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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작은 곳에서 완성되는 행복

한 해를 마치는 12월에는 수첩 다시보기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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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내지에 있는 매일 매일 기입란에는 중요한 일 년 계획에 따라 매일을 계획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이러한 습관은 아이들이 학교생활의 중요한 일정을 미리 준비하고 소화하는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현재의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 방학은 아이들에게는 거의 천국과 다름없었다. 요즘 같은 학원의 구속은 얼씬거리지조차 않던 방학은 그야말로 공부와 멀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천둥벌거숭이처럼 자유를 만끽하던 꼬마들에게 다가오는 개학일은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중 가장 해결이 안 되는 큰 고민은 매일 매일 일어난 사건과 감정을 기록해야 하는 일기장이었다. 요즘에는 지나간 방학기간 날씨를 모조리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만큼이나 간단하지만, 당시 아이들에게는 공포에 가까웠고, 날씨만이라도 적어둘 걸 하는 깊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방학 중의 골칫거리였던 매일의 신변잡기와 단상을 기록하는 숙제는 없어졌다. 아마도 상급학교 진학과 연관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을 방학 중에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반영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대학입학을 목전에 둔 고학년이 되어서야 무언가 성취한 것을 날짜에 표시하기도 하고, 가위표를 처가면서 전리품처럼 남기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날짜 근처에 적었던 메모들은 계획하기보다는 얼른 힘겨운 시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격렬한 구호에 가까운 격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학 시절 연초에 한두 번 일 년 치 계획을 원대하게 세워 본 적은 있으나 격랑의 80년대, 시대 상황과 대학에서 맛본 낭만으로 인하여 계획서에 매일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일은 번번이 실패였다. 한 해가 어둑어둑 저물 때가 되어서야, 일기장이 준비되지 않은 채 개학일이 다가선 ‘국민학생’ 마냥 마음이 스산해지기 일쑤였다. 수첩과 다이어리 적기에 상대적으로 시간 할애를 많이 하기 시작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자유가 구속된 군대생활을 하면서부터이다. 정해진 규칙과 해야 할 일이 명확하고,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군대의 일정은 수첩을 자연스럽게 꺼내 들어 메모하게 되었고, 지나간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수첩을 통하여 확인하게 하였다. 그렇게 군대 기간 습관을 들인 수첩사용은 대학원 생활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졌다. 가끔 열어보는 대학원 생활의 수첩은 각종 연구 아이디어와, 연구일정들로 방금 쓴 것처럼 온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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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치는 12월에는 수첩 다시보기를 시도한다. 매달 계획 중에서 사선으로 표시되지 않고, 세모 표시와 해야 할 일로 남아 있는 일들을 중요도에 따라 형광펜으로 표시한 후, 가급적 할 수 있는 일들은 한 달 내에 마무리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또한, 다음 해의 다이어리가 나오면 득달같이 달려가 마음에 드는 내년 일년지기를 모셔온다. 12월내에 해결되지 않은 해야 했던 일들은 내년 수첩으로 이관시키고, 가족 대소사를 수첩에 표시해두고 나면 마음에 어수선함이 사라지고 새해맞이가 한결 수월해진다.


처음 수첩 쓰기를 시작한 때는 수첩의 크기가 큰 것을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생활 일부가 되면서부터는 점점 사이즈가 작아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로 변했다. 그리고 언제나 펜과 함께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럭저럭 꼼꼼하게 일 처리를 해내는 이면에는 수첩이라는 일등공신의 덕이 상당하다. 수첩 사랑이 커진 언제부터인가 나의 가방에는 3∼4년 치 수첩을 함께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기억력이 신통하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지만,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찾기에 이보다 훌륭한 정보원은 없다. 특히 과거 수첩에 적혀 있던 아이디어나 하지 못했던 염원들은 3∼4년 치 수첩을 같이 가지고 다니면서부터는 당장 해야 하는 졸갑증이 없어지게 되었고, 느긋이 일의 연속성을 찾아가는 본인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목록에는 다음 해 다이어리가 꼭 포함되어 있다.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음 해에 일어날 아이들과의 이러저러한 일들이 너무 궁금하고, 때론 다이어리를 적고 계획하는 아이들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편 대견스러움이 밀려든다. 하지만 요즘처럼 복잡다단한 세월을 사는 아이들이 수첩을 기록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지나간 매해를 유추하면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덜 복잡한 시대를 거쳐 온 나를 상기해 보아도 그저 성년 이후에나 몸에 붙인 수첩 쓰기를 우리 아이들이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아직 자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더없이 귀중한 한해 한해를 만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힘들어도 넘어야 할 또 하나 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오래전 대규모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했던 한 공무원의 기억이 생생하다. 평상시 회의에서도 유독 관련된 자료, 지나간 데이터 및 숫자들을 잘 기억해주어서 잠시 멈출 수도 있는 회의 흐름을 잘 연결시켜 주는 분이었다.  언젠가는 현장에서 이루어진 시설 브리핑에서 상당히 높은 분들과 동행하던 모습을 보았는데, 이때도 역시나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리핑하는 분이나 가이드하는 분들도 쩔쩔매는 어려운 질문에 각종 자료를 척척 대면서 답변해내는 이분의 모습은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수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한 기회에 이분을 다시 뵐 수 있었다. 동석한 식사자리에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자리로 영전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과거 모습과 영상이 겹치면서 당연히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식사 도중 전화를 받으면서 펼쳐놓은 그 분의 수첩을 보자, 그 모든 게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정밀한 글씨로 적혀있는 그분의 업무 수첩을 보면서 그제야 모든 것이 관통되었다. 놀랍도록 척척 숫자와 자료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업무에 해박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분의 수첩에서 나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가서는 새해에도 수첩 사랑에 대한 강권은 계속될 것이다. 수첩을 보면서 계획을 세우고, 수첩에서 계획된 일들이 완성되는 보람을 느끼고, 한 해의 행복을 설계하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빠가 늦게 몸에 붙인 수첩 사랑을 우리 아이들은 꼭 독립하기 전에 지녔으면 좋겠다.

 

수첩 적기를 강조하던 어느 설날(2012. 1. 23)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강조해온 수첩 적기가 아이들 입장에서는 참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저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수첩 적기의 선순환 기능은 사라지고 책임감만 가득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의 수첩 적기는 며칠만 거르면 자연스럽게 일 년 내내 담장을 쌓게 된다.


설날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건넨 후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둘러앉았다. 먼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수첩을 가지고 식탁에 둘러앉아서 중요한 가족 기념일부터 수첩에 기록하게 하였다. 양가 조부, 조모에서부터 친척, 부모님, 가족들의 생일과 중요한 행사를 모두의 수첩에 해당하는 일자에 같이 기록한다. 어른들 생일은 음력으로 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 또한 아이들에게 확인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가족 행사를 기록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점은 행사를 대하는 어른스러움이다. 할아버님 생신이 다가오면 조금의 용돈이라도 모아서 생신 선물을 스스로 준비할 계획을 미리 세워야 함을 일깨워준다. 아빠가 어떻게 준비하는지 설명해주는 것도 좋은 지침이 된다. 가족행사를 모두 적고 난 후에는 구성원 각자 스케줄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수첩에 중요한 날짜로 기재하도록 한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면서 대략 언제 어떠한 일들이 생길 것이며, 아이들 역시 그날에는 학교 친구들과 약속을 미루고 가족 행사에 참여하여야 함을 알려주었다.


전체적으로 일 년의 연간계획표를 놓고 모두가 중요한 일자를 공유하고, 이날은 가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날로 인식했다는데 큰 소득이 있었다. 아울러 수첩 내지에 있는 매일 매일 기입란에는 중요한 일 년 계획에 따라 매일을 계획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이러한 습관은 아이들이 학교생활의 중요한 일정을 미리 준비하고 소화하는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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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필요한 순간들 여기태 저 | 카시오페아
이 책은 지난 10년간 저자가 경험한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졸업까지 아빠만이 할 수 있는 인생 멘토링이 풍부한 사례와 더불어 실려있다. 여교수는 아이가 힘든 순간에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 그것이 아빠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조언한다. 또한 아이가 인생을 살면서 넘을 굽이길을 현명하게 잘 넘어갈 수 있도록 좋은 습관을 몸에 붙일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표현할 방법도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아빠들과, 아빠가 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엄마들에게 적절한 길을 제시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관련 기사]

- 어린이를 위한 ‘오싹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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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필요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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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여기태

현 인천대학교 교수. 대부분의 한국 아빠들처럼 육아는 뒷전으로 앞만 보고 살았다. 해외체류 기간을 거치면서 자녀들의 생각, 자녀교육, 자녀독립에 대한 무지함과 절실함을 느끼고, 특히 아빠 역할에 대한 생각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살면서 아이가 힘든 순간에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 아빠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빠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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