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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가 구조적으로 약자인 쪽에 서있을 때 강자들이 굴복시키려고 한다는 거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철저하게 사실 확인을 해서 정확한 보도를 해야 하고,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강자들이 체계적으로 옭아매서 올가미를 씌운다면 , 올가미를 써야 한다. 올가미를 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올가미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하면 그것은 더 이상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북폴리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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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8일 첫 방송된 MBC <PD 수첩>은 현재까지 983회를 방영한 장수 시사프로그램에 속한다. <르뽀 60>, <뉴스비전 동서남북>, <MBC 리포트> 등 80년 대 이후 차츰 틀을 갖춰가던 각 방송사의 심층보도 프로그램들은 KBS <추적 60분>과 MBC <PD 수첩>이라는 각 방송사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을 낳은 교두보가 되었다. <PD 수첩>의 경우 종전의 보도 프로그램들이 우선적으로 다루던 정재계의 굵직한 현안뿐만 아니라, 방송사의 보도관행에 따라 소홀히 다루어지던 사회문제들까지도 심층적으로 취재함으로써 폭넓은 시청층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취재대상이 된 관계자 혹은 관련 단체들의 항의와 법적 대응에 숱하게 부딪히기도 하였고, 이명박 정부 당시 추진되었던 4대강 사업에 대한 <PD 수첩>의 방영이 잇따라 취소되며 이와 관련한 정부의 외압 의혹이 불거지기도 하였다.
<PD 수첩>이 보도한 방영분 가운데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소재는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종교 관련 문제이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되었던 광주학살은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 ‘광주 폭동’, 혹은 ‘광주 사태’ 등으로 명명되다가 1993년 문민정부에 이르러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었다. <PD 수첩>은 1990년 5월 방영된 ‘1980년, 5월 광주’ 편을 시작으로 ‘80년 5월, 그때 언론은 죽었다’, ‘80년 5월, 이 얼굴들을 아십니까?’, ‘화려한 휴가, 그 못다한 이야기’ 등의 방영분을 통해 잊혀진 광주의 역사를 환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종교와 관련한 방영분의 경우 1992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어느 기독교 종파의 휴거 소동을 비롯하여 영생교, 신천지, 대형교회 등을 소재로 다루었고 이를 통해 종교라는 허울 아래 감추어진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면모를 파헤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1999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를 다룬 ‘이단 파문! 이재록 목사 - 목자님, 우리 목자님!’ 편을 둘러싼 소동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PD 수첩>의 해당 방영분이 목사의 비리와 치부를 다룬 것에 불만을 느낀 교회신도들은 프로그램 방영 수일 전부터 대대적인 항의 의사를 표명하였고 급기야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던 시각, MBC 방송사의 주조종실로 난입함으로써 프로그램 시작 7분 만에 방영이 중단되는 초유의 방송사고를 일으키게 되었다. 다음 날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된 <PD 수첩>의 방영중단은 프로그램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되었고, 방송사고 다음 날 프라임타임 대에 특별 편성된 <PD 수첩>은 전국 시청률 39.6%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PD 수첩>은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저널리즘의 정도(正道)를 상징하는 프로그램으로 각인되기에 이른다.
<PD 수첩>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대표적으로 기억될만한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2005년 말 한국사회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황우석 스캔들’일 것이다. 황우석은 당시 서울대 수의과대학의 교수로서 세계적 권위의 과학잡지인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줄기세포 복제와 관련한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능수능란한 언론플레이와 정치력을 지녔던 황우석은 참여정부 당시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난치병 환자들의 희망으로 행세하였는데, 그에 대해 크고 작은 의혹을 제기하였던 소수의 주장들은 당시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전반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던 황우석에 관한 맹목적 믿음에 의해 근거 없는 음해로 치부될 뿐이었다. <PD 수첩>이 제기한 황우석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황우석 연구팀이 연구과정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발표한 난자의 채취과정 가운데 금전이 개입되었다는 사실과 난자제공자들에게 난자체취의 부작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부분, 그러니까 연구팀의 윤리적 문제가 첫 번째로 지적된 사안이었고 이와 관련한 <PD 수첩>의 보도는 황우석 지지자들에 의해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맞물려 한 방송사에서 <PD 수첩>의 제작진이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추측 보도를 터뜨리며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여론은 절정을 치닫게 되었다. 급기야 <PD 수첩>에 대한 광고주들의 광고 중단이 이어졌고 방송사에서는 잠정적으로 <PD 수첩>의 방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프로그램의 존폐 위기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황우석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던 여론의 추이는 황우석 연구팀과 오랜 협력관계였던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의 충격적인 기자회견으로 커다란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우석이 각종 논문에서 발표하였던 배아줄기세포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골자였다. 이 기자회견을 계기로 성역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던 황우석에 대한 국가적 맹신은 뿌리부터 뒤흔들리게 된다. 방송사 전체의 위기로까지 번진 <PD 수첩>에 대한 공격적 여론은 이 기자회견을 계기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PD 수첩>은 곧바로 황우석과 관련한 2차 보도 즉, 황우석의 연구결과 조작의혹을 후속편으로 방영하며 기사회생하게 된다. 황우석에 대한 <PD 수첩>의 의혹제기는 서울대의 자체조사와 검찰발표에 의해 상당 부분 진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황우석 사건’을 통해 <PD 수첩>의 ‘PD 저널리즘'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지만, 이는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하였던 대한민국의 어두운 일면이 드러난 사례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2014년,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까지도 방영을 이어나가고 있는 <PD 수첩>은 여러 해 전부터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검찰 비리, 소망교회 등을 취재하며 오랫동안 <PD 수첩>을 대표하였던 최승호 PD는 2011년 타 프로그램의 외주관리 담당자로 발령받아 프로그램을 떠나게 되었다. 2012년 MBC 총파업 당시 <PD 수첩>의 제작진들은 방송사로부터 파업의 책임을 물어 징계 처분을 받았고, 프로그램의 기존 작가진들은 모두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PD 수첩>이 종래의 성역 없는 비판의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프로그램의 이름만을 유지한 채 관성적으로 방영되고 있는 <PD 수첩>이 다시 한번 약자들의 신문고 역할을 자임하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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