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어느 멋진 초여름 밤, 마종기 시인이 사소한 그리움으로 독자들을 불렀다. 서울 정동의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마종기 시인과 함께하는 <그 여름밤의 꿈>’이었다.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 출간기념 행사, 수많은 독자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이병률 시인이 사회를 봤고, 마종기 시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 가슴에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외로움이 움직이는 생물처럼 내 안에서 나와 함께 공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작곡가 베토벤은 외로움이 자신의 종교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시인만큼 외로움을 타는 인간은 없다.”(『우리 얼마나 함께』, p.276)
이 책을 보자면, 타국의 의사로 살아온 마종기 시인은 늘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외로움이었다. 고국의 시인이자 타국의 의사로 한평생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 몸은 떠나 있지만, 그는 언제나 고국의 시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마종기만의 맑은 소년이 있다”는 소설가 신경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책이 어쩌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만 50년이 되는 해에 출간된다. 그리고 내가 한국의 의사 면허를 받은 지도 50년, 군의관이 되어 한국 장교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한 지도 50년이 되는 해다.”(p.11)
글을 썼었는데, 의대는 어떻게 가게 됐나?
어머니가 교수였지만 가정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의과였다. 그런데, 들어가서도 4년 동안 뭘 하고 있는가를 내내 생각했다. 학비도 비쌌고, 가정형편에 낙제를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해서 열심히 했다. 졸업하고 군의관도 가야했고, 당시 뭔가에 쫓기고 밀리면서 살아온 느낌이 있다. 군의관을 하면서도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젊은 시절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밀려서 살았다. 그 중에는 경제적인 원인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보면 미국에 가서는 꽤 힘들었던 것으로 나온다.
미국에 갔을 때, 전 재산이 50달러였다. 당시는 유학을 가든 어쩌든 50달러 이상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국에 떨어져서, 첫날인지 그 다음날인지 환자 8명이 죽었다. 더 이상 미국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는데, 미국에서 다른 갈 데가 없었다. 병원에서 빌려준 돈으로 갔기 때문에 돈을 갚아야 했고, 일도 제대로 안 했는데 휴가를 낼 수도 없었고. 사방이 다 막힌 상태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절망이었다. 그러면서 詩를 다시 찾았다. 미국에 가기 전 문학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1년도 안 돼 (문학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를 다시 쓰게 됐다.
“내 아버지는 만 61세가 되던 1966년 가을,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 갑작스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사 개월 전 미국의 수련의로 고용되어 그곳 병원에서 보내준 비행기 표로 고국을 떠나 오하이오 주의 병원에서 인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고를 들었지만 계약을 파기할 수도 없었고, 귀국할 비행기 표 값도 없었고, 돈을 빌릴 친구도 없었고, 며칠간의 휴가조차 불가능했다.” (p.130)
마종기 시인의 낭송. 「우화의 강」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지금 있는 곳은 어떤가?
미국에서 처음에 인턴 할 때부터 40여 년 동안 의사로 살았던 곳은 오하이오 주였다. 그리고 11년 전 의사생활을 은퇴하고 플로리다 주로 이사했다. 플로리다 주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날씨가 굉장히 좋다. 그러나 5~8월은 굉장히 덥고 습도도 높아서 좀 불쾌할 때도 있다. 친구들은 내가 사는 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말한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내가 미국의 의사생활에서 은퇴를 한 후 우리 가족은 추운 곳을 떠나 따뜻한 남쪽을 찾아 플로리다 주에 정착하기로 했다. 그러나 겨울의 따뜻한 기후는 마음에 들었지만 여름에는 너무 덥고 습해서 숨쉬기조차 힘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고국에서 봄과 가을을 지내고 여름에는 미국 북부 쪽의 아이들이나 친구 집을 돌며 지내왔다.”(p.74)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는 계절, 날씨에 대한 것도 있을 것 같다. 고국의 어떤 날씨가 그립나?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막 쏟아지는 것 말고 조용조용하게 내리고 옷도 좀 더러워지는 (웃음). 그런 계절을 꿈꾸고 있었는데, 미국 중서부에는 그런 비가 오지 않고, 막 폭우가 쏟아진다. 친구에게 서울의 비가 그립다고 했더니, 서울도 많이 변했다며 폭우가 오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라. 환경오염 등과 같은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종기, 루시드 폴, 신경숙
싱어송 라이터 루시드 폴이 등장한다. 마종기 시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교감했었다. 두 사람은 이것을 모아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라는 책으로도 펴낸 바 있다. 내년 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토대로 한 서간집이 또 출간될 계획이다.
“서울의 어느 출판사가 유럽에 오래 살고 있는 음악인 겸 공학도인 그와 미국서 오래 살고 있는 의사 겸 시인인 내가 어딘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도록 주선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책은 루시드 폴의 유명세로 아직까지도 많이 팔리고 있다.”(p.272)
“안녕, 안녕/ 참 고마웠다고/ 사랑했다고”를 나지막이 속삭이던 「여름의 꽃」이 흘렀고, 「봄눈」에서는 “떨어지지 않는, 시들지 않는, 그대라는 꽃잎”을 노래했다. 세 번째 곡 「오, 사랑」.
꽃잎은 말라가고 힘찬 나무들조차 하얗게 앙상하게 변해도 들어줘 이렇게 끈질기게 선명하게 그대 부르는 이 목소리 따라 어디선가 숨 쉬고 있을 나를 찾아 내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내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노래 어땠나?
무척 좋았다. 「오, 사랑」은 좋아하는 노래다. 미국 하이웨이에 들어서서 루시드 폴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졸음 운전 하게 되지 않나?) 몇 해 전, 루시드 폴 음악을 처음 들었는데, 굉장히 이상했다. 자장가 같기도 하고. 왜 이런 음악을 하지? 그랬었다(일동 폭소). 왜 이 음악을 이해 못하는지, 나한테 실망해서 열심히 들었다.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던 거다. 그걸 못 깨니 새로운 음악, 나와 다른 세계의 음악을 이해 못한 거지. 오늘 루시드 폴을 만난다니, 평생 기억할 만한 좋은 날이란 생각이 들더라. 일생에 몇 번 없는 좋은 시간이다.
“그와 나의 이메일이 일 년 반 이상 대서양을 건너다니는 동안 그는 내 시를 여러 번 인용도 하고 좋아해주었다. 나도 그의 음악에 대해 편지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의 음악을 들어보았는데 아뿔싸, 몇 번을 되풀이해 들어도 나는 그의 음악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즐길 수가 없었다. 수많은 마니아 팬들을 열광시키는 그 느낌이 내게는 오지 않았다.”(p.273)
한국에 들어오기 전날 밤, 한국에 가면 이것부터 해야지, 그런 게 있었나?
내가 40여 년 미국에서 산 곳은 뉴욕, LA 등의 큰 도시는 아니었다. 한국음식점이 있긴 한데, 불편한 곳이다. 그래서 안 가게 되고. 한국에 가면 음식을 맛있게 먹겠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뭘 제일 먹고 싶나?) 냉면도 좋고, 감자탕도 좋고, 다 좋다.
책에 여행기가 실려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무엇이며, 여행할 때 원칙이 있다면?
시인은 물론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여행은 새로운 것, 새로운 세계를 보는 순간이 아닐까. 머리에서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새로운 문학적 발상의 불꽃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항상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기대해서 여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예술가에겐 중요하지 않을까. 의사할 때는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시간도 없고 정신적인 여유도 없어서. 의사생활 은퇴 후 자유로운 몸이 돼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시인 혹은 글 쓰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부탁한다.
내가 생각하는, 시인이 갖춰야 할 덕목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문학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다. 만드는 것이 아닌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거짓 없는 표현이어야 한다. 물론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는 공부하되, 내용은 진실이어야 한다. 어떤 시인들은 표현력은 좋은데, 내용이 작위적이고, 독자를 홀리고 감동을 줘야겠다는 강박 같은 게 보이더라. 진심을 표현하는 것이 힘이고, 그것만이 남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루시드 폴이 마종기 시인의 詩 「비망록 1」, 「캄보디아 저녁2」를 낭독했다. 이어 또 한 명의 초대 손님인 소설가 신경숙이 마종기 시인과 함께 자리했다.
두 분이 만났던 기억나는 순간이 있나?
마종기 : 평소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좋아했다. 언젠가 함께 불고기를 먹으러 갔는데, 일하는 분이 신경숙 작가에게 사인해달라는 것을 보고,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가요를 부르고 싶어서 노래방에 함께 갔는데, 신 작가님이 어떤 노래를 했는지는 잊어버렸다.
독자들에게 마종기 시인의 작품을 읽어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면?
신경숙 : 마종기 시인의 詩는 이렇다 저렇다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 詩를 읽으면 그대로 전달이 된다. 처음 접했을 때부터 마종기 시인의 詩는 이질감이 없었고, 정서적으로 흡입력이 있었다. 읽고 나면 마음 어딘가가 어두워지기도 하고 밝아지기도 하고, 설명할 순 없는데, 뭔가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다. 마종기 시인의 오래된 시집을 읽었는데, 느낌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여러 번 마음이 아픈 경험을 했다. 나쁜 쪽이 아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리움과 상실해버린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등에 대한 절절한 표현들. 그걸 내가 어떻게 설명하겠나. 읽으면서 느꼈으면 좋겠다.
신경숙 작가의 낭송이 이어졌다.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 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 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딴 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 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 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신경숙 작가는 『우리 얼마나 함께』를 읽다가 이 詩를 떠올렸다고 했다. 詩에 대한 설명이 될 만한 에세이다. 「박꽃과 달빛」이 그것이다.
“그날 밤의 광경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아버지를 그리며 한 편의 시를 써보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날 박꽃을 보며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p.132)
그렇게 여름밤이 접히고 있다. 일흔 넷 시인의 그리움과 애잔함이 잔뜩 묻은 초여름 밤. 다른 시인을 함께 생각했다. 마종기 시인보다 연배가 약간 높은, 김수영 시인의 45주기(6월16일)가 코앞이어서였다. 갑작스런 교통사고, 세계가 떠들썩했던 1968년에 떠났던 시인. 마종기 시인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여름밤, 그런 계절이다.
우리 얼마나 함께마종기 저 | 달 이 책은 시인의 시집이나 다른 산문집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세세한 일상과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심(詩心)이 되었던 맑고 투명한 마음은 사랑하는 가족과 여러 인연들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화작가 아버지, 현대무용가 어머니를 비롯하여 동생들과 세 아들, 친구들, 문단의 지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정 깊었는지도 우리는 새삼 느낄 수 있다. 오십 년 세월 꾸준히 시를 써온 시인이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풍경에는 필연적으로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하다.
부드러운 언어로 삶의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감싸안는 시인이다. 1939년 일본 도쿄에서 동화작가 마해송과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 앉아 혼자 동시를 쓰기 시작했던 소년은 중학생 시절부터 일약 ‘학원’ 문단의 스타가 되어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을 도맡는 등 타고난 시인의 재능을 맘껏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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