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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 『바람이 멈출 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바람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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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졸로토가 글을 쓰고 스테파노 비탈레가 그림을 그린 『바람이 멈출 때』 는 봄이 아니라 가을에, 시작이 아니라 이제는 영영 끝이라고 생각될 때 읽으면 좋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어린이기 읽는 책이라 얕잡아 보는 사람도 막상 읽어보면 무시 볼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이다. 나직하지만 다정하게 읊조리는 시적인 언어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여름 내내 바람이 그리웠다. 갑자기 바람을 찾은 건 더위 탓이 아니라 트루먼 카포티 때문이었다. 미국 사교계의 총아였고, 소설을 써서 백만장자가 되었던 인물,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였던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집 『차가운 벽』을 읽은 탓이었다. 그는 단편에서 아름다운 문장으로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지막 문을 닫아라’가 발단이었다.

단편은 보잘것없는 집에서 태어나 성공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안간힘을 쓴 남자 월터의 이야기다. 그가 종내 어찌 될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얕은 수를 쓰다가 결국 파국을 맞고 고향으로 돌아가 싸구려 모텔 방에 숨듯이 투숙한다. 홀로 있는 방에서조차 월터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자신을 찾는 미친 듯 울려대는 전화 소리에 시달린다. 소설의 마지막에 월터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바람만 생각해.”

트루먼 카포티의 이 단편을 찾아 읽은 것은 또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었다. 그가 카포티의 아름다운 문장에 반해 고등학교 시절 하루 종일 카포티의 책을 번역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루키는 뭔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마지막 문을 닫아라’의 마지막 구절인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바람만 생각해.”를 떠올린다고 했다.

트루먼 카포티가 말한 ‘바람’은 무얼까. 바람이 지나가듯 모든 것 또한 그렇게 사라진다는 뜻일까. 아니면 하루키의 말대로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바람 속에 살아가는 존재’란 뜻일까. 궁금했다. 그래 바람을 기다렸다. 백일홍이나 능소화를 찾아 볼 수는 있었으나 바람은 잡히지 않았다. 바람을 맞으러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만화 속에는 바람의 계곡도 있고, 소설에는 바람의 집도 있던데, 바람이 부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한데 가을이 오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바람 부는 곳을 찾지 않아도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은 바람의 계절이다. 아침저녁으로 마른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에 잎들이 떨어져 날아다닌다. 바람이 느껴지고 바람이 보인다.


샬로트 졸로토가 글을 쓰고 스테파노 비탈레가 그림을 그린 『바람이 멈출 때』는 봄이 아니라 가을에, 시작이 아니라 이제는 영영 끝이라고 생각될 때 읽으면 좋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어린이기 읽는 책이라 얕잡아 보는 사람도 막상 읽어보면 무시 볼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이다. 나직하지만 다정하게 읊조리는 시적인 언어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아이는 날이 저물고 해가 떨어지자 더 이상 신나게 놀 수 없고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하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온 엄마에게 묻는다. “왜 낮이 끝나야 하나요?” 엄마는 배나무 위에 걸린 반달을 손으로 가리키며 검푸른 하늘 너머로 사라진 해가 어디고 갔는지 들려준다.

“낮은 끝나지 않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시작하지. 이곳에서 밤이 시작되면, 다른 곳에서 해가 빛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완전히 끝나는 건 없단다. 다른 곳에서 시작하거나 다른 모습으로 시작한단다(Nothing ends. It only begins in another place or in a different way).”

엄마의 말처럼 모든 것은 끝이 있지만 또 끝이 아니다. 가파르게 치닫던 산은 봉우리를 넘으면 내리막이 되어 골짜기를 만들고, 한차례 내린 비는 구름이 되어 다시 폭풍우를 만든다. 단풍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은 땅속에서 새로운 잎과 나무를 싹 띄울 거름이 된다. 삶에 비밀이 있다면 이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 완벽하게 빛만 있을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모든 것이 그림자인 경우도 없다. 세상은 빛이며 또한 그림자다. 빛인가 하면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림자뿐인가 싶으면 다시 빛이 비춰온다. 순간은 끝이지만 순간 속에 영원이 숨어있다. 다분히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이 생각을 엄마는 낮과 밤을 시작으로 삼라만상의 순환으로 이야기한다.

글을 쓴 샬로트 졸로토는 시인이자 작가이며 어린이 책 편집자이자 출판인으로 일했다. 『바람이 멈출 때』는 1962년, 1975년 그리고 1995년에 걸쳐 세 차례나 그림 작가를 바꿔가며 출간되었다. 우리가 만나는 책은 스테파노 비탈레가 나무판에 그 결을 살려가며 그림을 그린 세 번째 판본이다. 은은한 색감과 나무 결을 그대로 받아들인 그림이 이 고요한 글과 잘 어울린다.

바람이 분다. 그리고 바람이 그친다. 바람이 그치면 바람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불어가 나무들을 춤추게 한다. 바람이 멈출 때, 바람은 끝난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다음을 준비한다. 시험을 망쳐, 애인과 헤어져, 친구가 배신해 모든 게 끝이구나 싶어 힘든 순간이 있다. 그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바람만 생각해”라는 말과 함께 전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샬로트 졸로토 저/스테파노 비탈레 그림/김경연 역 | 풀빛

한 줄 Tip
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서 있었을 나무의 결이 생생이 느껴지는 그림을 놓치지 마세요!


『바람이 멈출 때』 와 함께 선물하세요!

이소라 6집 <눈썹달> 이소라 | 씨제이이앤엠
이소라 6집에는 그 유명한 노래 ‘바람이 분다’가 수록되어 있다. 가을만 되면 그래서 바람이 불면 누구나 한번쯤 찾아듣는 이 노래와 함께 선물하면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집 『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저/박현주 역 | 시공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바람만 생각해.”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는 ‘마지막 문을 닫아라’가 수록된 단편집.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서정적인 문장이 가득 차 있어 그림책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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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미화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 바람이 멈출 때 <샬로트 졸로토> 저/<스테파노 비탈레> 그림/<김경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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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저/<박현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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