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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인 플랫폼과 대치하다

그 때 그 장소,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그 순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를 수 있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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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톤 프로젝트 <이화동>을 통하여 예전을 추억해 본다.

 지독하게 파란 어느 가을, 이탈리아 베로나 역 플랫폼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이탈리아 여행의 종착지인 베네치아로 가는 중이었다. 포근한 기온 때문에 후드티를 벗어 손에 드는 순간 어째서인지 플랫폼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세계가 멸망했는데 나만 모르고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색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철길의 침목 주변엔 잡초가 드문드문 돋아 초록초록 싱싱했고, 카푸치노 거품처럼 부드러운 햇살이 선로를 번쩍번쩍 빛나게 만들어 눈이 부셨다. 그것들은 기이하리만큼 생생했다. 


현실의 사물들이 너무 가깝고 선명하게 느껴지자 오히려 현실감이 결여되는 기분이었다. 풀과 하늘과 햇빛과 선로와 플랫폼 벤치가 인격을 가진 채 내게 본조르노?(안녕)하고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잠시 후 진공처럼 아무 소리가 없는 상태가 쭉 늘어져 순간적으로 호흡이 곤란했다. 갑자기 그런 낯선 분위기에 사로잡히자 뭔가 비현실적인 행동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럴 땐 뭘 해야 할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자 초조해졌다. 나는 내 마음에게 반문했다. 왜지? 기차를 기다릴 땐 사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잖아. 하지만 플랫폼의 분위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이건 비현실이 아니에요. 단지 가을만의 조금 특별한 한 순간인 거죠. 음악을 듣는다거나, 뭐든 감상적인 폼을 좀 잡아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압박감을 느꼈다. 기차 타러 왔을 뿐인데 가을을 타라는 거냐. 평범한 플랫폼이 갑자기 분위기 잡고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이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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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가방 속에서 음악을 주섬주섬 꺼냈다. 묘한 분위기를 버티기 힘들었고, 이럴 때 음악을 듣지 않는 건 죄악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시디플레이어의 배터리가 간당간당 메롱이었다. 지난 밤 맥주를 마시며 내내 켜놓고 있었던 기억과 진득한 숙취가 동시에 밀려왔다. 긴 여행에 시달린 내 체력도 딱 방전 상태라는 생각이 들자 시디플레이어에게 감정이 이입되려 했다. 우린 둘 다 지쳤고, 외롭고 불쌍하구나. 그런데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별 것 아닌 풍경에 십대 소녀처럼 쉽게 감상에 빠지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는 분위기고 음악이고 나발이고 무시한 다음 벤치에 가만히 앉아 적극적으로 멍 때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음악을 못 들으면 직접 부르면 된다네, 친구. 슬렁슬렁 지나던 바람이 내게 훅하고 속삭였다. 옆머리가 살짝 나부꼈다. 오오, 아침에 귀 옆에 딱 붙이느라 애 먹은 내 머리카락을 함부로 헝클어놓다니, 만만치 않게 집요한 플랫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옳은 충고였다. 아무도 없는 이국의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면 멋질 것 같았다. 불러볼까…. 생각만 해도 몸 깊은 곳 어디에선가 예비전력이 가동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사가 전부 기억나는 노래가 뭐 있을까.


 나는 이런 저런 곡을 흥얼거려보았다. 그러자,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엷어졌다. 나는 비로소 이상하고 감상적인 플랫폼이 원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듯했다. 문득 로드리게즈(Rodriguez)의 슈가맨(Suger man)이 떠올랐으나 그 플랫폼의 분위기랑 잘 맞지 않는 듯했다. 다음으로 포넌 블론즈4Non Blonds의 왓츠업(What’s Up)이 생각났으나 앞부분 가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산울림의 모든 노랫말을 다 외우고 있으니 그걸 불러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산울림은 한 번 부르면 1집부터 13집까지 정규앨범을 쭉 다 불러야 성에 차니까, 곤란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곡이 하나 떠올랐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이었다. 나지막이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보는 동안 그 플랫폼엔 나 혼자였다. 가을의 맑고 부드러운 날씨란, 배낭여행중인 낯선 이방인에게도 공평하게 포근했다. 뜬금없이 이탈리아에서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이 떠오른 건 어떤 조화인지 알 수 없었으나 참 잘 어울렸다. 별 것 없는 기차역 플랫폼이 그 순간 무척 경이롭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그동안 무수히 보고 지나온 아름다운 건물들과 골목들과 미술들과 바닷가의 예쁜 마을들을 그 플랫폼 하나가 압도해 버리는 듯한 감명이 철렁였다. 


그 장면과 그 순간을 다른 어떤 장소와 시간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분명 두뇌의 미적 판단력이 일종의 오작동을 일으킨 것일 뿐이었겠지만 그 플랫폼의 가을 햇빛은 특별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그해 오월 햇살 그대의 눈빛과 머릿결까지’ 라는 노랫말을 부를 때 어이없게도 눈에 눈물이 뾰로롱 생겨났다. 헤어진 옛 애인이 떠오르고 그녀의 머릿결과 표정과 내게 건네던 미소와 함께 ‘이화동’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던 빈티지 테이블이 생생하게 기억나버렸다. 가을이란 하늘만 높고 맑게 하는 계절이 아니라 한 남자의 기억도 깊고 맑게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 선명한 추억 때문에 아름답게 눈이 부셨다. 부시다 못해 아렸다. 그 시절이 내 생애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순간으로 아름다웠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느낌이었다. 즉시 가슴에 압통이 밀려왔다. 돌아갈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는 가슴이 아팠다. 베로나의 ‘푸르게 빛나던’ 가을 햇살이 그것을 쿡 찔러버린 것이었다.  



 이건 무슨, 터프하게 여행하다 말고 대차게 가을을 타면 어쩌나? 나는 감상에 빠져 ‘이화동’을 여러 번 부르면서도 좀 남세스러웠다. 누가 플랫폼에 나타나 “저기 봐, 어떤 동양인 남자가 여행 가방을 끌어안고 질질 짜!” 하며 신기하게 구경하거나 카메라로 찍을까봐 쑥스러웠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대합실로 나갔다. 기차 시간은 십오 분 남아있었다. 


 간단히 세안을 하고, 음악을 듣기 위해 건전지를 사서 플랫폼에 다시 돌아오자,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며 서있었다.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플랫폼 풍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 혼자 있던 플랫폼은 세상에 없는 어떤 사차원의 관문을 통과해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인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또 가슴을 아련하고 애틋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오 분 전의 시간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니 또 아팠다. 여행이 끝나간다는 게 느닷없이 슬펐다. 


이러는데 몇 년을 사귄 사람을 떠올리며 아파지는 건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픔이 다가 아니었다. 비록 비현실적인 플랫폼은 사라졌지만 가슴속에는 그리움과 애틋함과 그 시절을 아름답게 보낸 시간과 그것을 기억한 순간의 감정이 비현실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사실 아픈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되기 위해 현실의 대기권을 통과하는 마찰인 것이었다. 



 만약 현실에서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되면 도의적으로 당연히 잊을 기억이고, 그렇다면 사람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을날의 비현실적인 플랫폼을 갑자기 만나더라도 굳이 가슴을 저미며 아파지진 않겠지만 아직 솔로인 이상 나는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순간 빌어먹을 옆머리가 또 바람에 휙 날리면서 바보 같은 모양으로 뻗쳤다. 현실의 기차가 일으킨 바람은 내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열차에 오르기 전 고개를 들자 새파란 가을 하늘이 잔인할 만큼 아름답게 느껴져 다시 울컥했지만 간신히 참고 배낭을 어깨에 멨다. 베네치아에 도착할 때까지 이화동의 멜로디와 가사는 끝내 떨쳐지지 않았다. 사실, 떨치고 싶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문을 열어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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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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