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 작가 “소설도 커피 같아요. 쓰더라도 맛을 보면”
여덟 번째 소설집 『별명의 달인』 펴내 작가라는 직업이 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끝없이 별명을 짓는 사람, 작가
올해로 등단 26년, 소설가 구효서에게 물었다. “쓰기 싫을 때, 쉬고 싶을 때는 없었어요?” 그는 “쉰다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책상 위 노트북을 열지 않아도 언제나 머릿속에는 쓸 거리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책상머리에서만 글을 쓰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면서 또 거리를 거닐면서도 글을 쓴다. 반드시 펜대를 굴려야만, 키보드를 두드려야만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1987년 단편 「마디」로 등단해 26년동안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구효서 작가. 그는 글을 기록하지 않을 때, 더 바빠진다. 머릿속이 온통 쓸 거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소설집, 장편소설부터 산문집, 동화에 이르기까지 30여 권의 작품집을 펴낸 그를 두고, 사람들은 ‘버릇처럼 숨처럼, 오로지 소설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잠깐의 외도도 허락하지 않은 채, 자분자분 글로만 이야기해온 작가의 인생. 독자들은 그의 충실한 행보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전업작가’라는 타이틀이 버거울 때는 없었을까, 작가는 답했다. “다른 직업이 없고 전업이니까 작품만 쓰는 게 당연해요. 또 작품이 많아질 수밖에 없죠. 이상할 것 없고 당연한 일이에요. 다만 ‘작가’라는 직업이 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작가를 어찌 ‘괴상한’ 직업으로 느꼈을까. 구효서 작가는 “세상에 없는 걸 말하는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언어, 글자로만 표현해야 하는 글을 만드는 작가. 무형의 실체를 마주할 때마다, 구효서 작가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작가라는 직업이 오래된 직업이 아니에요. 근대적 직업이에요. 과거에는 돈을 받고 이야기를 파는 전기수가 있었죠.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상품이 되고, 자기를 알리는 어떤 수단이 되면서 작가가 직업이 됐죠. 죽으나 사나, 글만 써야 하는 이런 괴상한 직업이 생긴 거예요.” 현대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직업에 평생 종사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미 가진 직업을 내려놓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 힘든 시대다. 이 직업을 놓으면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 살고 있다. 작가는 간혹 책장에 쌓인 자신의 저서들이 끔찍하게 여겨진다. ‘정말 저 많은 책 속에 내가 쓴 글들이 가득할까?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남아 있을까? 펼쳐보면 그냥 하얀 빈 종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연유로 작가는 몇 해 동안 자신의책을 펼쳐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전, 모든 책을 택배박스에 넣고 테이프로 꽁꽁 싸맸다. “저 책들을 보면 내가 자의식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럼 작업에 방해가 되니까요.” 작가는 언제나 처음 쓴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내려 간다. 이전의 책들은 까맣게 잊은 채 ‘처음 쓴다’를 주문처럼 외면서.
구효서의 여덟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은 『별명의 달인』 이다. 작가는 별명의 제왕으로 이름 짓고 싶었지만 비슷한 제목이 있어 ‘달인’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썩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제왕은 너무 거대해 보인다. 소소하고 가벼운 느낌의 ‘달인’이 더 알맞지 싶다. 소설의 주인공 라즈니시는 학창시절, 친구들의 특징을 꿰뚫어보는 능력으로 ‘별명의 달인’으로 불렸다. 성적이 뛰어나지도 표창을 받는 일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친구들의 별명을 잘 짓는다는 까닭으로 언제나 존재감을 가졌다. 하지만 라즈니시에게 별명 짓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불안과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규정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 고통이 수반된 특기, 행복하지 않은 취미였다. 문득, 작가야말로 ‘별명의 달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세상이 이미 명명한 단어를 새로이 깎고 다듬어 표현한다. 잘 깎이면 기쁘지만 칼날이 무뎌지면 고통스럽기 이를 데 없다. 창작이란 그렇다.
말에 대해서 끝없이 말하고 싶은 욕망
작가의 말에 ‘토리노의 말’을 인용하셨어요. 니체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본 말, 벨라 타르 감독이 만든 영화 <토리노의 말>처럼, “길 위를 내처 걷다가 어느 날인가 주저앉게 될 것”이라고. 작업실이 아닌 도서관에서 글을 쓴 요즘, 어떠셨나요.
무릎도 다치고 작년부터 작업실에 난방 문제도 있고 해서 도서관을 왔다갔다했어요. 노트북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는 지금도 열심히 타요. ‘토리노의 말’은 글쎄요. 혼자 작품을 쓴다는 게 그런 모양새가 아닐까 싶었어요.
『별명의 달인』 은 2008년부터 작년까지, 문예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은 소설집인데, 4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아요. 시차를 느끼지 못했어요.
예전 작품들과 비교해도 큰 차별성이 없어요. 기본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다는 건데, 첫 장편을 썼을 때 가졌던 문제의식이 여기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말과 글을 합치면, 언어잖아요. 내가 언어에 대한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하고 있었더군요. 해야겠다가 아니라, 천착할 수밖에 없고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는 게 언어에요. 어쩌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에 대한 천착은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별명’이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유독 이번 소설집에 습관적으로 글을 쓰고 메모를 남기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같은 맥락일까요.
말 못하고 더듬거리는 인물들이 많으니까, 그런 셈이죠. 2년 전에 『동주』라는 장편을 썼는데, 소제목이 모두 말로 끝나요. 첫 챕터 소제목이 ‘더듬는 말’이었는데, 이번 소설집에도 말을 더듬는 사람이 나와요. 말에 대해서 끝없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나 봐요. 메타픽션이라고 하듯이, 메타 랭귀지. 언어에 대해서 언어로 말하는 거죠. 언어로 말하면서 언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숙명처럼 느껴져요. 세상에 대한 모든 해석과 이해가 거기에서 나오니까요. 거기에서 소설도 나오고요.
「별명의 달인」에서 라즈니시는 친구들의 특징을 집어내서 별명을 짓는데, 알고 보니 취미가 아니었어요. 고통에 가까운 불안을 몰고 온 일이었죠. 무언가 규정하지 않으면 두려움을 느끼는 라즈니시를 보면서, 무질서한 세계에 공포를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이 겹쳐졌어요.
라즈니시는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지 않으면 두려워서, 끊임없이 언어적 명명을 통해서 질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정작 자신은 결혼도 실패하고 선거에도 실패했죠. 라즈니시나 그의 친구인 화자 모두 아내가 떠나갔잖아요. 그들은 아내에 대한 규정을 내리면서 아내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라는 또 다른 세계의 우주는 결국 알아채지 못한 거예요. 세상은 결코 자기가 규정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죠.
라즈니시가 결코 쓰지 않는 두 단어가 있었어요. ‘모른다’와 ‘미안하다’. 친구들이 그에게 거부감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죠. 간혹 의도적으로 쓰지 않으려고 하는 단어가 있잖아요. 작가님도 그런 단어가 있나요?
‘절대’라는 말을 안 써요. 말할 때도 글을 쓸 때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절대’라는 말을 쓰면 귀에 정확히 꽂혀요.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 듣고 있지만(웃음). 그런데 ‘절대’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참 많아요. 자기 암시, 최면 같은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절대로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절대 안 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도 ‘절대’라는 말을 잘 쓰는 사람은 신뢰가 안 가요.
문득, 작가님의 별명도 궁금해져요.
지금은 성인이 되고 사회적 자아가 생겨서 말을 하지만, 어렸을 때 자아가 분리되지 않았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람들하고 눈도 못 마주쳤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어디 잔칫집이라고 데리고 가면, 뭘 먹어야 하긴 하는데 쑥스러워서 벽만 바라보고 서 있던 아이였어요. 길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인사하기 싫어서 고개 푹 숙이고 가곤 했던 아이였죠. 말이 없었으니 언어도 없었죠. 사람들이랑 소통하지 못하니 별명을 지어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했어요. 이렇게 말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직업을 가질 거라곤 꿈에도 상상을 못했죠. 아버지도 형도 농사꾼이었으니, 나도 농사를 짓겠지 싶었어요. 별명이 없었다는 건, 타인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네요. 어울리지 않았고 혼자였고 별명조차 없었던 아이?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소설 속 인물에게도 사물에게도 수많은 별명을 지어주는 소설가가 되셨네요. 「별명의 달인」을 읽으면서 ‘작가야말로 별명의 달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현실을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니, 소설가의 직무는 끝없이 별명을 짓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지하철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지하철이라고 말하지만, 작가는 ‘어두운 굴 속을 지나는 굼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은유이지만 곧 별명이고, 표현이고 예술인 거죠. 그런데 이런 작가의 표현 행위에는 양면성이 있어요. 기존에 있던 명명 대신 다른 명명을 쓴다는 건, 얼마든지 이름이 파생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 방식, 내 취향으로 표현한다는 점이에요. 내 명명이 타인과 나에 대해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글 쓰기는 끝없는 이문파문(以文破文)이에요. 글로서 글을 깨는 것, 파괴하는 것이죠. 글이 글로서 자기 권위를 갖고 정체성을 가지면 위험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쓰지만 또 내가 그 글을 깨야만 하는 거예요.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 생각할수록 너무나 멀지만
「모란꽃」에 등장하는 형제들은 펄 벅의 소설 『모란꽃』에 대해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어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책은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셈이었다고 인정해요. 그리고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모두 『모란꽃』이었음을 깨달아요.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의 분방한 태도, 작가들도 고려하는 부분이 아닌가요?
모든 작품에 있어서 하나로만 기억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그건 억지며, 강제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작가와 독자의 거리는 생각할수록 너무도 멀고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 그런데 그렇다면 암담해져야지 맞는 거잖아요.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 때, 더 소설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에도 겉면과 속면이 있기 때문이에요. 껍질만 먹는 과일이 있듯이, 소설에도 겉면만 먹어도 되는 효용도 있어요. 독자들이 겉면만 읽는 것에 대해서 불만은 없어요. 물론, 작가로서 독자들이 겉면을 읽고 속면까지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고 인정해요. 왜 어렵냐면, 독자의 언어와 내 언어가 이미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작가들이 새롭게 창조한 의미들을 독자들이 단번에 이해하긴 어렵다는 뜻일까요.
시인의 언어는 일상 언어, 현실 언어가 아닌 천상의 언어에요. 현실 언어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래서 그 시를 이해하려면 언어를 통해서 가는 게 아니라, 시인의 포에지까지 도달한 다음에야 읽혀지는 거예요. 소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속면을 보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이 어려운 것을 작가들은 왜 쓸까요. 독자에게 도달하기 어려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쓰는 건, 안 쓰면 없는 거잖아요. ‘겉면으로 이해되는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속면으로 이해되는 세상도 있다’는 걸 어쨌든 작가들은 준비해놓아야 하는 거예요. 누구는 도달하고 누구는 오지 못하겠지만, 독자들이 알아서 도달해야겠지만 작가들은 만들어 놓아야 하는 거죠. 그래서 독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준비해놓은 걸 이해할까’라는 걱정은 안 해요. 다만 독자들이 속면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화환경이 답답하죠.
상업주의, 공격적인 마케팅에서 오는 악영향이겠지요.
문화라는 걸 너무 상품으로만 몰고 가는 분위기도 그렇고, 베스트셀러, 표피주의, 말초적 흥미만을 추구하는 환경들이 독자들을 방해하고 있어요. 커피에 설탕을 넣으면 커피 맛이 떨어지잖아요. 하지만 진짜 커피 맛을 알려면 쓰더라도 먹어봐야죠. 그런데 자꾸만 설탕을 넣고 시럽을 넣는 그런 환경들이 걱정이 되는 거예요. 독자들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걱정인 거예요.
소설의 소재가 되는 것들은 어떻게 찾는 편인가요? 찾나요? 아니면 그냥 만나게 되나요?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메모를 하게 될 때는 어제 봤던 창문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봤는데, 창문이 달리 보일 때, 그럴 때 메모를 해요. 창문뿐만 아니라 거리의 나무나 풍경, 또 사람들이 다르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뭐가 변했냐를 보면 그 사물이 변한 게 아니라, 내 관점이나 시각이 변한 거거든요. 이게 왜 변했을까, 생각해봐요. 달리 말하면 탐구? 사유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일상적으로 봐왔던 것들이 어느 순간 다르게 보일 때, 어떻게 달리 보였는지, 달리 보인 이유가 뭘까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 생각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는 셈이죠. 소설로 끌어들이고 난 후, 소재들은 수집하면 되니까, 수집의 대상들을 메모하진 않아요.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시각이 바뀌어 달리 보이는 현상이나 사물이 있을 때는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메모를 해요.
언어에 대한 천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번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글을 삭제해버리곤 해요. 특히 「화양연화」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온 마흔다섯 통의 메일을 제목만 읽고는 지워버렸어요. ‘어떻게 읽지 않고 지울 수가 있을까, 현실의 경우라면 가능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주인공은 메일을 삭제했을까요.
이런 마음이 있어요.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대상에 대해서 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 그건 환멸을 느끼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아요. 앎으로 인해 멀어짐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하는 행복, 기쁨 같은 추상적인 언어는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손으로 집을 순 없어요. 손으로 집어졌다면 그건 행복도 사랑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면 연인들끼리 ‘내가 왜 좋아?’라고 묻잖아요. 그럴 때 ‘글쎄, 모르겠어. 그냥 좋아’가 낫지 이러이러해서 좋다고 말하는 순간, 그건 진짜도 아닐뿐더러 완전히 감정을 깨버리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은 사진으로도 연결되는데, 저는 정말 필요한 자료사진이 아니라면, 사진을 잘 안 찍어요. 최근에 일본을 다녀왔는데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어요.
사진은 가공한 프레임이니, 사람의 기억이 더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죠.
사진이라는 건 한 순간을 정지시키는 거잖아요. 강제로 정지시키는 것은, 그 순간 가짜가 되어버려요. 기억과 기계의 차이는 엄청나요. 사실 사람의 기억보다 기계가 훨씬 더 정확하잖아요. 하지만 왜곡된 기억이 나에게는 더 행복하고 리얼한데, 사진이 그걸 깨버리는 때가 있어요. 내 기억 속에는 이 호수 옆에 분명히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사진으로 보니까 없어요. 그러면 황당한 거예요. 메일로 사랑 고백을 하는 것들도 이런 사진 같아서, 실제 사랑의 본질을 깨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