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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은 눈밭에, 다른 한 발은 모래에 두고 있지요 『불안한 남자』

복선과 반전마저 철저히 계산한 냉혈한과 고민하는 인간 발란데르의 대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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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남자』는 은퇴해야 하는 발란데르에게 바치는 송가다. 결국 발란데르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인정하고,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발란데르는 한평생 이 세상의 좋은 편에 속하려고 노력해왔고, 행여 실패했더라도 자기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위로했다.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늙은 형사의 이야기는 처연하다. 쿠르트 발란데르의 나이는 육십. 아직 형사로 일하고 있는 발란데르는 서서히 은퇴할 준비를 한다. 시골에 집을 사서 이주하고 개도 한 마리 기른다. 하지만 나이와 함께 찾아오는 필연적인 증상들이 그를 엄습한다. 당뇨병과 혈압만이 문제가 아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곳에 있다. 왜 이곳을 온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는 사람들과 있었는데 문득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걸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게 된 사건도 생긴다. 어느 날 저녁, 혼자 술을 마시러 갔다가 총을 놓고 왔다. 총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저녁에 술을 마시러 가는데 왜 총을 들고 간 건지, 어쩌다가 놓고 왔는지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발란데르는 자괴감에 빠진다.

쿠르트 발란데르는 할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처럼 경찰이 된 딸 린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고 한스와 동거를 시작한다. 경찰이 된 발란데르를 싫어하던 아버지가 죽고, 아내와 이혼 한 후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린다뿐이었지만 이제 손녀 클라라가 생긴다. 그리고 한스와 사돈이 되는 예비역 해군 중령 호칸 폰 엥케와 아내인 루이스와도 만난다. 세상이 더 복잡해졌다. 그리고 발란데르의 마지막 사건이 시작된다. 호칸이 어디론가 실종되고 얼마 뒤 루이스마저 사라진 것이다. 발란데르는 사돈을 찾아 나서면서 자신의 인생 그리고 세계와도 직면하게 된다.

월랜더(Wallander) [출처: BBC 홈페이지]

스웨덴의 지방 형사 발란데르가 나오는 헨닝 만켈의 소설은 국내에 『다섯번째 여자』 『방화벽』 『하얀암사자』 등이 번역되었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케네스 브래너 주연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발란데르 시리즈는 대단히 매력적인 이야기다. 『불안한 남자』의 발란데르는 노인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의 발란데르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형사였다. 우직하고 고집이 세면서도, 불안하거나 외로워지면 클럽에 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문득 외국에 있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않고 과도한 정의감이나 복수심에 불타지도 않는다. 발란데르는 일상의 감각으로 사건을 보면서 끈질기게 세상의 윤리에 대해 자문한다.

발란데르가 다루는 사건들은 참담했다. 북구 그 중에서도 스웨덴에 대해서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미국이나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범죄도 거의 이전 세대에서 저질렀던 악행이 되풀이되는 수준이었다. 그 뿌리를 캐보면 금전 관계, 질투나 앙갚음 따위가 매달려 있기 십상이었다. 앞선 세대의 수많은 선배 경찰관, 군수, 행정관, 검사 등이 똑같은 관찰을 했다. 오늘날 기술적으로는 분명히 실마리를 잡기가 한결 손쉬워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깜냥이야말로 마지막 자물쇠를 푸는 열쇠였다. 발란데르는 사건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오랜 시간을 버티며 현역으로 살아남았다.

『불안한 남자』는 헨닝 만켈이 밝히는 쿠르트 발란데르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언급들이 많고 그가 만났던 많은 이들과의 매듭이 지어진다. 사랑했던 여인,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들과 마지막으로 만난다. 애송이 경찰관이던 시절, 심장에서 살짝 비껴난 곳에 칼을 맞은 다음부터 죽음은 인생의 동행자가 되었다. 발란데르는 수사를 하면서 범인을 죽이기도 했고,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 바로 곁에서 죽는 것도 봤다. 죄책감으로 무너질 뻔도 했고 때로는 복수심에 불타기도 했다. 그런 희로애락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 발란데르는 그래도 비교적 자신이 ‘좋은 편’에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후회도 있고, 회한도 있지만 잘 헤쳐 왔다고.

앞으로 남은 삶이 10년일지 20년일지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 늙는 것 말고는 달리 겪을 일이 없었다. 젊음은 너무나도 먼 기억이고 중년은 이제 지나갔다. 무대 뒤에 서 있다가 세 번째 막이나 마지막 막이 열려서 무대에 오르면 모든 줄거리가 밝혀지고 영웅이 드러나며 악당이 죽을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어떻게든 비극적인 배역을 맡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웃으면서 무대를 떠날 수만 있다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헨닝 만켈은 『불안한 남자』에서 발란데르가 사건을 푸는 입장을 넘어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했다. 호칸은 그 어디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인생을 보냈다. 실종될 이유도 없다. 호칸과 루이스의 실종을 수사하면서 발란데르는 ‘스웨덴’이라는 사회 전체를 들여다보게 된다. 행복하고 안정됐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진흙탕이었던 그들의 삶이 결국 사회, 세계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진상에 가까이 갈수록 발란데르는 의심하게 된다. 발란데르는 자신이 생판 모르는 세상의 언저리에 와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만한 능력이나 자격도 없으면서 괜히 주제넘게 가까이 온 게 아닌가 싶었다. 거대한 세계의 장막을 열고 들여다 본 발란데르는 그러나 마지막까지 도망치지 않는다.

호칸의 실종 사건은 여전히 범인이 잡히지 않은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과 스웨덴 영해에서 소련 잠수함이 발견되었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사라진 냉전 시절의 케케묵은 사건들과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발란데르는 과거 동독에서 비밀경찰 고위간부였던 남자도 만나고, 현직 CIA 직원도 만난다. 온화한 노부부의 실종은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존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나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해도, 혼자인 나 역시 이 거대한 세상에서 영향을 받고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보라, 고 헨닝 만켈은 말한다.

극장에 앉아 있다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 같아 뛰쳐나왔더니 지뢰밭이 지천인 우리네 삶의 세상이었지.

『불안한 남자』는 은퇴해야 하는 발란데르에게 바치는 송가다. 결국 발란데르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인정하고,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발란데르는 한평생 이 세상의 좋은 편에 속하려고 노력해왔고, 행여 실패했더라도 자기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위로했다.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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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남자 헨닝 망켈 저/신견식 역 | 곰
『불안한 남자』 는 전통 추리소설이자 범죄소설이며 사회소설로, 영원한 우방국도 적성국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정치적 신념을 위해 두 얼굴로 살아온 인물을 묘파한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헨닝 망켈을 스웨덴 대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발란데르 시리즈 탄생 22년 만에, 그리고 그의 마지막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로부터 10년 이상 흐른 후에 발란데르 경감이 맡은 최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연민마저 불러일으키는 이 스웨덴 형사 시리즈는 1991년 시작되어 지금까지 45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3,000만 권 이상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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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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