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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깐느의 밤의 연주회

문학청년의 깐느 입성기 프랑스 남부 깐느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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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불행히도 기타를 만나게 되었다. 각진 머리에 긴 목, 호리병 같은 몸통을 가진 이 괴물은 제 몸에 달린 여섯 개의 줄로 사람의 귀를 매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처럼 매일 밤마다 나를 간지럽혔다.

기타를 잃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불행히도 기타를 만나게 되었다. 각진 머리에 긴 목, 호리병 같은 몸통을 가진 이 괴물은 제 몸에 달린 여섯 개의 줄로 사람의 귀를 매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처럼 매일 밤마다 나를 간지럽혔다. 중학교의 4층 음악실과 화장실 사이에 창고처럼 남겨진 잉여공간에는 밴드부가 있었다. 한 선배는 나를 앉혀다가 김민종의 ‘착한 사랑’을 불렀다. 반주는 오로지 통기타였다. 선배는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불렀고, 신성우의 ‘서시’를 불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었는데도, 그러니까 선배는 이제 열여섯 살이었는데도, 정말 흐느끼며 불렀다.


  “이거면 다 넘어와.”

 

바다소년


운동장 단체 조례 때면 단상에 올라가서 애국가를 지휘하던 선배는 지휘봉을 나에게 물려주고 졸업했다. 나는 신탁을 계시 받은 사람처럼, 정말 신이 들린 듯이 지휘를 했다. 어디서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면 아직도 손가락이 근질근질한 게 그 증거다. 스크레치. 어쩌면 이 단어가 나의 10대를 요약해낼지도 모르겠다. 긁다, 할퀴다, 악마, 드라큘라 등의 의미를 가진 이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시절이 나에게 있었다. 열일곱의 나는, 오선지에 그려진 콩나물 대가리를 먹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꾸려나갔다. 마치 슈퍼마리오가 버섯을 먹기 위해 열심히 점프하는 것처럼 악보 위를 뛰어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여수국제청소년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음악분야의 1등은 상금과 더불어 앨범제작을 지원해준다고 했다.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여긴 우리 밴드는 밤낮없이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쟁쟁한 실력자들에게 밀려서 부산대표로는 선발되지 못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경남권의 예선이 아직 치러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밴드라면 악기가 몇 개인가. 기타 두 대에 베이스 키보드 드럼까지……. 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두 세 시간의 거리를 오고갔다. 결국에는 마지막 티켓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부산 영도의 촌놈들이 국제대회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본선의 무대에서 우리는 정말로 멋지게 패배했다. 보컬은 땅을 바라보며 노래했고, 드럼은 스틱을 날려먹었다. 키보드는 수전증이 도져선 벌벌 떨어댔고, 베이스는 볼륨을 끄고 연주했다. 나는 무대 위에서 기타 줄을 뜯어먹는 퍼포먼스를 보일 예정이었지만 제자리에서 머리만 까딱까딱 움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관객의 무언가를 긁어내고 있었다. 스크레치는 13개의 팀 중에서 11위를 차지했다.

 

  “기타로 내 인생을 결정했어요.”

 

나는 부모님을 앉혀두곤, 난생처음 무릎을 꿇었다. 기타 가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기도 하고, 이불 속에서 기타를 껴안고 자기도 하고, 수업 내내 플라스틱 자로 크로매틱(반음계씩 운지하는 주법)을 연습하는 지경이라고, 기타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말을 했다. 부모님은 그날 즉시 기타를 처분해 버렸다. 나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어쩌면 원망의 대상은 그 시절의 가난에 대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건 틀려먹었다. 적어도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은 가난하지 않았으니까. 부모님은 그들의 삶과 삶과 삶을,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에게 바쳤다. 그러니 내가 부모님을 원망했다는 것은 불완전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기제였을 것이다. 부모 탓을 하는 게 가장 쉬웠을 지도 모르는 열여덟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기타가 부모님을 울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녀석은 더 이상 나의 영혼을 울리지 못했다.

 

레드카펫과 요술 양탄자

 

바다소년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1월의 어느 날, 깐느를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갑작스레 웬 깐느냐겠지만, 어쨌든 프랑스의 깐느가 맞다. 매년 5월이면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그 깐느,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인 깐느, 영화광의 도시인 깐느, 그냥 깐느이자, 하물며 깐느이며, 온통 깐느인 그 깐느 말이다. 기타를 잃은 자리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쩌면 영화가 그 자리를 메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가끔 에릭 로메르가 찾아와선 녹색 광선으로 땜질을 해주었지만 하룻밤일 때가 많았다. 어쨌든 그로 인해서 프랑스 영화에 매혹되었다. 나는 텅 비어있는 그 자리를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 오랜 밤을 스크린 앞에 앉았다. 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에 굶주리는 불치병에 걸려버렸고, 결국에는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먹어 삼키기에 이르렀다.

 

많은 도시의 영화제들이 좋은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중 깐느 영화제는 당연 최고의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연인을 소개시켜 주기에 앞장섰는데, 페데리코 펠리니와 마틴 스콜세지와 이마무리 쇼헤이와 빔 밴더스와 에밀 쿠스트리차, 스티븐 소더버그, 데이비드 린치, 크로넨버그, 코엔 형제와 타란티노와 켄 로치와 라스 폰 트리에와 알랭 레네, 구스 반 산트, 폴 토마스 앤더슨, 에드워드 양,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미학적 체험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삶의 양식을 필름에 담아 주었고, 나는 또다시 신탁을 받은 아이처럼 신들린 듯이 그들과 접선했다.

 

하지만 직접 본 깐느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거창하고 화려했다. 호텔은 웅장했고, 로비에는 무거워 보이는 시계와 보석과 가방들이 유리관 속에 담겨 있었다. 명품 샵과 영화제라니, 나는 불편한 이질감을 느꼈다. 하긴 영화는 산업적인 요소가 다분한 장르다. 게다가 세계적인 스타들이 찾는 곳이지 않는가. 깐느에서 영화제가 성사된 것도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관광지이기 때문이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도시는 나에게 유토피아로 남겨두는 게 좋을 뻔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없는 도시거나 영원히 가서도 안 되고 불러보아서도 안 되는 유령 같은 그런 도시 말이다. 깐느를 가기 위해서 들렀던 작은 마을의 골목과 차양 아래로 떨어지는 햇빛의 조각, 불어오는 지중해풍 산들바람과 한적한 포구에서 쉼 없이 포말을 만들어내는 파도를 바라보는 정도에서 멈춰야 했다. 사랑하는 감독들과 그들의 영화를 본 이후에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을 상상하면서, 등퇴장하는 레드카펫의 발자국을 그려보며 거기서 멈춰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행과 함께 밤의 깐느를 걸었다.

 

바다와 인접한 펍에 앉아서 무알콜 칵테일을 마시기도 했고, 구석구석 숨어 있는 감독들의 이름을 발견하기도 했다. 거리는 온통 붉은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레드카펫을 걷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일행의 대장인 박 교수님은 색소폰을 맛깔나게 부는 분인데, 높은 야자수를 무대로 즉석 연주를 해주었다. 나는 이국의 파도소리와 페도라가 잘 어울리는 이 신사의 연주에 도취되어 함께 흥얼거렸다. 그 연주 덕분일 테다. 상가 앞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 거리의 악사들과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통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듀엣이었다. 한 평생 거리에서 거리로 음악을 연주했을 것 같은 노신사 두 분이 이방인을 앞에 두고 멋진 연주를 선사했다. 답가가 빠질 수 있겠는가. 색소폰을 든 박 교수님은 순식간에 트리오로 동화되어 <베싸메 무쵸>를 연주했다. 박자가 어긋날 때마다, 악사들은 주름진 눈썹을 서로 찡긋하며 조화롭게 화음을 보태주었다.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멈춰 섰고, 뒤를 돌아보았으며, 동전을 던지기도 했다.

 

 “오 군도 연주를 하지 않나?”

 

바다소년

 

 

박 교수님은 어떤 악기라도, 어떤 음악이라도 좋으니 내게 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통기타 한 대가 불쑥 주어졌다. 잠깐 숨을 들이마시며, 그렇게 기타와 조우했다. 코드를 짚어보았다. 손끝에서 현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왼손가락을 프렛 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면 된다. 그 긴 시간동안, 기타를 잡은 날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분명히 멀리하고 있었다. 다시는 이 녀석에 빠지지 않을 마음에 밀어내며 꺼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옆에서 음정을 맞춰주는 거리의 연주자들 덕에, 기억나는 코드를 재빨리 짚어보았다.

 

초보자도 쉽게 잡을 수 있는 Am 코드. 미, 라, 도로 이뤄진 Am 코드. 오전을 나타내는 Am, I의 Be 동사인 Am, 라디오의 주파수인 Am, 이제 내가 곧 치게 될 베싸메 무쵸의 도입을 장식하는 Am. 
 

베싸메 무쵸(Kiss me very much). 나는 깐느를 거쳐 간 감독들과 여배우들에게, 깐느라는 도시와 바다를 향해, 여행과 고독에게, 이곳까지 오게 된 내 자신에게, 그리고 기타에게 진한 키스를 보냈다. 통기타의 몸통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 사운드 홀이라는 것인데, 만약 그것이 막혀 있게 된다면 소리는 몸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서 꽤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기타는 온몸으로 자신을 울려서, 그 둥근 구멍으로 소리를 내보내는 악기다. 온몸을 울려서, 텅 빈 구멍으로 소리를 낸다. 온 몸을 울려서, 텅 빈 곳으로. 울림, 텅 빈, 울림, 텅 빈…….


  어쩌면 나는, 아직 기타를 연주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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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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