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봉석의 하드보일드로 세상읽기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
일본 미스터리계의 신성, 나가오카 히로키의 걸작 미스터리 단편집
『귀동냥』 의 4편 모두 제목에 미스터리의 핵심이 숨어 있다. 당연히 그 제목만으로는 진상을 파악할 수 없지만, 제목을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가며 추리해보길 원한다고나 할까. 작가로서는 독자에게 미리 해답의 힌트를 주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풀어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비정하고 참혹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세상에 인정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오로지 들짐승처럼 생존만을 위해 악다구니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내심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아직 괜찮구나, 같은 조촐하고 치사한 위안. 이렇게 고단하게 살아가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는 건가, 라고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가오카 히로키의 『귀동냥』 같은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래도 인정하게 된다. 세상에는 이런 따뜻한 일들도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건, 그래도 나름 공평하게 되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단편집인 『귀동냥』 에는 「경로 이탈」 , 「귀동냥」 , 「988」 , 「고민상자」 총 4개의 작품이 들어 있다. 「경로 이탈」은 결혼을 앞둔 구급대원 하스카와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같은 구급대원인 약혼자의 아버지, 곧 장인어른이 될 무로호시와 함께 구급차에 탄 그들은 ‘원수’를 만나게 된다. 「귀동냥」 의 주인공인 형사 하즈미는 남편이 죽은 후 딸 나쓰키와 단 둘이 살고 있다. 「988」의 모로가미와 가사마는 소방관이다. 「고민상자」 의 유코는 전과자들이 출소한 후 머무는 갱생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귀동냥』 의 주인공들은 모두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하스카와의 약혼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게 되었지만, 가해자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하즈미의 남편은 형사였고, 원한을 품은 사람의 손에 죽었다. 가사마의 어린 아들은 사고로 죽었다. 반대로 「고민상자」 에 나오는 우스이는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다가 실수로 아이를 죽이게 되었다. 그들의 삶은 결코 희망과 웃음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혹독한 경험을 하고난 후, 그들은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귀동냥』 은 그들의 일상, 감정들을 세세하게 읽어내고 감싸 안아준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퍽퍽하지만 그래도 ‘인정’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소위 ‘인정人情’소설이다.
그렇다면 『귀동냥』 의 어디가 미스터리일까? 하필이면 칼에 찔려 구급차를 탄 환자는 검사 구스이였다. 딸을 휠체어 신세로 만든 의사를 기소하지도 않고 풀어준 남자. 무로호시는 구스이를 태운 구급차를 병원 주위에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계속 돌게 만든다. 화재 현장에서 4개월 된 아이를 구해 영웅이 된 가사마는 바로 사직서를 낸다. 무로호시가 경로 이탈을 명령하고, 가사마는 아이를 구하고도 사직서를 내고, 나쓰키는 엄마가 일 때문에 늦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화를 내며 말을 안 하고 있다. 나가오카 히로키는 그들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해명된다. 그야말로 팟! 하고 머릿속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보통 소설에서는 장편과 단편의 구성이 다르다. 쓰는 방법도 다르고, 작동 원리도 다르다. 독자가 느끼는 즐거움도 다르고. 『귀동냥』 에서 뭔가 스펙터클한 추격전이나 범인을 쫓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같은 것을 얻을 수는 없다. 단편 미스터리에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이 중요하다. 단 하나의 맥을 짚음으로써 모든 것이 해명되는 것. 단편 전체가 오로지 하나의 포인트를 위해 집중되는 것. 그 중에서도 나가오카 히로키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던 이유 혹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동 뒤에 있는 심리를 알았을 때 ‘그렇구나!’하고 생각해요.‘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을 때 심사를 맡았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진상에 이르는 키워드를 당당히 제목에 걸어 놓고도, 멋들어지게 읽는 이를 속이는 기량’을 칭찬했다. 『귀동냥』 의 4편 모두 제목에 미스터리의 핵심이 숨어 있다. 당연히 그 제목만으로는 진상을 파악할 수 없지만, 제목을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가며 추리해보길 원한다고나 할까. 작가로서는 독자에게 미리 해답의 힌트를 주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풀어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귀동냥』은 꽤나 어려운 문제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쉽게 짐작하거나, 추리하기 힘든 문제다.
나가오카 히로키는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보다 인간이 지닌 ‘지知’와 ‘도리’라는 측면에 더욱 끌‘린다고 말한다. 『귀동냥』 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특히 표제작은 그런 점에서도 탁월하다. 도난 사건, 연쇄 살인사건, 모녀의 갈등이 얽히면서 전개되는 「귀동냥」 은 범인이 누구인가, 라는 미스터리보다 그 사건들이 얽히면서 만들어진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귀동냥」 을 키워드로 절묘하게 사건을 엮어내면서,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까지 설레게 하는 나가오카 히로키의 단편 직조 솜씨는 탁월하다. 이렇게 인간의 ‘도리’를 말하는 소설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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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나가오카 히로키> 저/<추지나> 역10,8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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