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를 알게 된 건,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때문이었다. 제레미 덴크는 한국에는 많이 알려져 있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의 오랜 듀오 파트너이자,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와도 자주 무대에 서는 연주자다. 이 셋은 함께 트리오 앨범을 발매한 적도 있다. 음악제의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하며, 오페라 대본을 쓰기도 했다. 2019년 리처드 용재 오닐이 자신의 리사이틀 듀오 파트너로 제레미 덴크를 소개했는데, 자신의 음악적 멘토이자 대단한 천재라고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
제레미 덴크는 미국에서 ‘천재들의 상’으로 불리는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Fellowship)’상의 수상자인데, 실제로 제레미 덴크의 뉴스를 구글에서 찾아보면, “맥아더 상 수상자 제레미 덴크 ∙∙∙∙∙∙’로 시작하는 기사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맥아더 펠로십 상’은 예술, 과학, 인류애 분야에서 탁월한 창의성과 통찰력, 잠재력을 가진 인재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필즈상 수상자인 수학자 허준이 교수도 받았던 상이다.
덴크가 맥아더 펠로십을 받게 된 배경에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통찰력 넘치는 지적인 글쓰기 능력이 지목되곤 한다. 실제로 작가이기도 한 덴크는 뉴욕 타임스, 뉴요커, 가디언 등 주요 매체에 꾸준히 글을 기고해 왔다. 그중 뉴요커에 실렸던 글들을 엮어 『Every Good Boy Does Fine』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는데 미국에서는 랜덤하우스, 영국에서는 맥밀런에서 출판되었다. 2022년 뉴요커 올해의 책으로 뽑혔고,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로도 선정되었다. 한국에서는 작년 『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책이 꽤 두꺼워 사실 펼쳐볼 엄두를 못 내다가,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예정된 리처드 용재 오닐 & 제레미 덴크 듀오 리사이틀을 앞두고 읽기 시작했다.
『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
제레미 덴크 저/장호연 역 | 에포크
이 책은 덴크는 여섯 살에 처음 받았던 피아노 레슨의 기억에서 출발해, 시간이 흘러 자신이 직접 제자를 가르치게 되는 순간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로 성장해 가는 과정뿐 아니라, 가족과 스승들, 친구와 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내밀한 고백도 인상적이다. 그들과 나눈 대화와 상처, 깨달음이 그의 연주와 생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음악이 나를 길들인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단순히 음악가의 회고록이 아닌, ‘음악이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대한 성장기라고 보아도 좋다. 그것을 덴크는 자신이 평생 겪어온 레슨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음악에 대해 잘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꽤나 짜릿한 일이므로.
6년만에 한국 무대에 서는 제레미 덴크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그의 공연을 두고 “관객들은 그가 연주하고, 입을 열면 귀 기울인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덴크는 연주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도 작가로서 능력과 스토리텔링 감각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단순히 곡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작곡가 사이에 서사를 만들어 낸다. 덴크의 그런 스토리텔링 능력은 오랜만의 한국무대에서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데, 그래미상 수상자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의 듀오 리사이틀 프로그램도 흥미롭다.
12월 26일(금) 19:30 | 예술의전당
이번 듀오 리사이틀의 주제는 <B>로, 바흐(Bach), 베토벤(Beethoven), 베를리오즈(Berlioz)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본래 클래식 음악의 ‘3B’를 바흐(Bach), 베토벤(Beethoven), 브람스(Brahms)라고 말하지만, 이번 리사이틀은 또 한 명의 혁명적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를 조명한다.
시대적으로 바로크에서 고전, 그리고 낭만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구조적으로는 비올라를 중심으로 독주에서 실내악적 형식, 나아가 오케스트라적 작품으로 확장해 가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1부에서는 비올라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과 베토벤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마술피리> 변주곡, 그리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베를리오즈의 대표작 <이탈리아의 해롤드>가 무대에 오른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솔로, 둘의 듀오, 덴크의 솔로, 또다시 듀오 연주로 진행된다. 덴크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로도 특히 주목받아 왔다. 그는 베토벤의 음악을 두고 “형식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악보의 구조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 그 구조를 통해 작곡가의 세계를 읽어내는 그의 해석 방식은 『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에서 자주 설명한 내용이기도 하다.
책장을 넘기며 느꼈던 그의 문장이, 이번 공연에서는 어떻게 소리로 바뀌어 들릴까. 궁금해진다. 오랜만에 덴크를 다시 만나며, 책을 통해 생긴 내적 친밀감 때문인지 올해 내가 준비하는 마지막 공연이 될 리처드 용재 오닐과 제리미 덴크의 공연이 조금 더 특별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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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
출판사 | 에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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