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이후의 나, 꼰대
대한민국 교사는 대부분 죽었다
이래서야 마음 놓고 학교에 아이 맡기겠나
학교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교사가 갖춰야할 최소한의 덕목이자 최대치의 의무는 바로 학생에 대한 관심이다. 그렇지 못한 교사는 ‘죽은 교사’일 뿐이다. 자신의 직장(학교)에서 자신의 자아실현(훌륭한 제자 양성)을 훼방하는 제도적/ 행정적/ 인사적/ 재정적/ 설비적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지 않는 교사는 죽은 교사다. 지금 한국 대부분의 교사, 불행히도, 죽었다.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학교는 죽었다 (Mort de l'ecole)”라고 일갈한 이는 프랑스의 교육학자 에버레트 라이머(Everett W. Reimer) 였다. 1971년에 처음 나온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라이머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학교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시도했다.
현재의 제도로는 진정한 교육이 불가능하다. 기존의 계급구조를 공고히 하면서 재생산하고, ‘사회적 거세’와 ‘길들임’만 이뤄지고 있는 공간이 학교라고 라이머는 결론 내린다. 학교-교육기관 및 제도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인간’은 어떠한 잠재성과 가능성을 발휘하는 사람이 아닌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사람이다. 즉 하나의 규격화된 상품처럼 만들도록 유도되고 있을 뿐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이러한 시각은 그 8년 뒤 나온 영국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에서도 확인된다.
We don’t need no education.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No dark sarcasm in the classroom.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Hey,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All in all you’re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우린 이런 식의 교육은 필요 없어
더 이상 생각을 조종당하고 싶지 않아
교실 안에서 더 이상 비꼬는 말을 듣긴 싫어
선생, 그 아이들을 좀 내버려 둬
이봐 선생, 아이들 좀 내버려 두라구
결국 그건 또 하나의 벽돌일 뿐
결국 넌 또 다른 벽돌일 뿐이야
억압적 교육 환경으로 전세계 톱을 달리는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 서태지가 반기를 들었다. 제목조차 ‘교실 이데아’였던가.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체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알 수 있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이런 시각은 『학교는 죽었다』가 출간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은 꽤 보편화된 관점이다. 유난히 오랜 기간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을 견뎌내야 했던 우리나라는, 결국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묻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학교를 구성하는 주요한 축(軸) - 학교는 학생, 교사, 학부모라는 3대 축으로 형성된다 - 인 교사는 대체 무엇을 해왔으며, 또 어떻게 변해왔느냐는 것이다.
드라마 학교 2013의 인기 비결
최근 ‘학교 2013’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KBS2-TV가 학교 교육의 현주소를 담은 작품이다. 10년 전에 방영했던 KBS 청소년 드라마 ‘학교’ 시리즈의 후속작인 이 드라마는 첫 회 전국시청률 8%로 출발, 단 9회 만에 2배 가까이 시청률을 끌어 올렸다. 새 해 첫날인 지난 1일 15.7%를 기록했는데, 특이한 것은 10대와 40대의 시청률이 각각 17.2%와 16.4%였다는 점이다. 대체 40대 중년층이 왜 이 드라마에 몰입하는가.
ⓒKBS
경쟁이 전부인 ‘반(反) 교육적’ 학교 현장에서 주인공인 문학 담당 기간제 교사 정인재(장나라)는 ‘수능형’ 수업에 흥미를 잃고 잠만 자는 학생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일부만을 위한 수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고민한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2학년 2반 아이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3학년으로 진학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 시 한 편이라도 읽게 하려고 애쓴다. 반면 스타 학원 강사 출신인 강세찬(최다니엘)은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을 “수업에 방해된다”며 교실 밖으로 쫓아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수능 맞춤형 교사’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은 설득력 떨어지는 섣부른 화해나 모호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공간을 “서울 시내 179개 고등학교 중 149등을 기록한 강북의 고등학교”로 구체적으로 설정했다.
‘회색빛 교실’의 현실은 쉽게 믿기 힘들 정도다. 꼬박꼬박 학교는 나오지만 간밤의 밀린 수면을 취하는 학생, 공부는 싫지만 대학은 가고 싶은 대다수의 학생들. 이 아이들에게 학교는 “대학이라는 공통의 두려움에 지배당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견뎌야 하는 유배지”(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일 뿐이다.
특목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위권 일반고에 들어온 성적 우수 학생은 학원에서조차 차별받으며 자괴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교사의 가르침보다 스타 학원 강사의 강의를 신뢰한다. 학부모들은 시험 문제의 난이도를 꼬투리 잡아 교사를 상대로 드잡이 수준의 시비를 건다. “전교 1등 학생은 특목고 학생이 아닌 게 창피하고, 모범생은 극성 엄마 때문에 괴롭다. 학생들은 ‘일진’ 눈치를 보느라 힘들고, ‘일진’들은 학교 밖 ‘형님’들에게 시달린다.” 학교가 아니라 감옥이자 지옥이다. 한국 학생의 행복도가 4년 연속 OECD 중 꼴찌를 기록하고, 상습적인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도 전국에 178만 명이나 된다는 통계도 있다.
교사도 피곤하다
교사는 어떠한가. 이미 교권의 공간에는 아이들의 존경이 없다. 오히려 교사가 학생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교수법 분야의 석학인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자신에게 30시간짜리 온라인 교직 연수를 받은 초중고교 교사들에게 소감을 써보라고 했다. 조 교수가 이렇게 해서 교사들에게 받은 글은 2만3247편. 한글 파일로 1,819페이지였다. 교사들도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이 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잃어본 조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2013년 1월 10일자)
“처음 학교에 왔을 때 힘든 임용고시를 통과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 넘쳐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3년이 지난 지금 학생, 교감, 교장, 학교 업무를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교사로서 학교에 오는 일이 전혀 즐겁지 않고 학교 밖에서도 교사라는 사실을 알리기 두려워졌다.”
“학생을 위한 배려, 열의, 준비가 하나도 없는, 그저 잡무와 공문에 허덕이며, 나나 학생들에게 즐거움이란 조금도 없는 학교생활을 했다.”
교사가 인재가 몰리는 인기 직업이고, 교대와 사범대가 최고의 인기 학과가 됐지만, 위의 글들에서 보다시피 “현실을 관망하거나 냉소하거나 현실에 안주하거나 대항하고 싶은 교사들에게 학교는 무력감과 싸워야 하는 조직일 뿐”이다.
조벽 교수는 이런 현실은, 교사가 되기 전에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은 많이 배웠지만, 지식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방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 채 현장에 투입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교육현장은 급변하고 있는데 교사를 배출하는 사범대와 교대 교육과정이 이론에 치중되어 있고, 학생과 소통하는 법, 학부모를 대하는 법 등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법과 인성을 기르는 법은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고1 큰 아이와, 일반 중1 막내, 두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체득한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교사들에게 학교는 ‘직장’이다. (위의 글을 인용하자면) 잡무와 공문에 허덕이고 즐거움이란 찾아볼 수 없는 직장이다. 허나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에게 직장은 그런 곳이다. 교사라고 하등 다를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를 단순한 월급쟁이/ 노동자로 볼 때 그러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나는 학교는 교사들에게 그저 고만고만한 일터/ 작업장이 아닌 ‘신성한’ 직장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권은 신성한 권리다. 돈 받은 만큼만 가르치는 학원이 아닌 다음에야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단지 지식만 전수해선 안 된다. 교정에서 침을 함부로 뱉어서도 안 되고, 쌍소리를 질러서도 안 되는 신성한 영역인 곳이다. 어찌하여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신성한 권리를 스스로 망각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내팽개치기까지 하는가.
그러나, 신성한 교권에 ‘기계적으로’ 집착하다보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교육을 시장법칙으로 설명해보자. 학교/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 학부모는 소비자다. 학교/ 교사는 교육 소비자인 학생/ 학부모에게 양질의 교육(상품)을 공급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공급자가 소비자의 ‘니즈’와 변덕스러운 ‘비위’를 맞추는 건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자세다. 고교 졸업자 수를 상회하는 신입생 정원을 가진 전국의 대학들은 학생들 모셔오기에 혈안이다. 외고, 자사고를 비롯한 특목고도 세일즈에 실패하면 정원을 못 채우고 있는 현실이다.
거주지 인근 학생들을 ‘거저’ 받았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의 요구에 무심한 채 “교권이 땅에 떨어진 현실” 운운하며 개탄만 하고 있다면 시대착오도 유만부득이다. 더구나 미국이나 유럽의 교사들과 달리 한국의 초중고 교사는 아무 교육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방학 -- 더구나 1년의 4분의 1이다 --에도 월급이 나온다. 똑떨어지는 ‘무(無)노동, 유(有)임금’이다. 20년 근속 채우면 죽을 때까지 연금도 나온다. 누리는 만큼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학부모는 더 피곤하다
얼마 전 고1 큰 아이가 기흉(氣胸)에 걸려 3차 의료기관에 5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사이 담임교사는 문병은커녕 전화 한통 없었다. 병원은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멀쩡히 등교했던 아이가 오전 9시쯤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교실에서 쓰러졌고, 양호 교사의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입원한 경우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입원 3일째에는 애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결석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사실이다. 개콘식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였다.
그 전 사연도 학부모인 나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겨울방학 시작 직전 학부모 면담 기간에 맞벌이인 우리 부부가 오후 7시 30분 약속한 시각에 학교를 찾았다. 선생의 첫 마디는 “저녁도 못 먹었다”였다. 나는 광화문에서, 와이프는 수원에서 급히 퇴근하느라 우리도 물론 식전이었다. 속으론 기도 안 찼으나, 아이를 ‘볼모’로 잡혀 있는 학부모로선 - 이게 무슨 말인지는 겪어봐야 한다. 입시사정관 전형, 학생부와 연동되는 최악의 시스템 중 하나다 -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면담이 시작되려하자 갑자기 우리 아이를 불러 곁에 앉혔다. 그리곤 한 마디 내뱉었다. “네가 얘기 시작해 봐.”
학부모가 선생을 따로 찾아가 만나는 건, 집안 생활로는 알 수 없는 아이의 학교생활을 듣기 위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사자인 아이가 알아선 곤란한, 알 필요가 없는, 사안들이 의외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를 바로 옆에 불러다 앉혀 놓고 학부모 면담을 하자는 거였다. 얘기가 진행될수록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건, 아이가 그 동안 무단 조퇴와 무단 결석을 몇 차례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수능에서 몇 문제를 틀린 것과 동일한 효과일 뿐만 아니라, 아이의 생활태도나 심지어 안전과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아이가 무단으로 조퇴를 하고 학교 밖으로 나간 사실을 알고도 그 부모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아온 것이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담임이라면 학생의 조퇴와 결석에 민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무단’ 조퇴와 결석이라면 말이다. 일부 사례로 믿고 싶지만, 하필 그 일부가 바로 내 아이의 열일곱 살 인생 1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담임이라는 게 문제였다. 문병 온 아이 친구 녀석들 8명에 저녁을 사주며 물어보니 “담탱이는 우리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고 이구동성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런 교사들을 걸러낼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일반 회사는 근무태만으로 징계, 심지어 해고까지 가능하지만, 학교엔 그런 게 없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하지 않는 한 학교 밖에서 절도나 살인을 하지 않는 한 정년 채워 연금 받아먹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고도 아이들에게 존경 받기를 원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양심불량이며 도둑놈 심보다.
학생에게 관심 쏟을 선생님, 어디 없나요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닌 70, 80년대 남학교엔 어김없이 각종 개 이름들이 난무했다. 멍멍이, 셰퍼드, 발발이, 미친개…. 주로 체육 교사, 교련 담당 아니면 생활주임의 별명들이었다. 주머니에 손 넣었다고, 옆머리 귀 살짝 건드렸다고, 짝다리 했다고, 지난 중간고사보다 점수 떨어졌다고, 교복 단추 풀고 다녔다고, 심지어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도시락 까먹어 교살에 김치 냄새 풍겼다고 칠판 앞으로 불러내 매타작을 했다. 그들은 졸업장에 나타나지 못했다. 까까머리 제자들에게 두들겨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 아이의 담임을 보며 지난 그 선생들이 불현듯 떠올랐고, 그들이 그리워졌다. “졸업한 뒤 길거리에서 만나면 반드시 밟아버린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그 선생들이 정말 그리워졌다. 교권이고 학생인권이고 다 차치하고, 그들은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고 입에 달고 살았고, “선생은 학생을 학생답게 만들 의무가 있다”며 대걸렛자루를 휘둘렀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입에 발린 소리 같은 건 뱉지도 않았지만 방과후 골목에서도 교모 삐딱하게 쓴 아이들을 맞닥뜨리면 일일이 불러 세워 잔소리를 했었다.
강아지도 제 주인이 진짜 저를 이뻐하는지, 대충 먹을 거나 챙겨주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사람은, 특히 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하이틴들은 교감이, 담임이, 학생주임이 나를 사촌 동생처럼 관심 가져 주는지, 아님 지하철 노숙자 취급을 하는지 금방 알아챈다. 교수법이니, 학생인권이니, 무상급식이니, 대입 성적이니, 모두 부차적인 문제다. 학교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교사가 갖춰야할 최소한의 덕목이자 최대치의 의무는 바로 학생에 대한 관심이다. 그렇지 못한 교사는 ‘죽은 교사’일 뿐이다. 자신의 직장(학교)에서 자신의 자아실현(훌륭한 제자 양성)을 훼방하는 제도적/ 행정적/ 인사적/ 재정적/ 설비적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지 않는 교사는 죽은 교사다. 지금 한국 대부분의 교사, 불행히도, 죽었다. 죽은 지 이미 오래다.
* 이 글은 채널예스의 논지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문을 읽고, TV를 보고,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무심결에 범하는 오류와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인습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 때의 세상이 좀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