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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치명적인 핏빛 분노 - 『감염유희』

웃고 있는 네 이웃의 가면을 벗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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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에 씐다는 말이 있다. 쿠라타는 이 말을 지금까지 충동 범행을 설명할 때나 사용하는 편리한 표현 정도로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살인이라는 방법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다. 즉 선택의 문제다.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히메카와 레이코는 당연히 다케우치 유코다.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작가인 혼다 테쓰야도 인정한 히메카와 레이코의 가상 캐릭터는 마쓰시마 나나코라고 이야기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영화 <링>에서 보여준 마쓰시마 나나코의 캐릭터도 ‘히메카와 레이코’역에 적합하지만, 드라마 『스트로베리 나이트』에서 이미 연기한 다케우치 유코를 이길 수는 없다. 여성적이면서도 강인하고, 직관력이 뛰어난 히메카와는 역시 다케우치 유코가 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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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fujitv.co.jp/strawberrynight]

그런데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의 5번째 이야기, 『스트로베리 나이트』 『소울 케이지』 『시머트리』 『인비저블 레인』에 이어지는 『감염유희』의 주인공은 히메카와가 아니다. 『감염유희』는 일종의 외전 같은 작품이다. 레이코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공안 출신의 노형사 카쓰마타, 단편 「지나친 정의감」에 나왔던 형사 쿠라타, 히메카와 반의 신출내기 형사였다가 승진시험에 합격하여 관할서로 옮긴 하야마가 주인공이다. 카쓰마타, 쿠라타, 하야마는 각자 담당 사건을 수사하다가 그 사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히메카와는 조연으로 가끔씩만 등장한다.

전직 후생성 관료의 아들이 살해된 사건, 불륜 관계였던 외무성 직원과 애인이 거리에서 난자당하는 사건, 후생성에서 ‘연금계의 대부’로 알려졌던 남자가 폭행을 당한 사건 등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유는 알 수 있다. 그들은 관료였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이나 행동이 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혹은 이해관계를 위해서 결정을 내렸다. 마치 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국민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른다.

지금까지 어떤 악행을 저질렀어도 관료의 얼굴이나 개인 정보가 공개된 적은 없었다. 담당 기관이 연루된 불상사가 생겨도 비난은 언제나 정치가가 받을 뿐 장관만 바뀌면 같은 악행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카쓰마타는 레이코에게 범죄 피해자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유는 알 것 같다고 말해준다. 과거에 피해자가 그릇된 결정을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고. 15년 전에도 그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었다고. 그 말을 해주며 카쓰마타는 덧붙인다.

하루하루 쏟아져 나오는 정보가 오토모 같은 사람 손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어? (……) 15년 전, 오토모 신지와 같은 원망과 분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국민들 사이에 똬리를 틀고 응어리져 있어. 그 응어리는 시시각각 사람들을 감염시켜 세력을 넓혀가겠지. 엄청난 시대가 도래할 거야. 레이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역습이다. 까딱하다간 마녀사냥을 보게 될지도 몰라.

혼다 테쓰야는 경찰 내부의 세세한 갈등까지도 탁월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에서는 직관으로 범인을 추적해가는 히메카와와 치밀하게 바닥부터 훑으면서 단서를 찾아내는 쿠사카, 온갖 협박과 뇌물로 정보를 캐내는 카쓰마타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타협을 하는 모습을 통해 ‘경찰 수사’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히메카와 레이코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마음에까지도 쉽게 접근한다. 직관적으로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행태를 쿠사카와 카쓰마타는 정말 싫어하고, 히메카와 역시 그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다. 경찰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혼다 테쓰야는 필사적으로 범인을 찾아 가는, 그들을 어떻게든 잡고 싶어 하는 경찰의 마음을 처절하게 드러낸다. 『감염유희』에서는 전직 형사인 쿠라타의 마음을 통해서 더욱 간절하게 드러난다.

귀신에 씐다는 말이 있다. 쿠라타는 이 말을 지금까지 충동 범행을 설명할 때나 사용하는 편리한 표현 정도로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살인이라는 방법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다. 즉 선택의 문제다.

그래서 쿠라타는 생각한다.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나면 보상을 받을 방법이 없다. 오로지 죽음으로써 용서를 구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 선고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왔다. 경찰관으로서의 신념이기도 했다. 혼다 테쓰야는 쿠라타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감염유희』에 나오는 살인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관료들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서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그 선택에는 어느 정도 정당성도 있다. 카쓰마타조차 정치가 뒤에 숨어서 국민의 혈세를 갉아먹는 관료에게 정의의 철퇴를 맛보여주고 싶은 욕구. 그 욕구는 참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 행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니 자신의 가치관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을 그 지경까지 미치게 몰고 간 당사자는 누구인가 묻고 싶다.

혼다 테쓰야는 격렬하게 관료들을 비판한다. 그들이 전직 관료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들이 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태를 택해야만 했는지를 말한다. 동시에 살인을 ‘선택’한 범인들에게도 분명한 벌을 내린다. 아들이 살인을 했고, 그 죄과를 생각하며 또 다른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던 쿠라타는 『감염유희』의 범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쿠라타를 포함한 그들은 살인을 선택하면서, 그들 역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때때로 사람은 일부러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할 때가 있다. 잊어버리기만 한다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내일을 살아가는 것은 포기한다. 대신 증오와 함께 절멸하는 쾌락을 상상한다.

혼다 테쓰야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감염유희』의 범인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그들은 살인을 선택한 범죄자들이고, 벌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몰려다닐 수도 있는 군중이다. 분노가 세상을 뒤덮고, 모든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점에서 다시 한 번 쿠라타의 선택과 그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참 어렵고 힘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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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유희 혼다 테쓰야 저/한성례 역 | 씨엘북스
드라마로 제작된 이후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의 다섯 번쨰 책이다. 레이코의 천적이자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베테랑 형사 카쓰마타, 단편 「지나친 정의감」에 등장했던 전직 형사 쿠라타, 히메카와 반의 신출내기 형사 하야마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제약 회사에 다니던 젊은 샐러리맨의 죽음, 길거리 피습 사건, 노인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 규모도 양상도 다르지만 그 사이에는 한 가지 의문스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범인이 피해자의 ‘개인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는 점……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그 정보를 손에 넣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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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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