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과 와플 너머의 벨기에 이야기
대한민국의 경상남ㆍ북도를 합한 만큼의 국토 면적, 서울 시민의 숫자를 살짝 웃도는 인구. 결코 큰 나라는 아니지만 8,000종의 맥주와 그 보다 더 많은 와플 레시피가 존재하는 곳. 이곳은 벨기에다. 우리에게는 초콜릿 혹은 <개구쟁이 스머프>의 고향으로 기억되는,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나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벨기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의 저자 지은경은
“벨기에의 문화가 우리 삶 속에 깊이 침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벨기에와 연관 짓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그녀가 벨기에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디자이너의 시각과 목소리로 전해지는 벨기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예스24와 예술의 전당이 함께하는 ‘책 읽는 풍경’ 강연회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은 주로 벨기에의 디자인과 문화, 예술,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전문가적 입장이 아닌 개인적으로 제가 느낀 벨기에라는 나라에 대해서 서술한 거예요. 벨기에를 잘 아시는 분들 중에는 저와 다른 의견을 갖고 계신 분들도 꽤 많으실 거예요. 『벨기에 디자인 여행』은 역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 저의 감성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죠.”
전시 기획자이자 에디터로 활동 중인 저자는 프랑스 파리 유학 당시 벨기에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벨기에 친구들과의 인연이 그녀를 낯선 나라 벨기에로 이끌었다. 처음부터 벨기에와 강렬한 사랑에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남이 잦아질수록, 이 작은 나라가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에 점차 매료되었다.
『벨기에 디자인 여행』 에 사진작가로 참여한 세바스티안 슈티제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준 소중한 친구들 중 한명이다. 벨기에 브뤼헤 태생의 순수예술 사진작가인 그는 저자와 함께 벨기에를 여행하며 두 권의 책
『행복한 아이들 시몬과 누라처럼』 과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을 출간했다.
“벨기에는 우리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와 <틴티의 모험>이 모두 벨기에 작가의 작품이고요. 영국 작가가 쓴 <플란더스의 개>는 앤트워프의 작은 시골마을에 살았던 소년의 이야기예요. 플란더스가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거든요. 이렇게 우리 삶 속에 녹아있는 벨기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색다른 발견의 기쁨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뿐만 아니라 벨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3,000명의 군을 파병한 나라이자, 가장 먼저 대한민국을 자치 국가로 인정한 나라다. IMF 당시에는 유럽 국가 최초로 한국에 투자사절단을 파견하고 1억 3,000만 달러의 기금지원을 약속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와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벨기에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색소폰의 발명가가 벨기에 사람이라는 사실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본부가 벨기에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듯 벨기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좁은 까닭에
『벨기에 디자인 여행』 에 담긴 생생한 모습들은 더욱 신선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다름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아름답다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을 통해 저자는 ‘벨기에는 디자인이다’라고 말한다. 분명 벨기에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디자이너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벨기에의 모습은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디자인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벨기에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벨기에 사람들의 사고와 정치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벨기에의 디자인을 낳은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왜 벨기에 디자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벨기에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 벨기에적 사상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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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공간의 다양성, 형태들의 상이함에서 균형을 이루며 동시에 전통을 지킬 줄 아는 벨기에 사람들의 지혜는 벨기에 디자인이라는 외형적 요소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프랑스의 화려함, 독일의 미니멀리즘, 네덜란드 실용주의, 북부 유럽의 담백함이 어우러져 언뜻 이도 저도 아닌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각 스타일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벨기에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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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질적인 대상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이뤄내는 묘한 균형감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공개한 사진과 에피소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을 함께 엮은 지은경과 세바스티안 슈티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 속에는, 작은 생활 소품부터 창고 건물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에게 알맞은 방식과 형태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있었고,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벽지를 대체한 집이 있는가 하면, 책꽂이에 아기자기한 접시들을 놓아둔 거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겐트 시청 앞 광장에 위치한 건축물인 시홀(Hall Municipal)은 중세의 건축물 사이에 지어진 초현대식 건물임에도 전혀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듯한 오묘한 감동까지 안겨 주었다. 앙리 반 데 벨데가 아르누보 양식으로 설계한 도서관 ‘부크토른(Boekentoren)’ 역시 기존의 형식을 따르지 않은 건축물이다. 일반적으로 아르누보 양식은 부드러운 곡선을 특징으로 하지만, 부크토른에는 곡선과 함께 견고한 직선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겐트에서는 리크트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요. 축제 기간 동안 음악과 반짝이는 불빛들이 끊이지 않아요. 페스티벌의 코너마다 장식이 되어 있는 걸 보면서, 그 작은 도시 안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정말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활동들을 펼쳐낸다는 게 정말 인상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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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스타일과 의견들이 공존하지만 벨기에는 항상 다양함 속에서 절충과 합의를 적절하게 이루어냈다. 또 서로 다름을 존중하며 상대방을 향해 무한하게 열린 사고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벨기에 특유의 고유한 본질은 잃지 않으며 전통과 현대적인 것을 보기 좋게 결합시켰다.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가 함께 공존하고 혼합되어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띠고 있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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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고와 문화를 수용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벨기에의 특성은 그곳의 디자인을 풍성하게 했다. 그 이야기들을 모두 담아낸
『벨기에 디자인 여행』 역시 다채로움으로 가득 채워졌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자신의 눈길이 닿았던 모든 곳에서 디자인을 읽어내고, 그 안에서 벨기에를 발견한다. 도시의 건물들과 그곳에 깃든 색채들에서도,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들 속에서도 그녀는 디자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벨기에 사람들의 철학과 감성을 바라본다. 벨기에를 들려주는 목소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한 잔의 맥주와 한 조각의 초콜릿, 그리고 자전거와 호텔에서도 숨어있는 벨기에의 모습을 포착해 낸다. 그 모든 의미 있는 눈짓과 몸짓들은
『벨기에 디자인 여행』 을 벨기에에 대한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부인’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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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 디자인 여행 지은경 저/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안그라픽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벨기에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저자 지은경은 벨기에의 옆나라인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도, 대학 시절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에서도 벨기에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작은 나라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운명에 이끌려 벨기에를 알게 되었고 벨기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이제는 말하고 있다. 과연 벨기에의 무엇이 그토록 그를 매혹시켰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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