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쉬운 위로, 새로운 숭례문
숭례문
우리는 특별한 수준의 공간적 치유를 통해 집단 기억을 서서히 회복하고 부재(不在)에 대해서 충분히 사색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영영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없애고 너무 쉽게 복제한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전기세 이야기를 한참 하던 라디오 청취자가 갑자기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배우 하정우는 “뭐 이런 미친 XX……” 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욕설(욕 좀 하시더군요)을 해댄다. 하지만 그 결과 쾅! 경고한 대로 마포대교가 폭발하고 현장에 취재를 나갔던 아내까지 잃는 비극을 낳는다. 쯧쯧. 속는 셈 치고 따끈한 오뎅 국물 같은 위로의 한마디라도 건넸더라면 그런 일까진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일단 뭔가 심각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 말을 할 땐 귀 기울여 제대로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 개가 짖는지 사람이 말을 해도 듣는 척도 안하는 세태가 사회 이곳저곳에 만연한 지 이미 오래긴 하지만.
마포대교를 짓던 시절은 멀쩡히 잘 있는 밤섬을 부숴서 여의도를 만든다는 발상이 혁신으로 통하던 참으로 재기발랄한 명랑시대였는데, 그렇게 만든 섬을 잘 써먹기 위해 다리를 놓고, 이후 수십 년이 지나 그 다리가 가장 자살하기 용이한 장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돌고 도는 기구한 운명으로 점철된 어떤 비극적인 역사의 단편처럼 다가와 착잡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다가가면 불이 켜지고 ‘밥은 먹었니’ 하는 자동 감지 자막을 띄우는 큰 교각의 난간대가 자살률을 80퍼센트 넘게 줄였다고 흐뭇해해야 하는 현실이라…… 관련 당국에서야 그렇게 해서라도 통계수치가 나아지면 좋아할 일이겠지만 이 넓은 도시에 사람을 위로하는 장소가 진짜 드물구나 하는 생각에 떠난 주인을 갈구하는 강아지 마음이 되어 휑한 감정을 지울 길 없다.
어떤 절망적 상태에서 모든 걸 던져버리러 지하철역에서 가장 가깝다는 다리에 갔는데 고작 기계가 찍어주는 위로의 글을 볼 때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어쩌면 그런 문구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이유는 최소한 문명시대의 인간으로서 이런 대접을 받으며 죽을 순 없다는, 일종의 모욕감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무척 화가 나고 분하고 어이없었을지 모른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마포대교를 폭파시켰던 테러범도 아마 이런 모욕을 느낀 사람이 아니었는지. 영화의 프리퀄을 만들 예정이라면 꼭 참고해주면 좋겠다.
마포대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울은 새삼 사람 살기 참 팍팍한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다들 자기 말만 해대느라 정신이 팔려서 옆, 뒤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위로는 어려운 것이다. 앞이 아니라 옆과 뒤를 봐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잘 될거야’라며 서로를 다독거려주는 존재가 있다면 굳이 찬바람 맞으며 다리 위에 설 생각까진 하지 않을 텐데. 그런 존재들이 늘어나진 못할 망정 하나둘 사라지니 큰 문제다.
2011년 3월,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리셋된 일본 도호쿠 지역 몇몇 현에 이재민을 위한 아주 특별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모두의 집Home for All’이라는 이름의 마을 회관 같은 건물이 그것이다. 이 ‘모두의 집’은 재난지역에 투입되는 철골 조립식의 컨테이너 가설 주택을 대체하는 사회적 건축으로, 규격화된 조립식 주택이 가져올 또 다른 비인간적 평등주의와 획일주의를 피하기 위한 건축적 개념을 담고 있다. ‘모두의 집’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주민들을 위한 몇 개의 방과 공동 거실, 화장실 등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고사한 그 지역 삼나무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 주도한 이는 이토 도요(伊東豊雄)라는 건축가로, 그와 함께 일본의 유명 건축가들이 협력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재난을 통해 다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삶 전체가 사라진 판에 똑같은 건물과 도로를 다시 지어준 다 한들 그것이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중요한 건 치유를 위한 ‘위로’가 먼저라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진실한 집짓기를 통해 이재민들의 다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으리라.
이토 도요는 ‘모두의 집’을 통해 건축의 사회적 소통이 갖는 의미를 재고시켰다. 그 결과 2013년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다. 이토 도요의 수상은 미래의 건축이 과시와 소비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자기 연출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풍토, 사람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기본’을 재차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재난이 몰고 온 지울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건축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언제나 실험적인 이슈를 던지며 건축의 첨단을 지향했던 노장 건축가는 ‘모두의 집’을 통해 감동을 전하고 있다. 형태가 눈에 띄거나 특별한 기술이 돋보이는 건물은 아니지만 지역의 새싹을 움트게 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정신의 회복을 도모한 것이다. 무너진 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난에 쓸려간 ‘삶’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메시지는 타당하며
또 감동을 전한다.
‘모두의 집’은 만드는 과정을 통해 사용자인 이재민들과 건축가가 같은 눈높이에서 심리적 교감을 지속해나갔다는 데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첨단의 도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축가는 폐허 위에서 삶과 건축을 질문하며 작은 쉼터를 지었다. 이 건물은 세상의 어떤 건축보다 강하고 단단한 희망을 품는다. 무작정 싹 지워버리고 새로 짓는 게 미덕인 우리 풍토에서 볼 때 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주 작은 진심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태도는 한 번쯤 생각해볼 일 아닐까. 부실 공사로 말이 많은 숭례문을 볼 때마다 속상하고 불편한 마음 감추기 어려운 요즘에는 부쩍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불에 타 무너진 지 5년 만에 컴백한 국보 1호는 우리가 알던 그것인지 아닌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가림막에 가려진 채 은둔하며 대수술을 마친 숭례문은 마술쇼 같은 재탄생을 기대하던 사람들 앞에 전임 대통령 임기 말에 짠 하고 나타났다. 그런데 왠지 반가움보다는 ‘누…… 누구시죠’ 하게 되는 느낌이었달까. 잠적 기간 동안 눈, 코, 입 티 안 나게 살짝살짝 시술한 연예인을 본 것처럼 분명 같은 숭례문이긴 한데 딱히 같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완벽한 복원이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리적 작업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건물 형태와 구조체 복제만으로는 100퍼센트 같을 수 없는 한계와 더불어, 오랜 세월 국보 1호로서 누적된 집단 기억의 갑작스러운 상실에서 기인한 상처가 우리의 마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이 겪은 상실감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상처다. 불에 탄 숭례문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던 그날 밤이 아직도 생생한데 변변한 공감의 과정 하나 없이, 없으면 다시 지으면 된다는 식으로 뚝딱 만들고 끝내버렸으니 이질감은 당연할 수밖에.
모든 매스컴이 열광적으로 전파한 준공 이벤트는 얼마 못 가 부실공사 논란, 시공자의 공사비 횡령 등 한심한 사건들이 연이어 도마에 오르면서 국민들의 눈총을 샀고, 임기 중 완공이라는 속도전에 따른 크고 작은 디테일의 결함 등이 발생하여 총체적인 문제점(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해봤자 별 소용이 없겠지만)을 드러내고 말았다.
복제된 숭례문에 폐허 위에 지어진 ‘모두의 집’을 조심스레 오버랩 시켜본다. 우리에겐 과연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 국내 최고 장인들로 구성된 기술자들이 무리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맡은 영역에서 정성을 기울여 작업했을 것이다(그렇다고 믿고 싶다). 성곽복원에 쓰인 돌들은 예전 석공 방식으로 정과 망치를 이용해 수작업(어떤 이유로 그런 방식이 채택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으로 다듬어 서 쌓아올렸고, 기와 역시 개별 수작업으로 불순물을 골라내며 전통 가마로 굽고 가열과 냉각을 반복하는 재래 기법을 동원하여 만들었다는 준공 당시의 발표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프로젝트의 목적은 최단 기간 내에 최고의 복제를 이루자는 데 있었던 게 아닐까. 최단은 너무 빠듯한 시간이었고, 최선은 책임이 담보되지 않은 최선이었다. 뒤늦게 열 감지기, 침입 감지기, 첨단 센서가 장착된 최신 스프링클러, 고화질 폐쇄회로 TV 등을 줄줄이 깔아놓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 숭례문엔 여전히 화염에 휩싸였던 그날 밤의 상처가 보인다. 파란만장한 20세기를 거치며 국보 1호를 통해 알게 모르게 위로받았을 우리의 공통 기억의 속살까지 파고든 깊은 상처들. 그것은 건물 하나가 불에 타 무너지는 단순한 물리적 피해가 아니었기에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국보 1호의 상징성을 차치하고라도 허망한 재난에 허탈했던 우리의 선택은 결국 물질의 복제였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내의 감쪽같은 복제.
최초의 숭례문은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다고 사료는 전한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그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불에 타기 전의 숭례문은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 나누어 고쳐 지은 것이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고 작은 개축을 통해 600년 동안 서울의 남쪽을 지켰다.
국보 1호 숭례문. 국보 1호라는 상징성 복원에 급급하여 원상태 로 되돌리는 행정 편의적 계획보다 실제적 상처를 만지고 치유하며 본래 이 장소가 가진 가치를 재조명하는 도시 문화적 차원의 복원이 필요한 건 아니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건축 시공 과정 자체를 상업화한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세계인의 관심을 받으며 1882년 이래 지금까지 짓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성당의 경우처럼, 국보 1호에 걸맞은 세밀한 호흡으로 그 공사 과정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10년이 넘게 걸리는 장기 기획이었더라도, 정권이 바뀌더라도, 복원 프로젝트를 연결하여 정치이념에 상관없이 문화와 국가의 상징적 사업에서는 하나가 되는 풍경을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오히려 그런 시도 자체가 잔잔한 의미가 되었을 수도 있고, 국내외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효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타고 남은 성곽과 목구조의 흔적들을 그대로 남겨두면서 작업을 진행했어도 충분히 좋았겠다. 폐허의 공간을 걸어 들어가 재난 이전과 이후의 시간과 교감하면서 사라짐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체험은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우리는 특별한 수준의 공간적 치유를 통해 집단 기억을 서서히 회복하고 부재(不在)에 대해서 충분히 사색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영영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없애고 너무 쉽게 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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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호>,<최준석> 공저17,100원(5% + 2%)
건축인 듯 건축 아닌 건축 이야기 두 남자가 걷고 보고 재구성한 서울의 일상 독서가로도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책을 인간의 생활과 사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규정했다. 비슷한 의미로 건축 역시 사람과 시대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척도가 된다. 건축은 늘 우리의 복잡한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