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가 말하는 『소설가의 일』
소설가의 일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리게 글 쓰는 일”
소설 쓰는 김연수가 등단 20년을 맞아 『소설가의 일』을 출간했다. 그에게 소설가의 일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리게 글 쓰는 일”이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 『소설가의 일』p. 19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김연수는 그 동안 2년에 한번 꼴로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등단 100주년이 되는 2093년까지 20년마다 산문집을 내겠다고 발표한 그는 올해 『소설가의 일』을 출간했다. 등단 20년을 맞아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일년 간 네이버의 문학동네 카페 게시판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나의 세계는 ‘영향 받는’ 1인칭
11월 20일, 『소설가의 일』 출간을 기념하여 독자와 만난 김연수는 글을 쓰게 된 계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영문학과에 진학하게 된 그는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서 문예지를 읽으면서 글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주로 했던 일은 ‘난 천문학자가 되려고 했는데 왜 영문학과에 왔지?’ 생각하는 거였죠. 이 생각은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데요(웃음). 우주가 이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형태로 되어 있어요. 그 당시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자주 갔습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다 보니 학생들이 없는 곳은 정기간행물실밖에 없었거든요. 이 곳에서 문예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평론을 읽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더군요. 이 평론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론에 실린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정도 그렇게 글을 읽다 보니까,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계속 영향을 받죠. 책에도 언급했듯이 저는 1인칭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순수한 1인칭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1인칭이에요. 사소한 일이 나중에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계간지에 실린 작품들을 읽었을 뿐인데 영향을 받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행갈이를 하고 다듬기 시작하면서 ‘시 같은 것’이 되었다. 노트 한 권을 다 채우자, 처음 쓴 시와 나중에 쓴 시의 차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정기간행물실에서1, 정기간행물실에서2 이런 제목이었죠. 재미있어서 계속 쓰다 보니, 노트 한 권을 다 채웠습니다. 처음 쓴 시와 마지막에 쓴 시의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를 쓸 때는 몰랐는데, 노트 한 권을 다 채우고 나니 앞의 시들이 못 썼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새 실력이 좀 늘었던 거죠. 남한테 보이는 것보다 자신이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더 좋은 것을 쓰면, 이전의 것이 얼마나 못 쓴 것인지 알게 돼요. 두 번째 노트를 다 채웠을 때는 첫 번째 노트를 다 버려야 했어요. 이 과정을 2년 정도 계속 반복을 했습니다. 목표는 없었어요. 잘되는 것이, 점점 나아지는 것이 좋아서 푹 빠져든 거죠.”
글쓰기는 오랜 시간 자기 자신을 격려하며 가야 하는 일
‘글쓰기’하면 으레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왜 ‘글쓰기’하면 고통을 먼저 떠올리게 될까. 김연수는 그 이유에 대해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에 출판되어 나올 책의 텍스트를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도 못 쓰거든요. 우리는 자신이 쓸 소설에 대한 자기 생각에 대한 어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어요. 이런 건 출간될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완성될 소설의 전의 전의 전 단계의 글만 쓸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글을 쓰려고 하면 고통스럽죠. 이러한 고통이 계속 반복되면 스스로에게 부정적이 되고, 결국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격려를 받지 못하면 글을 쓰기 어려워요. 글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에게 자신의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자질입니다. 글쓰기에는 샛길이 없습니다. 비법이 있다면 글을 쓰는 과정이 굉장히 오랜 시간 자기 자신을 격려하며 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 것 뿐입니다.”
김연수는 한번에 글을 완성하겠다는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쓰는 시간으로 3시간을 이야기했다. 두 시간 반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시간, 남은 반 시간은 침묵의 상태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문장을 꺼내는 시간이다.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쓰고 싶은 문장을 쓰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죠. 그래도 그 자리에서 안 일어났어요. 어쨌든, 버텨보자. 2시간 반 정도 지나면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 전까지는 ‘내가 멋진 글을 써서 보여줘야지’, ‘첫 문장은 정말 중요한 거야, 인상적인 걸로 적어야지’. 온갖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이 두 시간 반 동안 다 일어나고, 그 이후엔 침묵의 상태, 고요한 상태가 옵니다. 침묵의 상태에서 다 포기하고 아주 담백한 한 문장을 쓰는 거예요. 아무런 기교도 없는, ‘전화가 왔다’ 이 정도의 문장을 쓰는 거죠. 2시간 반 뒤에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문장이 나오는데, 이 문장으로 소설을 쓸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고 싶다면 우선 ‘들어내자’
김연수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들어내는’ 과정을 뽑았다. 소설가로서 갖는 욕심을 버리고, 이전의 경험이나 지식도 들어낸다. ‘모른다’에서 시작하는 것이 글쓰기의 첫 단계이다.
“처음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제가 가진 많은 기대, 어떤 욕망, 소설가로서의 정체성 등 여러 생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상태로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이 때는 어떤 문장도 그런 상태를 만족시킬 수 없어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이 소설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버리고, 이 소설로 좋은 평가를 받겠다는 욕심도 버리고, 최종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이 글을 읽히겠다라는 생각마저도 버립니다. 남는 건 단 하나, 글을 쓴다는 것이죠. 그 과정을 매일 반복하며 소설의 본질이 아닌 것들을 들어냅니다.”
김연수는 소설 쓰기의 최종 단계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존재의 감각에 이입하는 것을 뽑았다. 작가는 감정 뿐만 아니라 감각을 이입해야 한다. 독자는 작가가 그려낸 감각을 통해 소설 속 인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소설 쓰기의 최종적 단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거죠. 감정 뿐 아니라 감각까지 이입을 해야 합니다. 제가 물을 마실 때의 느낌과 소설의 인물이 물을 마시며 느끼는 감정은 다릅니다. 소설가인 제가 연필을 쥘 때의 느낌과 목수가 연필을 쥘 때의 느낌도 다르겠죠.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감정을 넘어 감각까지 이입해야 합니다. 독자들은 감각을 통해 감정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감각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면, 우리는 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감각의 이입이 궁극적인 소설이냐 하면, 사회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을 보면, 우리에게 슬픔이 전달되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지죠. 그런데 이게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감각적인 정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감각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입맛, 아이를 잃고 나서 잠들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을 때 느끼는 감각. 이런 감각을 안다면 ‘이제 그만해라’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거죠. 타인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공감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연습을 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것이 예술입니다.”
이어 독자의 질문에 김연수 작가가 직접 대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르는 것,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쓸 때 남은 물론 제 자신까지 기만하는 것 같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진정성 있게 쓸 수 있을까요?
'토가 나올 것 같은 원고', 즉 ‘토고’의 핵심이 이거죠. 잘 모르는 것을 계속 쓰고 있으니까, 자기 자신이 정말 역겨울 때도 있어요. 역겨운데다가 표현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고, 나 자신과 남을 기만하는 것 같고.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글을 쓰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글쓰기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이나 타인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기만하는 것 같은 느낌’은 글쓰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러한 것은 같이 가야 합니다.
작가님과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학창 시절 이야기를 보면 제게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일들이 작가님에게는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하시나요?
저는 소설가가 된 뒤로 세상을 단어 위주로 바라봅니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잖아요. 예를 들어 납치를 당했다 치면, 저는 이 경험을 영화 보듯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로 기억합니다. 안대를 씌웠다가 아니라 ‘왼쪽 귀에서 오른쪽 밑으로 비스듬하게’ 이렇게 글자로 기억하는 거죠. 사진으로 기억하면 글로 쓸 수가 없습니다. 이 공간에 대해서도 나중에 기억할 때, 그냥 기념관이라고 하면 글로 쓸 수가 없어요. 한경직 기념관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려고 해요. 회상할 때 분위기나 감정을 기억하는 것은 글이 되지 못합니다. 그 때의 단어들이 필요해요. 몇 월 며칠이었는지, 그 때의 나무 색깔은 어땠는지. 그런데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찾아봐야 합니다. 나무가 있었는데 색깔이 기억나지 않으면,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가서 확인해야 그 나무에 대해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자료로 그 무렵의 나무 색깔을 확인해서 ‘누르스름하다’ 하면, 그때서야 나무의 색깔을 쓸 수 있어요. 머리 속의 영상이나 느낌 같은 것은 소용이 없어요. 기억의 단어를 갖는 연습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작가 지망생이지만, 남에게 제 글을 보여주는 것이 두렵습니다. 부끄러움을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수없이 고치고 나서 이제 정말 더 이상은 못하겠다 생각이 들었을 때, 작품을 남에게 보여줄 용기가 생겼습니다. 작품을 보여주었을 때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긴 겁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 이 사람은 모른다. 독자도 필요 없다. 아무도 안 읽어도 전혀 상관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썼는데,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불행한 거지. 이렇게까지 생각할 정도까지 쓰면, 남에게 글을 보여줄 용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김연수는 글쓰기에 비법이나 샛길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소설가의 일』 역시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 담고 있다. 그에게 소설가의 일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리게 글 쓰는 일”이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하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소설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하는 서사예술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소설가의 일』 p. 233-234
소설가의 일김연수 저 | 문학동네
김연수의 신작 산문집 『소설가의 일』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 떠오른다. “산문은 모든 예술을 포괄한다. 한편으로 단어는 그 안에 온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자유로운 단어는 그 안에 말하기와 생각하기의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을 쓸 때보다 자유로울 단어들로, 김연수는 이 책에서 생각하기와 말하기, 쓰기뿐 아니라 어떤 삶의 비밀/태도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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