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
나만 알고 싶은 시집
유일한 나만의 시집, 김휘승의 『햇빛이 있다』
사람들에게 잊힌 책인데다 이제는 더 이상 구해볼 도리가 없는 책을 소개하는 데에는 ‘어떤 심보’가 아니라 ‘어떤 심정’이 간곡하게 배여 있다. 구할 수 없는 책이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 즉, 이 책을 다시 출간해달라는 요청이다.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에게 용이하게 용돈을 타내기 위하여 “책을 사야 해서요”라고 말했더랬다. 나도 돈을 쓰고 싶어서였을까. 돈을 쓴다는 것은 최소한 면목을 세우는 일이란 걸 처음 알게 된, 어렸을 때의 일이다. 집에 있는 것이 무료하고 답답할 적에 무작정 신발을 신고 바깥으로 나오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었다. 일단, 골목을 빠져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진출을 했다. 어린 아이가 금은방이나 약국을 갈 수는 없으니까, 문방구 아니면 서점엘 갔다.
숨어 있기 좋아서 도서관을 좋아했다
문방구 혹은 서점 주인이 아무리 아이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경만 하면서 그 좁은 가게를 오래오래 서성대고 있자면 눈치를 주었다. 문방구에서는 20분 정도가 최대한의 구경 시간이었다. 서점은 좀 달랐다. 한 시간은 넉넉히 보장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눈치가 보여서, 서너 번에 한 번 꼴로 돈을 내고 책을 사야 주눅들지 않고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쓱싹쓱싹 재빠른 솜씨로 종이 한 겹, 비닐 한 겹, 책에 포장을 해주는 서점주인에게 돈을 내미는 일이 그때는 왜 그렇게 뿌듯했을까. 집에 돌아와 TV 채널권을 부모에게 빼앗긴 시간대에, 어린 나는 배를 깔고 누워 문고판 외국문학을 읽어댔다.
좀더 커서는, 학교에서 도서관이란 곳을 알게 되어 책을 읽었다. 잘 노는 아이들은 주로 화장실에서 모여 놀고, (더 잘 노는 아이들은 아예 학교 바깥으로 나가 놀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교실 안 자기 책상에 담겨 주구장창 문제집을 풀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복도에 모여 깔깔 웃고 크게 떠들었지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그저 숨어 있기 좋아서 도서관을 좋아했다. 주로, 세계문학전집 같은 류에 고개를 파묻고 지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에는 ‘대학 도서관’이 장관이었다. 무엇보다 시집이, 아무도 읽지 않은 채로 빛바래 가는 시집이 어마어마하게 빼곡했다. 한 권 한 권 빠짐없이 읽어댔다. 어떤 시집에는 무감했고 어떤 시집에는 탄복했지만,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 시집이었다. 왜 얼굴이 달아올랐는지 요약은 불가능하지만, 쓰고 싶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는 있다. 왜냐하면, 그럴 때 나도 모르게 나는 시를 썼으니까.
독서에 대한 나만의 기준은 삶에 대한 나만의 기준으로 확장된다
서평을 연재하다 보니, 사람들이 왜 책을 읽는지가 궁금해진다. 어쩌다 내가 책 소개를 이리 천연덕스레 하게 됐는지도 궁금해진다. 책을 추천하는 문화 자체가 나는 석연치가 않다. 범람하는 권장도서목록이 짐짝 같다. 일생에 꼭 읽어야만 한다는 책이 이렇게나 많고 고루하다는 것이 불편하다. 독서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두가 지향하는 바를 모사하고 사는 자신의 양태에 대하여, 어딘지 모를 의구심과 불안을 독대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남들과 똑같이 사는 맹목에 대한 회의감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혜안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한마디로, 지혜롭고 자유롭고 싶어서가 아닐까. 책을 추천하고 추천된 책을 따라 읽는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일일까.
책을 읽는 일도 여느 경험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연속경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안목이 생긴다. 실패 자체가 곧 멋진 경험이며, 성공의 경험보다 더 튼튼한 면이 있다. 어떤 허위에 대하여 비로소 눈을 뜨는 일이 안목을 만드는 시작이다. 잘 팔린다는 책, 유명하다는 책, 제목에 현혹된 책, 작가와 출판사에 현혹된 책 등등에 대하여,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 이것이 별로인가?”라는 질문은 자기정체성을 파악하기에 상당히 편리하다. ‘별로’라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내 자신을 향하여 세부적인 질문들이 생겨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가치기준이 필요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며, ‘진짜 원하는 것’을 알아채는 몇 가지 기준이 탄생되기 마련이다. 독서에 대한 나만의 기준은 삶에 대한 나만의 기준으로 확장된다. 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나의 삶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나는 어째서 이 시집이 별로인가?”내가 동시대의 시집들을 섭렵하며 읽기 시작했던 무렵에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암담한 질문이었다. 그 암담한 질문들에 갇혀 지내면서, 누구의 안목도 믿지 않은 채로, 아무도 좋아한 적 없는 시집을 찾아 헤맸다. 쉽게 찾아지지 않았고 그러다가 내 마음에 드는 시는 내가 써야겠다는 건방진 착각을 옹골차게 하게 됐고 그때부터 시를 끼적였다. 내 마음에 드는 시를 내가 쓸 수 있다는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좌절에 봉착했을 때에 ‘아무도 좋아한 적 없는 시집’을 만났다. 정말로 좋았다.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가 쓰고 싶었던 시가 이런 것이 아닐지 어렴풋하게 예감했고 그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질투심 때문이었을 수도, 열등감 때문이었을 수도, 누가 이미 이런 세계를 부려놓았구나 싶은 낭패감 때문이었을 수도, 너무너무 좋아서 화색이 도느라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집은 그때 이후 줄곧 유일한 ‘나만의 시집’이다.
199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은 이후로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 같고, 이 시인을 만난 적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한 편 정도를 인용하려고 시집을 펼쳐 읽다가 꼬박 하루가 갔다. 시인의 숨결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진지해서, 시집 속에서 한 편을 꺼내었다가는 이내 그 문장이 바스라질 것만 같다. 그래도 옮겨 적어본다. 평소에 귀퉁이를 접어둔 시들은 피했다.
늙은 소문처럼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질하는,
갑자기 욕설로 밀려오는 파도, 파도.
살빛을 숨기고, 미처 가릴 새 없이 파도처럼 마주치는 사람에게, 오늘 지금의 때가 아니다고, 미리 준비한 말 한마디로 얼굴을 덮고, 오른쪽 왼쪽 교대로 외눈을 해가며, 사람이 욕설의 파도처럼 옆구리를 흠뻑 적시길 기다린다.
전혀 다르게 들리는 너의 말과 나의 말이 어쩌면 같은 것을 얘기하고 있는지도 몰라, 흔한 사람을 희귀하게 코앞에서 보는 오른쪽 눈과 왼쪽 눈, 그런 밀려옴.
- 김휘승 「살빛을 숨기고 2」전문, 『햇빛이 있다』
사람들에게 잊힌 책인데다 이제는 더 이상 구해볼 도리가 없는 책을 소개하는 데에는 ‘어떤 심보’가 아니라 ‘어떤 심정’이 간곡하게 배여 있다. 구할 수 없는 책이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 즉, 이 책을 다시 출간해달라는 요청이다. 어쨌거나 이 글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만 알고 싶은’ 책은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책을 ‘소개한다’는 모순을 자연스레 극복한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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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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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햇빛이 있다』에서 시인은 사람의 상태에서 식물의 상태로 몸바꿈하려는 욕구, 사람의 상태에서 짐승의 상태로 몸바꿈하려는 욕구, 그리고 그 몸바꿈을 자제하는 욕구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아니, 보여준다기보다 그런 상황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것은 몸바꿈의 주체가 나타나지 않는, 혹은 나타남을 지우는 독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