키 큰 나무들과 고사리과 식물들이 가득한 숲은 푸르면서도 검붉은 빛이 돌았고, 뜨거운 여름 날씨가 무색하게 시원한 바람까지 안고 있었다. 숲 사이사이에는 작은 계곡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래 위를 따라 흘러가는 물은 또 어찌나 맑은지 계곡 안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었던 숲속 산책은 신비로운 경험이었고, 여행지에서의 들뜬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다. 그렇게 다들 기분 좋은 수다를 한창 떨고 있을 때, 외마디 비명에 모두들 놀랐다. 그 주인공은 나였다. 푸른 열대우림을 감상하느라 정신없이 걷다가 발이 가려워서 신발을 벗었는데, 양발에 살이 오를 대로 오른 거머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팀은 10명도 넘었는데 오직 내 발에만 거머리들이 가득했다.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혼자 우울했다. 왜 이토록 벌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일까. 거머리를 떼어내느라 흐른 피가 말라붙은 발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한 친구가 어깨를 톡톡 친다. 투덜거리며 다시 일행들을 따라 나섰다. 조금 더 걷자 앞서던 친구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에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파랗다, 푸르다, 맑다 등의 단어만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가 보였다.
호수의 파란 물빛은 수심이 깊어지는 중심부로 갈수록 점점 짙어지지만, 수영을 해서 들어가면 어디든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다. 원주민들 언어로 ‘부란구라Boorangoora’, 즉 ‘신비의 물’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하이라이트, 맥켄지 호수Lake Mckenzie였다. 바람과 물이 만들어낸 자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영화 <나니아 연대기> 3편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곳이다. 잠시 우울했던 내 마음도 그 투명한 물에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사륜구동 차를 타고 끝없이 펼쳐지는 75마일 비치75Miles Beach, 약 120킬로미터를 달려보기로 했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시원한 바다를 옆에 끼고 덜커덩덜커덩 모래해변을 달리는 기분은 오직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어제의 시련은 바람결에 날려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디언 헤드Indian Head였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나둘 차에서 내려 돌 언덕인 인디언 헤드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다들 내 등을 툭툭 치며 지나간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유난히 내 등에만 파리가 많이 앉아 있어 날려 보내려던 것이란다. 그래, 파리 정도야 뭐, 벌레도 아니지. 정상에 도착하니 시원하게 탁 트인 시야 앞으로 남태평양이 펼쳐졌다.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펴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돌고래 떼가 바다 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도착한 샴페인 풀Champagne Pools은 자연이 만들어준 천연 수영장이었다. 머리 뒤로 파도가 치면 하얗게 거품이 피어올라 마치 샴페인 속에서 헤엄을 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울렁거리는 바닷물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만 있어도 좋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질릴 때까지 물장난하며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한참 수영을 하고 있는데 팔이 욱신거렸다. 물 밖으로 나오니 한쪽 팔 전체가 샌드플라이Sandfly, 흡혈파리의 습격을 받아 퉁퉁 부어 있었다. 이번에도 나만……. 이 무슨 고통의 연속이란 말인가. 모기, 파리, 거머리, 샌드플라이까지.
여행객들이 조심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나를 따르는 벌레들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사실 지금도 프레이저 아일랜드를 떠올리면 매번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에 취했던 기억뿐이다. 그때는 분명 고통스러웠을 텐데 감동적인 물빛이 그마저 지워버렸다.
어쩌겠나. 벌레에게 물린 상처는 금세 아물지만 아름다운 풍광의 감동은 영원한 것을.
about: Fraser Island
퀸즐랜드주 브리즈번Brisbane의 북쪽에 위치한 프레이저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섬이다. 이 거대한 모래섬에는 수백 개의 사구와 수십 개의 담수호가 있으며 모래 위로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 아열대숲을 이룬다. 프레이저 아일랜드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브리즈번, 선샤인코스트, 허비 베이Hervey Bay에서 출발하는 투어에 참가하거나 섬 내부에 있는 리조트에 머물며 휴양을 즐기는 것도 좋다. 또한 사륜구동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섬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도 있다. 투어는 일일, 1박 2일, 2박 3일 등으로 일정이 나뉜다. 브리즈번에서 출발하는 투어상품으로는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하이라이트인 맥켄지 호수를 방문할 수가 없으니, 투어에 참가하려면 선샤인코스트 또는 허비 베이 출발 상품을 이용하기를 추천한다.
* 이 글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호주 TOP 10』의 일부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호주 TOP10앨리스 리(이은아) 저 | 홍익출판사
책의 서두를 여는 [1년만 안식년을 갖는다면]에서는 간절히 바라던 치유의 시간을 보내기 좋은 도시들을, [내 인생의 명장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사진 한 컷 남길 수 있는 곳을, [로맨스가 필요해]에서는 달콤한 추억 쌓기에 좋은 곳을 소개하며 저자 앨리스 리가 다년간 겪어온 일상과 여행담을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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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호주 Top 10, 프레이져 아일랜드, 호주
저자 앨리스 리는 부산에서 태어나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운명처럼 떠나온 호주 시드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캔버라대학교(University of Canberra)에서 경영·마케팅을 전공하며 틈틈이 여행사 아르바이트를 통해 여행 감각을 익혔다. 이후 앨라 트래블 센터를 열어 본격적으로 여행업에 뛰어들었다. 현재는 빠르게 변화하는 여행 트렌드에 맞춰 개별여행자들(FIT)의 니즈를 충족시켜 줄 상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호주에서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00》가 있으며, 현재는 사랑하는 남편, 소중한 아들 에이든과 함께 시드니에서 거주 중이다. 이번 책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호주 Top10》에서는 10년 넘게 호주에서 살며 또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경험들을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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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진, 호주 여행법을 소개합니다.” 광활한 자연 속에서 다시없을 명장면을 남길 수 있는 곳, 스펙터클한 액티비티와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 가득한 곳, 지겨운 아시아·북미·유럽, 두려운 남미·아프리카 말고 새로운 곳!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여행지를 찾는 이들에게 ‘호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