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초로 좋아했던 이야기는 지난번에 소개한 『늙은 나귀 좀생이』 였지만,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든 사람은 어떤 남자다. 한 잡지에 무려 381개의 이야기를 기고할 정도의 이야기꾼이었고, 잡화상 직원에 약제사, 죄수, 은행원, 만돌린 연주자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으며 ‘윌리엄 시드니 포터’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본명을 지녔으나 세상에는 ‘오 헨리’라고 알려져 있는 그 남자. 보통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오 헨리를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하면 뭐랄까, 질문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주 노골적으로 김샌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잠깐 동안은 ‘필립 로스를 좋아합니다.’ 혹은 ‘노먼 메일러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긴 했다. 그렇게 대답했을 때는 김샌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더 불쾌해서, 그 반작용으로 이후 그런 걸 묻는 사람에게 아주 큰 소리로 저는요, 오 헨리를 좋아합니다!!! 라고 외치게 되었다. 좋아해요! 정말 좋아한다구요! 나는 오 헨리가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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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O. Henry 1862-1910), [출처: 위키피디아] |
아마 김샌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 단골로 나오던
『마지막 잎새』 로만 오 헨리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생전에 쓴 엄청난 양의 이야기 중 한국에 번역 출간된 것은 아주 미미하고, 그래서
『마지막 잎새』 가 오 헨리 읽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된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오 헨리’라고 하면 삶의 희망을 잃은 처녀를 위해 밤새 담벼락에 잎사귀를 그려 넣고 숨을 거둔 노인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주 감동적이고 휴머니즘이 듬뿍 들어 있는-뭐랄까, 마치 잡지 《샘터》나 《좋은생각》 같은?-그런 이미지의 작가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천만의 말씀, 오 헨리의 매력은 심술궂음이다. 인생이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거기에 더해 연민. 그리고 유머. 가끔 사람들이 오해하는 싸구려 감동이나 휴머니즘과는 요만큼도 관계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 잎새』 처럼 착해빠진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는 이야기 하나 정도나 될까.
크리스마스를 맞은 가난한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시계줄을 선물하기 위해 자랑거리인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달아 줄 생각으로 시계를 팔아 머리 장식을 산다. 얼핏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의 참 착한 이야기 같지만 오 헨리의 상징인 아이러니는 여전하다. 아내는 그 갖고 싶던 머리핀을 얻었는데 머리카락이 없고, 남편은 드디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품인 귀중한 시계를 달 수 있는 시계줄을 얻었는데 이제는 시계가 없다. 은행원으로 일했던 오 헨리는 공금횡령 혐의를 받아 온두라스로 도망쳤는데,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순순히 붙잡혔다. 그렇지만 어린 아내는 병이 깊어 곧 죽어 버리고 만다. 애도할 틈도 없이 5년간의 복역을 언도받은 그는 죄수로 지내며 감옥 약국의 야간 담당 약제사로 일했다. 오 헨리라는 필명의 유래가 이 감옥의 간수 중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수감 태도가 좋아 모범수로 조기 석방되었는데, 어느 이야기에나 끝부분에 크고 작은 반전을 넣거나 살짝 이야기를 비틀어 이른바 ‘오 헨리 식 엔딩’으로 알려진 ‘트위스티드 엔딩 TWISTED ENDING’이라는 문학 스타일까지 만들어낸 작가지만, ‘트위스티드 엔딩’은 어쩌면 그의 인생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하나 있는 딸에게 ‘아빤 횡령해서 감옥 간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출장이라고 둘러대야 했고, 재혼은 불행했다. 첫 번째 아내는 죽어서, 두 번째 아내는 산 채로 그를 떠났다. 이후 알코올 중독과 당뇨 등으로 병에 시달리다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불과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오 헨리 단편 중 잘 알려진 이야기인 『경찰관과 찬송가』 의 배경이 된 교회에서 열렸다고 한다.
노숙자 날건달로 사는 『경찰관과 찬송가』 의 주인공은 월동 준비를 궁리하다가 공짜로 재워 주고 밥도 주는 무료 숙소는 바로 감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봄이 오기 석 달 정도 감옥에서 지낼 수 있을 만큼의 경범죄를 수도 없이 저지르지만, 도대체 체포되지가 않는다. 다들 그의 행패에 별 관심이 없거나 그냥 용서해 버리는 바람에 따뜻한 공짜 숙소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가기만 한다. 이 겨울을 어떻게 나나, 한숨을 쉬고 있는 그의 귓가에 교회에서 누군가가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이 찬송가가 그의 마음을 묘하게 흔든다. 그래 나도 한 번 제대로 성실하게 살아 보자, 내일 직원으로 써 준다고 한 사람에게 찾아가 보자, 하는 결심을 하자마자 순찰 중이던 경관이 그를 불러세운다. 수상한 인물로 여겨진 그는 약식 재판에서 찬송가를 듣기 전에 그토록 원했던 3개월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버린다. 주인공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찬송가가 흘러나온 바로 이 교회에서 세상과 작별하다니, 오 헨리는 자기 인생의 끝조차 트위스티드 엔딩으로 맺어 버린 셈이다. 그가 죽은 후에 ‘나와 친구였던 오 헨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하는 식으로 그와의 친분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회고가 뜬금없이 쏟아져 나왔다는데. 오랫동안 오 헨리와 교류했던 편집자는 그 이야기들을 두고 ‘지금 오 헨리는 천국에서 하이볼 잔을 기울이며 이 사람들을 차갑게 비웃고 있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내가 오 헨리를 만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는데, 어린애 주제에 문학적 취향이 좀 고상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만 그냥 운이 좋았다. 사촌언니의 집에서 버리는 책을 얻었는데, 일어 중역판이었는지 번역문도 다소 어색하고 종이질도 소위 말하는 ‘똥종이’에 표지가 너덜거렸지만 나는 그 이야기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도대체 왜 빠져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너무너무 좋았다. 물을 잘 맞춰 훌륭하게 끓인 라면에 가장 적정한 순간에 톡 하고 깨뜨려 넣은 달걀, 그리고 국물에 말아 먹을 찬밥 한 그릇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밥상처럼 냉소와 연민, 그리고 유머가 기막히게 어우러져 있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것들의 조화는 감히 홍어 삼합에 막걸리와도 견줄 만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다 말고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물론 쓰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니 지금은 다만 죽기 전에 딱 하나 이루고 싶은 꿈일 따름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이야기를 쓰는 법을 배우려고 서사창작과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담당 교수님인 김경욱 선생님도 이 질문을 하셨다. 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나는 늘 하던 대로 선생님, 저는 오 헨리를 정말로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이번에는 김샌다는 얼굴 대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교수님은 순간 동정과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이 되시더니 나직하게 다시 물으셨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쓰냐?”
물론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어 땅만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아니, 그럼 톨스토이를 좋아하면 톨스토이처럼 쓸 수 있나요! 코맥 맥카시를 좋아하면 당연히 그 사람처럼 쓸 수가 있는 겁니까! 하고 부르짖었지만 물론 속으로만 외쳤다. 어째 김경욱 교수님은 웬지 누굴 좋아하면 당연히 그 사람 같은 글을 휘릭 써내실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서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나도 나에게 물었다. 야…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쓰냐? 그 질문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몇 년 전에 나는 휴일만 되면 대낮에 단골 순대국집에 홀로 앉아 술국 하나 시켜 놓고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며 책을 읽곤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 가장 많이 가져간 책도 오 헨리였다. 저명한 영문학 교수가 번역한 두꺼운 책이었지만 옛날의 조악한 일어 중역이 간혹 그립기도 했다. 읽고 또 읽어도 사골처럼 재탕 삼탕해도 맛좋은 국물이 나와서, 나는 오 헨리가 끓여주는 그 국물을 계속 받아 마셨다. 그건 대낮의 막걸리와 좀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나는 요즘 어떤 사정이 있어 술을 마시지 않지만, 정말로 오 헨리가 사후 세계에서 하이볼 잔을 기울이고 있다면 죽은 후에 얼른 그가 하이볼을 마시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꼭 함께 한잔 마셔보고 싶다. 나같이 시시한 사람은 상대 안 해 줄지도 모르니까 죽기 전에 꼭 “근데… 넌 왜 그렇게 쓰냐?”라는 질문에 해답을 내놓아야 할 텐데. 이러다간 오 헨리와 막걸리 한 잔 기울일 기회가 와도 이런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라고 외치면 그는 막걸리를 마시며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나를 존경한다면서… 자넨 왜 그렇게 쓰나? ” 아, 생각만 해 본 것으로도 무참하게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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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이라면 사후 세계에서도 다시 일백 번 고쳐 죽고 싶을 테니 저런 질문을 받지 않도록 앞으로는 애 좀 써 보려 한다. 문학을 하는 분들은 다 멋있고 근사한 이유나 뜨거운 예술혼이 있으시던데, 내 경우는 그냥 다 오 헨리와 막걸리 한 잔 해 보기 위함이다. 물론 시시한 꿈이다. 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매력적으로 써낸 남자를 이토록 사모하고 있으니 나로서도 별 수 없다. 모든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는 채로, 그 남자와 장수막걸리 한 잔 하기를 꿈꾸면서, 오늘도 하루하루 걸어가는 수밖에. 헨리 선생님, 기다려 줘요. 저 열심히 할게요… 아참 나 영어 못하는데 어쩌지? 하고 시시한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연민 어린 눈으로 늘 바라본 그의 책 중 오늘은
『반짝이는 것은 모두』 를 읽어야겠다. 오 헨리가 어울리지 않는 밤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쓸쓸한 당신이라면 꼭 가장 쓸쓸한 순간에 오 헨리를 만나 보기를. 친절하진 않지만 한없이 다정한 헨리 씨를. 그는 약제사였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이 약이었다. 특히 가슴이 뻥 뚫린 사람들에게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그런 약. 해당 증상을 가진 분이 있다면 꼭 복용해 보시길. 물건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 않아요,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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