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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머리맡의 시집 한 권

박서원의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 내가 좋아하는 시집들을 한 권 한 권 들춰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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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떠나기 위하여 출발을 하고 도착을 하고 또다시 떠나고 도착을 하는 이 여행의 와중에 가장 여러 번을 읽을 시다. 좋은 시를 만난 감탄이나 전율 같은 것도 너무 호들갑스러워 나는 다만 눈을 꼭 감고 잠을 잤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에 가방을 꾸릴 때마다 가장 오래 서성이며 신중하게 결정하게 되는 건 역시나 책을 한 권 고르는 일이다. 이번 여행엔 세 권의 책을 챙겼다. 두 권의 소설집은 고민 없이 결정했는데 시집 한 권을 더 챙기려고 욕심을 내니 결정이 어려웠다. 가방을 싸다 말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들을 한 권 한 권 들춰보기 시작했다. 시집은 나에게 반드시 여행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 가장 질척한 감정일 때에 나를 추스를 수 있게 힘이 되어주어야 하고 가장 적적한 시간일 때에 나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다정함이 있어야 하고 가장 모국어가 그리울 때에 모국어의 쫀득한 질감을 선사해주어야 한다.

 

후보 시집들이 방바닥에 수북하게 쌓여갈 때에 먼지가 앉은 오래된 시집 한 권을 빼어 들었다. 몇 페이지를 넘겨보고 표지를 어루만지다가 가방 속에 넣었다. 그렇게 하여 지금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잠이 드는 시간과 차를 마시는 시간과 창 밖 구름을 바라보는 일이 지루해지는 시간마다 이 시집을 자주 들춰 한 편 한 편 다시 읽었고 머리맡에 고이 두었다.

 

난간위의고양이.jpg

 

아무도 이런 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이 시집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 한마디만 하자면, 이제 더는 아무도 이런 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고 말해둘 수 있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성'이란 세계가 명백하게 어떤 식으로 존재하며 그 세계는 얼마나 힘이 있고 다정하고 무한한지, 그 매력을 여성인 내가 처음 맛본 시집이라 말해둘 수 있겠다. 여전사의 페르소나로 무장한 시인들도 많았고 모성적 세계관을 새로운 목소리로 소화한 시인들도 많았고 젠더 의식으로 충만한 날카로운 시인들도 많았으며 여성적인 모티브들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여성성을 뽐내는 시인들도 많고 많았지만, 여성인 나에게 그런 것들은 어딘지 모르게 규격화된 목소리로 들려 불편했던 시절의 일이다. 여성의 목소리는 너무 섬세하여 너무 작거나, 너무 날카로워 다소 신경질적인 것으로 느껴져 답답하게 느껴졌던 그 시절에, 이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를 만났다. 박서원 시인의 목소리는 참으로 후련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향해 저항의 몸짓을 보내는 동시에 자기자신을 향하여도 줄기차게 저항의 몸짓을 보내고 있어 가장 여성다웠다. 아니, 시인다웠다.

 

『난간 위의 고양이』는 박서원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아무도 없어요』에 이어 박서원은 여성성이라는 유기체가 어떻게 성숙을 하는지를 너무도 태연스레 보여줬다. 아직 20대였던 그 시절의 나는 이 시집에게 크게 힘을 얻어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기대로 가득할 수 있었다. 입게 될 상처와 허름해질 육체와 부끄럽게 되거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될 모든 풍상 들에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꿈은 톱날, 찬란했네 머릿속 깊은
경련의 갈대숲으로 네 갈래
떨어져나가는 팔과 다리
나는 길가에 버려진 헌 구두처럼 굳게
침묵했네
침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겨울 비 오는 밤의 외투였던
내 고요한 타락을 위해서
바로 나였던 네 토막의 새로운 비명을
위해서 
- 「날마다의 꿈, 나의 절단식」 부분


박서원은 모든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흔쾌하다


침묵을 위하여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장 차갑게 구분할 때에 가장 태연스러운 어법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생물체들을 풍경이나 은유가 아니라 내가 곧 다시 그로 탄생할 둔갑의 대상으로 연결 지어 숙고해야만 하며 그 연결의 담당기관은 온통 육체여야 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배웠다. 또한, 말하기 시작한 것에 관하여는 거침이 없어야 하며 거침없음은 과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호함에 의해서만 오롯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가장 시적인 재능은 시 속의 문장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해내는 능력이며, 이는 시를 쓰기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셈이다. 박서원의 시를 제외하면, 감히 나는 모든 시는 엄살에 가까울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박서원은 모든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흔쾌하다. 그런데 흔쾌함을 자랑하지 않아서 더없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너무 고요하고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잔혹하다고 느껴질 정도랄까.

 

무너진 그대로 오세요
난 옆집, 양말이나 뜨며 창밖을 큼큼거리는
고양이 노파가 아니랍니다
그래도 조금은
당신의 기워진 살과 흐르는 얼룩을
채에 거를 줄 알아
비 오는 날 벼락쳐 정전 되어도
창틀 앞 작은 동산 라일락 향기
쟁반에 담아올릴 수 있답니다
내가 쭉정이로 열병을 앓을 적에
다락방으로 오롯이 모여들던 흰 눈의 빛들
숨을 헐떡거리며 흘린 눈물은 눈물이 아니었지요
참을 수 없으면 참을 수 없는 그대로 오세요
세상은 박제된 독수리나 매랍니다
야단쳐도 모르고
칭찬해도 모르지요
난 기다리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앞치마를 두르고 생선 구워요
산타클로스는 지옥에서조차 버려진 영혼의 굴뚝에만
찾아온다는 걸 아시지요
깨진 그대로 오세요
깨어져서 이를 앙다물게 돼도 그대로 오세요
괜찮아요
-  「그대로 오세요」 전문

 

멀리서 손짓을 하며 '당신'을 부르는 이 고요한 노래를 듣는 자는 그 손짓에게 도착도 하기 전에 다 깨어져 다 무너져 부숴질 것만 같은 예감을 준다. 그래도 괜찮다니 그렇게 다 부서진 채로라도 도착을 하고 싶게 만든다. 도착을 하고 싶게 만들다니. 위의 시는 언제나 떠나기 위하여 출발을 하고 도착을 하고 또다시 떠나고 도착을 하는 이 여행의 와중에 가장 여러 번을 읽을 시다. 좋은 시를 만난 감탄이나 전율 같은 것도 너무 호들갑스러워 나는 다만 눈을 꼭 감고 잠을 잤다. 그리고 꿈속에서 바베큐 굽는 냄새처럼 나는 냄새를 맡곤 했다. "나는 웃네 / 나는 내 꿈의 바베큐 / 꿈은 짐승이 아니라는 내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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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위의 고양이 박서원 저 | 세계사
서경덕의 사상은 "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유기론(唯氣論)"이라고도 말한다. 그는 "이기설"과 "태허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물의 생성과 우주 변화의 원체(原體)로서의 "기"를 인정하고 있다. "기"는 하나이지만 동시에 음양(陰陽)의 둘이기도 하다. 이 "기"가 지니고 있는 이(二)의 성질이 서로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모든 존재들이 성립하고 우주의 모든 존재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의 집산(集散)"이라는 것이다. “박서원의 언어 속에 드러나는 자기살해의 욕망은 여성의 모욕당한 육체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이 숨어 있다. 그녀의 시쓰기는 그 모욕의 저주를 따돌리기 위한 축사의 의식이다.” ―김정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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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난간위의 고양이

<박서원> 저4,950원(10% + 5%)

“박서원의 언어 속에 드러나는 자기살해의 욕망은 여성의 모욕당한 육체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이 숨어 있다. 그녀의 시쓰기는 그 모욕의 저주를 따돌리기 위한 축사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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