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봉석의 하드보일드로 세상읽기
8년 전에 헤어진 남자와 6년째 동거 중인 남자
누마타 마호카루의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 그래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중반 정도를 넘어서면 트릭이 무엇인지,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궁금하다. 대충의 스토리는 예상할 수 있지만, 토와코와 진지가 과연 어떤 인간인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게다가 누마타 마호카루의 필력은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휘몰아친다. 토와코의 사막 같은 마음을, 진지의 너덜너덜해진 몸을, 서늘하게 그려낸다.
8년 전에 헤어진 남자를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이름은 토와코. 지금은 진지라는 남자와 동거하면서, DVD를 빌리고 장을 보는 것 말고는 집에 틀어박혀만 있다. 토와코는 여전히 그녀를 버린 남자 쿠로사키를 잊지 못한다. 5년 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진지를 혐오하고 진저리를 치면서, 쿠로사키의 다정한 말과 그가 준 선물들을 떠올린다.
진지는 토와코보다 무려 15살이나 많다. 한때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녔지만 지금은 중소기업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다. 보는 여자들마다 들이대던 진지는 토와코에게도 접근했고, 쿠로사키에게 버림받아 공허했던 토와코는 진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진지는 혐오스럽다. 얼굴도 못 생겼고, 지저분하고 투박하다. 바지를 입다가 다리를 잘못 넣어 넘어지기도 하고, 손재주가 없어 뭘 망가뜨리기 일쑤다. 토와코는 진지에게 늘 화를 낸다.
진지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 가장 효과적으로 상처를 줄 말을 골라 진지의 심장을 세차게 찌르고 싶었다. 외로워서 진지와 함께 있는 건지, 진지와 함께 있어서 외로운 건지 토와코는 알 수 없었다.
누마타 마호카루의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 남자를 잊지 못하면서,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 지금 살고 있는 남자를 혐오하고, 상처를 주고 싶어하는 여자. 토와코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여전히 8년 전의 쿠로사키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도 얼핏 이해가 된다. ‘혼자 웅크리고 지냈던 빛도 바람도 들지 않는 텅 빈 함정의 절벽에서 진지를 혐오하는 것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올라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을 읽다보면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토와코가 상처를 입었고,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진지를 괴롭힌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진지가 대단히 혐오스럽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토와코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그녀의 생각을 통해서 보이는 진지라는 사람의 모습에 자꾸만 의심이 간다. 어쩌면 이건 토와코가 보고 있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낸 진지의 이미지인 건 아닐까? 토와코의 진술이, 토와코의 마음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지 않을까?
눈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기괴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토와코의 눈이 그걸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토와코는 5년 전 백화점에서 산 시계가 망가졌다는 것을 알고 항의 전화를 한다. 대형 백화점에서 판 시계라면 적어도 10년은 쓴다. 그런데 제조회사가 망했다고 해서 수리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계속해서 항의 전화를 거는 토와코를 보고 있으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토와코의 마음 한 구석이 심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진술에 자꾸만 의심이 간다. 토와코라는 인물을 보고 있으면, 기리노 나쓰오의 『아임 소리 마마』의 그녀를 보는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신의 욕망과 우월감에만 기초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여자. 그의 생각과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인물.
그런데 사건이 벌어진다. 아니 이미 사건은 벌어져 있고, 모호한 판단들이 난무한다. 쿠로사키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가 5년 전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와코는 진지를 의심한다. 그가 쿠로사키를 죽인 것은 아닐까? 그렇게 혐오스럽고 비열한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토와코는 백화점의 시계 판매 매장의 매니저인 미즈시마와 사랑에 빠진다. 아내와 이혼하고 토와코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미즈시마에게 푹 빠진다. 그런데 누군가 그들을 스토킹한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누군가 그들을 뒤따라 다니고, 협박한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누군가의 망상일까?
이게 꿈이 아니라면 모두 토와코의 망상일까? 모든 것이 전부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밖에서 일어하는 일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아니면 그 반대일까? 아아, 아아, 아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중반 정도를 넘어서면 트릭이 무엇인지,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궁금하다. 대충의 스토리는 예상할 수 있지만, 토와코와 진지가 과연 어떤 인간인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게다가 누마타 마호카루의 필력은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휘몰아친다. 토와코의 사막 같은 마음을, 진지의 너덜너덜해진 몸을, 서늘하게 그려낸다.
사람과 물건은 크게 다르다. 사람은 무섭다. 순수하게 타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 아는 사이도 아니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틈새에서, 언제나 이쪽으로 기어 나와 토와코에게 엉겨 붙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 토와코에게는 진지와 미스즈 언니 이외의 인간은 모두 물건 아니면 타인이었다.
걷고 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몸뚱이였다. 그럼에도 눈의 구멍에서는 뭔가에 홀린 인간의 빼도 박도 못할 광기가 당장에라도 검게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기분이었다. 그건 얼굴이 아니었다. 적어도 진지의 얼굴은 아니었다. 희로애락이 확실하고 턱없이 자신만만하며 걸핏하면 불평하던 평소의 진지를 움직이던 모든 감정이 전부 빠져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읽다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지만, 그건 읽으면서 직접 느껴야만 한다. 그걸 느껴야만 결말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단순하고, 식상한 설정이라도 그걸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솜씨에 따라 얼마나 다른 여운을 남기는지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누마타 마호카루는 20대에 결혼을 했다가 30대에 이혼을 하고, 친정인 사찰의 주지가 되기 위해 출가해 승려가 된다. 그리고 마흔 넷에 친구와 동업하여 건설 컨설팅 회사를 차리지만 10년 만에 파산한다. 파산 후, 대인공포증이 있었던 누마타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데뷔작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을 발표한 것은 그녀의 나이 56세인 2005년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에서 얻은 경험과 인식 덕분인지, 누마타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부분들을 강렬하게 쑤셔대며 외면하고픈 기억의 근원을 드러낸다. 아프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토와코는 생각한다.
그대로 쿠로사키 곁에서 살면서 쿠로사키의 아이를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즈시마를 만나지도 않고, 진지도 만나지도 않고, 다른 세상에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그 세상이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이란, 내가 살고 인식하는 세상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내 알바가 아니다. 그 세상은, 그 세상의 내가 주관하고 있을 뿐이니까. 아무리 쓰라려도, 결국 우리는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 역시 해야만 하고. 그러니까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은 결국 순애 이야기다. 그리고 단언컨대 『용의자 X의 헌신』을 뛰어넘는, 처절하고 비통한 순애보다. 이 말들로 귀결되는.
즐거웠다. 토와코. 진짜 즐거웠다. 이 삶이 언제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에 별별 일이 다 생겨도 그렇게 즐거웠나 봐.
관련태그: 누마타 마호카루,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8,100원(10% + 5%)
11,700원(10% + 5%)
12,150원(10% + 5%)
12,420원(10% + 5%)
12,420원(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