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그림책으로 마음 선물하기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읽는 동화책
『엄마 마중』
학교에서 집까지 단박에 뛰어와 “엄마~” 하고 기운차게 불렀는데 집안이 고요할 때, 슬픔을 넘어 무섬증이 든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안의 공기는 달라져있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살면서 가장 슬픈 건 언제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 배신당했을 때 우리는 슬프다. 그렇지만 당연히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여겼던 엄마가 없을 때는 와락 슬퍼진다. 학교에서 집까지 단박에 뛰어와 “엄마~” 하고 기운차게 불렀는데 집안이 고요할 때, 슬픔을 넘어 무섬증이 든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안의 공기는 달라져있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엄마가 없는 집은 대낮이라도 깊은 우물같이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고, 고요하다 못해 무서운 정적이 흐르고, 그림자들이 떼를 지어 우우 몰려다닌다. 빛과 윤기로 반짝거려야 할 집안에서는 눅눅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서 엄마 없는 오후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적해진다. 엄마를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한 시들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포개어져 가슴이 아픈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마음을 잘 담아낸 시 중 하나가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의 이 시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아마 틀림없이 김동성의 『엄마 마중』이란 그림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야 말리라. 표지에 동그마니 서있는 아이의 복장으로 짐작하겠지만 1938년 『조선아동문학집』에 실린 이태준의 짧은 동화에 김동성이 그림을 그려 만든 그림책이다. 김동성은 원작과 또 다른 그림의 이야기를 통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잘 전달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 누런빛이 도는 한복을 입고 방한용 모자까지 쓴 어린 사내아이가 걷고 또 걸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추운 겨울에 장갑도 없이 정류장에 가서 전차가 들어올 때마다 앞으로 나선다. 그리곤 차장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 엄마 안 와요?”하고 묻는다. 하지만 바쁜 차장이 어린 아이의 말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라고 쌀쌀맞게 대꾸하고 어린 꼬마는 신경도 쓰지 않고 냅다 제 갈 길로 가버린다.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이제나 저제나 언제나 우리 엄마가 오나싶어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설레는 부분은 바로 이 기다림의 대목이다. 저 멀리 전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전차가 손톱 만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그때부터 아이는 설렌다. 꿈을 꾼다. ‘이번 전차에는 분명히 엄마가 타고 있을 거야. 엄마가 날 보면 얼마나 놀랄까?’ 하는 희망과 기대가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본 전차는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다. 은하철도999를 능가하는 마법의 전차다. 아이의 마음속에서 전차는 푸른 바다 속을 유영하듯 미끄러져 정류장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하늘 위를 덩실 날아오듯 달려오기도 한다. 사실이야 어쨌든 아이의 마음속에 가득 찬 ‘이번에는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이런 판타지를 만들어낼 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녹녹하지 않아서 엄마는 오지 않고, 종로 거리에는 어둠이 내린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거리는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바삐 집으로 돌아간다. 한데 아이는 거기 전차정류장에 아직도 우두커니 서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않고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그저 엄마를 기다린다. 그림은 종로거리에 서있는 아이를 원경으로 보여주다가 점차 클로즈업해 아이의 코앞까지 독자를 바짝 데려간다. 그리고 기어코 추위에 코가 빨개진 아이의 옆얼굴을 보여준다. 이제 눈까지 내린다. 가슴이 철렁하다.
“아이는 엄마를 만났을까?” 이 그림책을 읽은 이들은 누구나 물을 수밖에 없다. 대체 이 어린 아이가 그날 저녁 무사히 엄마를 만났을지, 설마 엄마를 기다리다 얼어 죽기라도 한 건 아닐지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이태준의 원작은 여기가 끝이다. 김동성은 마지막 면지에 엄마 손을 잡고 사탕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그려 넣어 마무리했다. 이 문제의 마지막 장면은 시종일관 단색과 컬러의 대비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나눈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하자면 현실이 아닌 꿈이다. 그러나 해석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 아니겠는가.
김연수의 소설 『원더 보이』에는 엄마를 본 적도 없는 한 소년이 엄마를 찾아가는 소설인데, 이 소년이 이런 말을 한다.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마는 언제나 절대적이고 원초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어떤 경우에라도, 무조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오로지 엄마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마지막 그날까지 엄마를 그리워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엄마를 한 소년이 추운 종로 거리에서 코가 빨개지도록 기다리고 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토록 절절하게 마음이 느껴지면, 내 엄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전화라도 해야겠다.
엄마 마중이태준 글/김동성 그림 | 소년한길
감물 빛 은은한 1930년대, 그 아스라한 시절을 담은 그림책입니다. 월북 작가 이태준의 단편동화에 그림작가 김동성의 그림이 만나, 여백이 가득한 아름다운 한편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하루 끼니를 위해 어디론가 일거리를 찾아나선 것이 분명한 엄마와, 하루종일 전차 거리를 서성이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하루를 통해 그 아득했던 시절의 정취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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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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