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책상 한 편에 놓아둔 티켓박스가 빼곡하게 찬 걸 보니 또 한 해가 지나갔다는 게 실감난다. 지난 1년 동안에도 참 많은 공연장을 쫒아 다녔나 보다. 한 장 한 장 공연티켓을 넘기며 각각의 무대를 떠올려 보니 옛사랑을 추억할 때처럼 수많은 모습과 내음이 몰려온다. 자연스레 좋았던 기억, 아쉬웠던 기억도 떠오르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한국을 떠나있었던 영향인지, 다시 찾은 대학로는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설었다. 헤어졌던 옛사랑을 다시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또 무뎌지기 전에 2014년 기억에 남는 공연계 이슈를 적어봐야겠다.
성적 소수자들의 이야기 쏟아져
2014년 우리나라 공연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적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거침없이 쏟아진 것이 아닐까. 그것이 메인 테마든 곁다리든, 남성미 물씬 풍기는 남자배우나 아니면 여자보다 예쁜 남자배우의 여장으로 희석이나 착시를 꾀했든, 어쨌든 지난 한 해 국내 무대에는 동성애를 다루거나 드래그퀸(여장 남자)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잘 알려진 뮤지컬 <헤드윅> <쓰릴 미>는 물론이고 연극 <My.Butterfly>, 음악극 <두결한장>, 뮤지컬 <프리실라>, <킹키부츠>, <라카지> 등이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면서 남자배우들 사이에서는 동성과 입을 맞추거나 여장을 하지 않으면 작품을 못할 정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고, 기자 역시 그들을 건너뛰면 인터뷰할 배우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도, 객석에서 관람하는 관객들도 이러한 소재와 표현에, 그리고 그 익숙지 않은 무대의 숨은 주제를 이해하는 데 많이 편안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배우 김다현
실제로 이런 현상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지난 2007년 <쓰릴 미>가 초연될 때만 해도 동성애가 전면으로 나온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큰 화제가 됐고, 더구나 남자배우들끼리 입을 맞춘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쓰릴 미>의 키스 신도 초연 때는 없다 앙코르 공연에 가서야 등장하지 않았던가. 앞서 2005년에 <헤드윅>이 초연될 때는 어땠겠는가. 남자배우가 파격적인 여장을 하고, 그 의상보다 파격적인 소재의 이야기를 쏟아내며 홀로 두 시간을 끌어가는 무대란 모험을 넘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했다. 불과 10년 만에 우리의 무대는 이렇게 달라졌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여장배우는 누구일까? 배우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여쁘다 손꼽히는 김다현 씨가 아닐까 한다. 마른 몸에 고운 선을 가진 얼굴 때문인지 그는 2014년에만 <M.Butterfly> <헤드윅> <프리실라> <라카지>까지 연달아 참여하며 일 년의 대부분을 여장으로 지냈고, 지금도 여장 중인데,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배역의 영향 때문인지 목소리나 몸짓까지 실로 곱다.
공연시장에도 예능 바람
언젠가부터 TV 예능프로그램은 영화나 드라마의 중요한 홍보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이 공연시장에도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나 아이돌 가수, 인기 탤런트의 공연 출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만석, 엄기준, 송창의, 조정석 씨 등 이미 무대 안팎으로 얼굴을 알려 예능 출연이 낯설지 않은 무대 출신 배우들은 물론이고, 아직 화면에 나오는 것이 낯선 배우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공연 쪽에서는 주연급 배우들인데 MC들에게는 얼굴이나 이름조차 익숙지 않다는 점. 언젠가 배우 장영남 씨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10년 했는데도 사람들이 못 알아봤는데, 드라마에 한 번 출연했더니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소리가 이 말인가. 역시 TV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나 보다. 동시에 공연은 여전히 지극히 일부만이 향유하는 문화인 것 같다.
뭉쳐야 산다, 가수도 배우도!
노래와 관련된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2013년 콘서트 시장이 크게 확대됐다면 2014년에는 시들해진 인기와 국가적인 재난의 여파 등으로 확연히 축소된 양상을 보였다. 이와 함께 달라진 모습은 콜라보레이션, 바로 합동 무대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미 뮤지컬 시장에서는 더블이나 트리플을 넘어 주연 배우가 다섯 명까지 캐스팅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색깔이 확연히 다른 캐스팅으로 다채로운 관객의 구미를 다각도에서 취합해 위험부담을 줄여보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그 현상이 콘서트 시장에도 두드러지고 있다. 연말에만 해도 플라이투더스카이와 거미, 다이나믹 듀오와 박정현, 윤도현과 바비킴, 바이브와 포맨 등이 각각 뭉쳤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음악을 즐기는 방식이 바뀌면서 가수에 대한 애정의 호흡이 짧아진 영향도 있으리라. 충성 팬이 아니고서야 한 가수의 노래보다는 다다익선이 좋은 것이다. 물론 이른바 ‘전설’들은 단독 공연도 여전히 매진행진을 이어간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엠바고를 무시한 기자의 보도에서 열혈 팬들의 예매 전쟁까지 수많은 기삿거리를 뿌렸으나 결국은 취소된 폴 메카트니의 내한공연이 아닐까.
연극무대는 브랜드 공연 꾸준히 인기
가장 가난하다는 연극시장은 브랜드 공연으로 강세를 보였다. 조재현과 김수로가 각각 이끄는 수현재컴퍼니와 김수로 프로젝트의 작품들이 꾸준히 인기를 이어갔고, ‘연극열전5’도 그 명성을 유지했다. 수현재컴퍼니가 조재현이라는 거물의 인맥을 동원해 <미스 프랑스> <리타> 등에서 김성령, 공효진, 강혜정 등 유명 배우들을 무대로 불러들이는 효과가 있었다면 김수로 프로젝트는 김수로라는 대중성을 앞세우되 <데스트랩> <머더 발라드> <발레선수> 등 의외로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으로 맞섰다. ‘연극열전5’는 명성에 걸맞게 <프라이드> <취미의 방> <바냐, 소냐, 마샤 & 스파이크> 등으로 뭔가 새로운 걸 찾는 연극 팬들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지난 한 해 연극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행보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선전이 아니었을까. 순수 연극쟁이들이 좋아서 만든 극단, 경제적으로는 근근이 그러나 무대에 대한 열의를 잃지 않고 유지해온 극단의 10주년 기념작을 관객들이 알아봐줬으니 더욱 의미 있다고 하겠다. <유도소년> <나와 할아버지> <뜨거운 여름> 등이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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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